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또 다른 달항아리를 기다리며 [미술/전시]

글 입력 2023.03.26 13:42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KakaoTalk_20230326_084654720.jpg

 

 

머리가 복잡할 때면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백자실에 ‘달멍’하러 가곤 한다. 내겐 ‘사유의 방’의 주인공 반가사유상보다 이지러진 달항아리의 어딘가 불완전한 모습이 오히려 마음에 안정과 고요를 가져다 준다. 큰 사발 두 개를 맞붙였기 때문에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도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이어 붙인 흔적이 남아 있다. 게다가 가마에 들어가면 수축률이 미세하게 서로 달라 완벽하게 둥근 모양이 아니며 보는 방향에 따라 모양이 제각각이다. 어딘가 약간 부족해 보이는 모습이 너무 인간적이지 않은가. 

 

달항아리를 포함해 조선 백자에 대한 애정이 많은데, 백자 ‘챔피언스 리그’가 열린다는 말에 부리나케 리움미술관에 다녀왔다. 조선 사람들이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여기던 군자의 풍모가 백자에 담겨있다는 뜻으로 ‘군자지향’을 전시의 이름으로 삼았다. 달항아리 뿐만 아니라 청화백자, 철화·동화백자, 순백자까지 조선시대 500여 년간 만들어진 수많은 명품 백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특히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조선 백자 59점 중 31점이 출품됐는데, 일본에 있는 수준급 백자 34점을 비롯해 국내외 14개 박물관·미술관의 백자 183점을 모은 역대 최대 규모라는 점에 보기 전부터 마음이 설렜다. 

 

전시장은 1부 ‘절정, 조선백자’, 2부 ‘청화백자’, 3부 ‘철화-동화백자’, 4부 ‘순백자’로 모두 네 구역으로 나눠 기획되었다. 확실히 시선을 압도해 잔상이 오래 남는 건 1부였다. 외부 빛을 차단한 약 200평 규모의 공간에 백자 42점이 펼쳐져 있다. 암흑 속에서 조명과 흰 백자만 반짝이는 모습이 마치 은하를 연상시켜 한참을 바라봤다. 특히 전시장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면 1부에 있는 백자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계단이 있다. “고미술도 군집을 통해 화려함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이준광 리움미술관 책임연구원의 기획의도를 실감할 수 있었다.

 

조선은 순백자가 주류인 줄 알았는데 이번 전시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건 철화백자의 매력이다. 지방 백자는 거의 민속품이어서 그런지 자주 접하기 어려웠던 차에 좋은 기회였다. 왕실의 제약 없이 직접 만들어 소비했기 때문에 위엄이나 우아함보다는 개구쟁이같은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철화백자는 당시 조선의 어려움이 백자까지 영향을 미친 예다. 16-17세기 일본과 중국과의 전란으로 인해 값비싼 청화 안료의 수급이 어려워지자 철 안료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순백자의 검박한 매력과는 달리 철 안료는 특유의 강렬함과 독특한 색 변화를 자랑한다. ‘조선은 곤경에 처해도 소인같이 원망하거나 후회하지 않고 결국 군자와 같이 형통한 셈’이라는 설명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그간 철화백자는 어딘가 촌스럽고 투박하다고 여겨 ‘선비의 면모’가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겹고 소박한 정취를 담고 있는 철화백자 중 인상 깊었던 두 개를 소개한다. 

 

 

KakaoTalk_20230325_195807469.jpg

조선, 16세기. 높이 32.1cm, 입지름 12.6cm, 굽지름 15.0cm, 몸지름 27.1cm 개인소장 [사진 리움미술관]

 

 

백자 반철채 호다. 백자 본연의 순백색과 짙은 회갈색의 대비가 눈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전시장조명 때문에 직접 찍은 사진은 아랫부분이 너무 어둡게 나와 리움 미술관 사진으로 대체한다. 이렇게 몸체 절반을 가로로 나눠 아랫부분을 철화 안료로 칠한 예는 본 적 없어 더욱 생경했다. 실제로 이와 유사한 예는 거의 없으며 특별한 기록이 전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어떤 의도로 이런 과감한 장식을 했는지 밝혀진 바가 없다고 한다. 

 

백자의 외형에 마음이 끌렸지만 더 흥미를 갖게 된 부분은 이 도자가 경기도 광주 관요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대체로 광주 관요에서 제작된 왕실용 조선백자는 갖추어진 체계를 벗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요에서 만들었음에도 파격적인 외형을 자랑하는 모습이 괜히 반항하고 싶은 요즘 내 심정에 잘 맞는 듯하다. 

 

 

KakaoTalk_20230323_201111424.jpg

조선, 17세기. 높이 13.8cm, 입지름 10.9cm, 굽지름 8.0cm. 호림박물관

 

 

다음은 백자철화 국화문 호다. 처음에는 ‘이 정도면 나도 그리겠다’ 싶은 철화 장식에 눈길이 갔고, 이내 만든 사람의 손자국까지 보여 적잖이 당황했다. ‘완성도가 낮은 항아리도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들어오면 이내 작품으로 평가되는 건가’ 라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이 항아리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보니 인간적인 모습에 귀여운 마음이 들었다.

 

 

“본래 경기도 광주 관요에서 왕실용으로 만든 백자 항아리는 바른 비례를 이루며 둥근 것이 기본인데, 이 항아리는 처음 의도는 그러려던 것 같지만 밑동에서 마음을 고쳐 먹은 듯 각을 지며 급하게 마무리했습니다.”

 

 

뭔가 멋진 결과물을 내보겠다며 항상 시작은 호기롭지만 뒷심 부족으로 어찌어찌 겨우 마무리만 짓는 평소 내 모습과 겹쳐 보였다. 역시 사람 사는 건 시대를 불문하고 다 비슷한 데 있나 보다. 문양도 본래는 청화 안료를 사용해 서정적인 국화를 그리는 것이 정석인데, 이 작품은 철화 안료를 사용해 어린아이의 솜씨 같은 국화를 양쪽에 그려냈다. 고사리인 줄 알았는데 국화라니. 같이 간 친구는 야자수 같다고 했다. 이처럼 보는 이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는 자유분방함은 바로 특별한 제약이 없던 지방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탄생할 수 있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말해주는 듯한 넉넉한 마음 씀씀이가 느껴져 볼수록 정감이 가는 작품입니다.”

 

 

달항아리도 아주 매끈하게 둥근 것 보다는 어딘가 찌그러진 녀석에 정이 가는데 이 작품 또한 그렇다. 실수하면 그 흔적을 세상에서 없애버리려고 하는 나는 백자철화 국화문 호에 비하면 아직 군자의 면모가 부족하다. 실수도 ‘어쩌라고’ 즐겨버리는 조선인들의 시원시원함에 오늘도 대리만족을 해본다.

 

이외에도 그동안 관심 밖이었던 각병, 채색자기, 철화·동화백자 등의 매력을 느끼며 우리가 유독 달항아리에만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의문이 들었다. 얼마 전 제 9회 뱅크 아트페어에 다녀왔다. 현대미술 작품들 사이에서 달항아리를 테마로 한 작품들이 많이 보였다. 달항아리를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너무 이곳저곳에서 보이니 살짝 물렸다. 또 너무 아무데나 달항아리가 남용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 넉넉한 모습이 오히려 초라해 보였다.

 

 

KakaoTalk_20230326_084752253.jpg

 

 

특히 나를 포함해 주변 친구들 사이에서 유독 달항아리의 인기가 높다. 넉넉한 자연스러움과 흰빛에서 느껴지는 검박함이 조선을 대표하는 미감이라는 것도 이유겠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왜란과 호란을 겪은 후 조선은 가마가 파괴되고 도공들이 끌려가는 등 도자 산업이 많이 위축된 시대 상황과 연관이 있다. 국가적 차원에서 사치를 금하면서 장식과 무늬가 없는 순백자기를 주로 만들었는데, 나라가 안정되고 다시 호화로운 자기들을 만들 수 있을 때까지 겨우 100년 남짓 한 기간 동안만 만들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희소한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된다. 

 

조선의 국력이 회복되면서 중국과 일본에서 유행하는 자기의 영향을 받아 조선에서도 화려한 다채자기가 순백자기를 밀어내면서 달항아리도 점차 설 자리가 없어지고 말았다. 사실 조선시대에는 ‘달항아리’라고 부르지 않았다. 백항, 백자항아리 또는 사기항아리로 불렀다. 그러다 일제 강점기, 광복 직후에 일부 예술인과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백자항아리는 마치 둥근 달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는 새로운 미감을 부여함으로써 달항아리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 

 

실제로 인기의 시작은 백자대호가 달항아리로 불리기 시작했을 때부터다. 2000년대에 들어 런던 영국박물관은 한국과 협업해 한국실을 개관하면서 주요 유물로서 18세기 백자대호를 ‘Moon Jar(달항아리)’라는 이름으로 내놓았다. 이 낭만적인 이름은 대체 불가능한 ‘브랜드’가 되어 영국박물관의 인기 유물로 떠올랐고 알랭 드 보통 같은 작가를 비롯해 유럽 예술가들이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됐다. 

 

2005년에는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이 개관하면서 ‘백자 달항아리전’을 개최한 것도 달항아리의 인기에 불을 붙였다. 국립박물관이 전시 제목에 공식적으로 달항아리 명칭을 사용한 첫 번째인데 당시 문화재청장 유홍준은 전시 안내문에 ‘달항아리는 한국미의 극치’라고 썼다. 

 

 

KakaoTalk_20230326_084736473.jpg

 

 

2011년 문화재청은 드디어 국보, 보물로 지정된 백자대호 일곱 개의 공식명칭을 모두 ‘백자 달항아리’로 바꾸면서 달항아리는 한국의 미를 상징하는 대표주자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게 됐다. 달항아리는 자칫 묻혀버릴 뻔했던 우리의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미학을 창조했다는 점과 감성을 브랜드화 함으로써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지난 21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크리스티 경매에서 18세기 조선 달항아리가 456만 달러(약 60억원)에 낙찰됐다는 뉴스를 봤다. 이는 아쉽게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일본인이 소유하고 있던 자기다. 

 

무명의 백자는 ‘달항아리’라는 이름을 얻으면서 보름달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어디 달항아리 뿐이겠는가. 도자기 하나로도 사람들의 생각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알 수 있듯 우리가 무심히 보아 넘기거나 당연하다고 여기는 유물들이 많다.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스토리텔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브랜드화한다면 제2, 제3의 달항아리가 계속 만들어질 수 있다. 결국 우리가 할 일이지만.

 

 

 

신유빈 (1).jpg

 

 

[신유빈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9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