[Opinion] 당신의 감성을 보여주세요 [문화 전반]

글 입력 2023.04.06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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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과 감성



바야흐로 자기표현의 시대다. 인터넷과 디지털 기기의 보급, SNS 플랫폼의 확산과 함께 누구나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영상을 올려 자신의 삶을 공유할 수 있다. 더 이상 전문가에 의해 잘 짜여진 이야기만이 콘텐츠로 다뤄지는 것이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학교와 회사에 나가고, 주말에 소소한 휴식을 누리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 그 모든 것이 콘텐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일상 콘텐츠’로서 성립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제가 필요하다. 위화감이나 거부감이 들 만큼 그 내용이 이질적이지는 않아서 ‘일상’의 범주 안에 넣을 수 있으면서도, 구미를 당길 만큼의 흥미로움은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CCTV 영상처럼 자신의 삶을 기계적으로 옮겨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남들에게 충분히 ‘보임직한 일상’이 될 부분을 선별하여 가공하고, 콘텐츠로서 제공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듯 일상을 '보임직하게' 만드는 모든 것, 다시 말해 일상이 ‘일상 콘텐츠’로서 성립할 수 있는 조건은 곧 ‘취향’과 ‘감성’으로 요약된다. 그것이 덧입혀지지 않은 일상은 그 자체로는 눈길을 끌 수 없는 원재료에 불과하다. 

 

잠시 취향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자. 취향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 또는 그런 경향”이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들음으로써, 즉 한 사람의 일상은 그의 취향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취향과 감성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 누군가의 취향은, 그가 흥미로울 정도의 적당한 이질감을 가진 경험을 하도록 유도하고, 이러한 유도 하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경험은 콘텐츠 속에 녹아 ‘감성’을 만들어내며, 취향의 정당성과 진실성(이 사람이 정말로 이러한 취향을 가졌는지에 대한 확신)은 콘텐츠의 요소요소가 이루고 있는 일관성을 통해 성립한다. 

 

우리는 지극히 인위적인 것에 분위기나 감성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콘텐츠 속, 그 사람의 취향이 ‘자연히’ 이끌어낸 경험들에서 ‘은은하게 배어 나오는’ 일관적인 분위기는 일종의 아우라를 구성한다. 지극히 자연스럽고 내적인 동기에 의해, 그럼직한 경험을 한 사람들의 기록. 그것이 일상 콘텐츠인 것이다. 이렇게 평범한 일상 속에 배어나오는 그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들, 다시 말해 그의 ‘취향’이 형성하는 특유의 분위기인 ‘감성’은 그 자체로 콘텐츠가 되어 공감의 매개가 되기도, 선망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런데 이 취향은 정말로 지극히 개인적일까? 사실 이것은 단순히 온전한 ‘나의 취향’이라기보다는, 외부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구성되고 변형되는 것이기도 하다. 콘텐츠 제작에 사용되는 시간과 기술, 노력 등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콘텐츠를 만들어 올린다는 것은 결국 이 콘텐츠를 매개로 타인과 교류하고 소통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전시된다는 것, 다시 말해 이것을 보아줄 누군가를 전제한다는 사실은 결국 콘텐츠에 담기는 일상의 성질이 나의 취향에서 기반함과 동시에 타인의 취향이기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콘텐츠는 정보의 바다 속에 묻혀버릴 뿐이다. 

 

이는 특히 SNS 플랫폼의 특성과 결합하여 강화된다. 클릭수, 조회수, 좋아요 수, 구독자 수 등 콘텐츠의 인기도가 수치화되는 플랫폼 시스템 속에서는, 전시된 나의 취향, 나의 일부가 얼마나 그럼직한가를 실시간으로 수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곧 취향에 대한 취향, 어떤 취향이 보임직한가에 대한 이데올로기를 생산해낸다. 결국, 일상 콘텐츠 속에 나타나는 취향과 감성은 이러한 플랫폼 구조 속, 주의를 끌 수 있는 취향의 선별이 이루어진 후에 남게 된 것들의 구성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콘텐츠 생산자는 이 선별의 과정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취향과 감성의 진실성을 강화하게 된다.  

 

 

 

그럴 듯한 취향, 그럴 듯한 사람


 

취향과 감성, 취향의 전시에 대해 나름대로 분석해본 바를 다소 딱딱하게 적어내려 보았는데, 사실 내가 이렇게까지 골몰하게 된 것은 언젠가부터 형체 없는 답답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 아이디를 교환하고 그의 피드를 통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파악하는 일이 하나의 관례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어떤 일들을 주로 하고 지내는지, 다시 말해 그 사람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 어떤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지는 그 자체로 중요한 정보가 되곤 했다. 그 정보들은 왠지 모를 기분 좋은 거리감(위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우라'), 알아가고 싶다는 인간적 호기심과 같이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데 필요한 동력들을 촉진하는 효율적인 매개였지만, 사실 일종의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나 역시도 '그럴 듯한' 사람이 되어 보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파볼 만한 구석이 있는 사람, 흥미로운 사람, 자신만의 '감성'을 가진 사람. 잘 쌓은(것으로 보이는) 취향과 그것이 만들어낸 '감성'은, 그 자체로 그 사람의 자원이 된다. 얼마나 매끄러운 취향을 매끄럽게 내보이는가에 따라서 나의 내실이 다르게 비춰진다. 다시 말해 내 취향이 (비유적인 의미로)빈곤해지면, 나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나를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줄 수 있으면서, 너무 인위적이지도 않으면서, 나름대로 뭔가 '있어 보이는' 경험들을 잘 꾸며서 내놓는 일에 대한 강박을 느끼기 시작했다. 자연스럽지 않으면 허세가 되어버리고, 너무 얄팍하면 시시해진다. 그 사이 어드메를 아슬하게 줄타기하면서 나를 계속 정제해야 했다. 

 

이미지 중심 SNS의 발달과 함께 '보여지는' 나를 신경 쓰게 되고, 그렇게 보여지는 나는 진짜가 아니라서 괴리감이 들고, 그럼에도 과시적 생활을 멈출 수 없다는 등의 심리적 염증은 사실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사회적 논의의 장에 올라온 지가 꽤 오래된 안건들에,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처방들은 이미 차고 넘쳤다. 다만, 최근 실감하기 시작한 것은 취향 형성에 대한 섬세한 압박이 더욱 교묘해져 왔다는 것. 그럴 듯하다는 감각의 중심이 예전에는 그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경험이나 매개의 품질 그 자체에 있었다면, 지금은 그런 고품질의 무언가는 당연히 전제되는 와중에 그것이 자연스럽고 일관되기까지 해야 한다. 

 

가령 이런 것이다. 과거의 취향 전시가 값비싼 향수 사진을 잘 배치해서 올리는 식이었다면, 지금은 그런 '속 보이는' 전시 없이도 일상에 자신의 취향을 또렷하게 묻어나게 해야 한다. 그것이 그 사람의 '감성'이다. 결국 거기에는 좋은 향을 알아보는 자신의 안목, 그런 안목과 일관됨을 갖추기까지 수없이 대상을 접해보았을 소비의 경험이 전제되어 있다. 단순히 과시적이고 단발적인 소비 경험 몇 번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 '고급진' 취향의 형성과 그것의 고의적이지 않은 어필. 누군가는 한 번쯤 접해볼까 말까 한 것들을 꼼꼼히 뜯어보고 즐기고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의, 어떤 대상을 체화시킨 자의 언행이 가지는 여유로운 우아함에 대한 요구. 그것이 요즘의 내가 느끼는 취향에 대한 압박이었다. 애초에 취향이란 것이 무언가. 필수불가결한 것들보단 있어서 더 좋은 것들에 관한 것 아니던가. 

 

문제는 이것이 일단 소비의 문제가 아닌 취향의 문제가 되어버리면, 그건 속물적 기준보다는 깊이의 문제를 따지는 것으로 읽히게 된다는 점이다. 이런 따짐은 표면적으로는 경박하다며 비난받지 않을 수 있다. 어떤 취향은 얄팍한 것으로 간주되고, 그 취향을 가진 사람 역시 얄팍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이 연쇄에서는 많은 것이 은폐된다. 단순히 수만 원 가량의 향수와 수십만 원의 가량의 향수 중 후자를 좋아하는 사람의 취향이 더 높이 평가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만약 똑같이 전자를 선호한다고 하더라도, 수백만 원어치 이상의 경험을 거쳐올 수 있던 사람의 선택이 가진 깊이에 사람들은 민감하게 반응하고 환호한다. 그들은 취향이라는 결과물에서 읽어낼 수 있는 자취의 퀄리티를 따진다. 

 

결국 문화 자본과 계급 재생산에 대한 부르디외식 논의로 귀결된 듯도 하지만, 특히 요즘의 취향, 그것도 '자연스러운' 취향이 그 자체로 상품성을 지니고 팔려나가는 현상을 생각하면 한 번쯤 제동을 걸고 재차 생각해볼 지점이다. 우리가 선망하는 것은 취향인가, 취향 뒤에 숨은 무언가인가. 잘 꾸려온 취향으로 내보이게 되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

  

 

[황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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