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내가 실패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오색 찬란 실패담

정지음 작가의 에세이 『오색 찬란 실패담』
글 입력 2023.03.27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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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강당 무대에 선 선생님이 이렇게 물었다. “어른에게 가위를 드릴 때는 어떻게 드려야 할까요?” 객석의 가장 오른쪽 끝에 앉아있던 나는 손을 아주 높이 뻗어도 선생님의 시야에 들지 못했다. 그 사이에 많은 아이들이 답을 맞히지 못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아이 참, 애들이 뭘 모르네. 내가 답을 알고 있다니까요?’ 나는 심히 답답하다는 표정을 하고선 곧 자리에서 일어날 기세로 더 강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냥 지나치고는 배기지 못할 그 이글거리는 몸짓을 발견하신 선생님께서 드디어, 내게 기회를 주셨다. 어두운 객석에서 자신 있게 무대로 걸어 올라간 나는 90도로 꾸벅 인사를 하며 가위를 내밀었고, 정답이 아닐 리 없다는 확신으로 가득 찬 꼬마를 향한 선생님의 대답은 땡!이었다.

 

이토록이나 선명한 십오여 년 전의 필름은 이 즈음의 화면에서 싹둑 잘려있다. 그 이후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문제의 정답은 가위의 날이 아닌 손잡이 부분이 받는 사람을 향하도록 건네는 것이었다는 사실 정도 밖에는.

 

나는 이 경험을 아마 중학교 시절까지 아주 부끄러운 흑역사로 여겼다. 떠오르면 어쩔 줄 모르고 눈을 질끈 감게 되는 부류의 기억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로 나는 이 정도의 수모에는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과학 시험에서 30점을 맞거나 내신 9등급을 달성하는 등의, 핑계도 대지 못할 정도의 오답자가 되면서 그런 건 아주 귀여운 수준이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의 나는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 먼저 날카로운 도구를 주고받을 때의 예절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며 또 내가 느낀 부끄러움의 이름은 ‘수치심’이요, 어떤 수치를 덮을 수 있는 건 더 강렬한 수치뿐이다, 라고 말하는 어른이 되었다.

 


[표1] 오색 찬란 실패담.jpg

 

 

한국에서 모든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틀린 답을 말하고 경쟁에서 뒤처지는 어떤 실패 뒤에 무조건적인 두려움에 압도당하는 경험을 나만 하는 게 아니라고 느꼈다. 내 생각에 많은 사람들에게 실패란 실제의 경중과는 상관없이 가장 엄중한 처벌 대상이었다. 기준에 따라 실패일 수도 아닐 수도 있었지만 실패한 몸, 실패한 입시, 실패한 스펙을 판단하는 과정은 언제나 간단명료했고, 좌절과 수치, 죄책감과 무력감, 온갖 비관만이 실패의 옵션이라는 것도 문제였다.

 

이런 과중한 불운이 엉겨 붙어 키운 실패의 죗값은 지나치게 셌다. 실패보다 유효기간이 짧은 실수조차도 우리는 서로 용납하지 못했다. 누적되는 실패 경험은 ‘실패한 인생’이라는 비약적인 결론으로 아무렇게나 흘러도 이상하지 않게 여겨졌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모든 일과를 실패와 실수만을 피하기 위한 방식으로 갈아 넣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삶은 완전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때때로 계란프라이를 태워먹고, 노력을 들이더라도 끝끝내 아쉬움을 남기는 인간관계도 있다. 연간 계획은 사랑, 돈, 학업, 건강 중 하나만 실천할 수 있어도 감사하다. 이런 걸 생각하면 실패 그 언저리에도 가지 않으려는 부단한 노력이 무상할 정도로 실패는 보기보다 가볍고 만만한 녀석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흔히 실패의 색을 잿빛이라 여긴다. 실패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어둡고 축축한 느낌 그대로 말이다. 하지만 두려움을 걷어낸 채 진짜 실패의 색을 목격한 적이 있는가? 적어도 내가 직면한 실패의 색깔은 생각처럼 전형적이지 않았다. 실패라는 경험 자체는 어둡고 축축한 기운을 풍기더라도, 그에 약간의 용기를 주입하면 신기한 화학 반응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려는 억지를 버리고 나니, 내게는 나의 실패가 모두 다른 빛을 가진 형형색색의 경험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오색 찬란 실패담』은, 에세이 『젊은 ADHD의 슬픔』과 『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지』, 소설 『언러키 스타트업』의 저자 정지음의 신간 에세이다. 이 책은 실패를 아예 다른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대체로 실패를 카테고리화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마음 깊이 묶어두고, 묻어두고, 감춰 봉인해둔 그것들은 내면의 고물들에 불과하다. 누군가에게 무안을 당하거나, 말실수를 한 기억은 입 밖으로 꺼내면 아프기만 할 뿐, 어딘가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면 먼지 쌓인 그들은 “잿빛”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실패의 경험들에 “오색 찬란”이라는 빛나는 이름을 붙여준다. 수치심은 빨갛게 물든 마음으로, 주의등 없이 폭주하거나 아예 멈춰 선 극단의 에피소드들엔 “노란불이 없는 내 신호등”이라는 성격을 부여한다.

 

실제로 그의 경험들은 이름만큼 다채로운 감정들을 불러일으킨다. 계단에서 구르고 정지된 오토바이에 몸을 박아 병원으로 직행한 아픈 경험은 텍스트로 읽는 사람의 눈앞도 아찔할 만큼 아슬아슬하고, 요가원에서 고꾸라진 경험이나 ‘수모의 원나잇’ 대목은 ‘공감성 수치’에 함께 이마를 짚어보게 된다.

 

그런가 하면 직장을 돌연 퇴사하고 전업 작가로 전향하며 “신흥 귀족”인 줄만 알았던 프리랜서 생활을 하게 된 경험은 “세상일은 언제나 양면적이었다”는 깨달음을 얻은 원고로 승화시킨다.


 

이쯤에서 나를 강철 솔로로 만들어 준 의인들을 소개해도 좋을 것이다. 그들은 또래 비혼 여성도 아니고 기혼 여성은 더더욱 아니요, 다만 내 전 애인들이다. 그 인간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 같은 식은땀이 줄줄 날 때가 있다. 왜 더 빨리 그 인간과 헤어지지 못했나? 아니, 살면서 영영 만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생각하다 보면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에게 윽발질러서라도 타임머신을 갖고 싶어진다. 어쨌든 그들과 결혼하지 않은 현재, 난 천운을 타고난 사람이라 느낀다.

 

 

실패 경험을 나열하는 작가의 서술도 이제껏 익숙하게 보아온 잿빛 우울과는 전혀 다른 색이다. 취업 면접 자리에서 긴 공백에 대해 묻는 면접관의 앞에 선 것처럼 주눅 들어있지도, 문드러진 내면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과장해낸 자학적인 톤도 아니다.

 

그의 언어에서는 두려운 감정을 용기 있게 걷어내고 실패를 하나의 경험으로 인식하게 된 사람만의 산뜻함이 느껴진다. 거기에 정지음 작가 특유의 탁월한 비유 표현과 명랑하고 유쾌한 재치가 더해지자, 나는 누군가의 실패담을 읽으면서 웃음을 터뜨리는 미안한 일을 저지르기에 이르렀다.

 

이 책을 읽더라도 우리의 실패한 과거는 바꿀 수 없음이 분명하다. 다만 책을 통해서 앞으로 겪을 실패 이후의 소모적인 자책감이나 뒤틀리는 심정 같은 것들을 한 걸음 밖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실제로 묵은 때같이 주름져있는 꾀죄죄한 에피소드들 정도는 시트콤 시나리오를 쓰듯 글로 써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넘어지는 걸 겁내지 않는 사람은 없다. 다칠 테고 또 아플 테니까 말이다. 살갗이 벗겨져 피가 나고 또 멍이 들면 얼마간 상처를 눈으로 보고 또 통증을 겪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어짐은 대수롭지 않은 사건으로 취급된다. 마찬가지로 꽁꽁 얼어있는 우리들의 실패를 녹이면 약간의 스크래치, 살짝 고인 피 정도가 전부이지 않을까.

 

그러니까, 실패에도 거품이 껴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도 이미 알고 있지 않는가. 그동안의 숱한 실패는 과대포장된 택배처럼 불필요한 쓰레기들을 갖고 배달되어 왔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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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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