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막에서 바늘 찾아 [미술/전시]

페터 바이벨: 인지 행위로서의 예술
글 입력 2023.03.24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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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어떤 의미일까.


일반적인 동물에게 '인지'란, '먹을 수 있느냐'를 판단하기 위한 포착의 과정일 것이다. 더 나아가, 일반적인 동물에 비해 높은 지능을 지닌 동물에겐 '쓸만한가', 즉 도구로서 사용될 수 있는가를 결정짓기 위한 고민의 과정까지 포함하는 개념이 되겠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인지'란, 어디까지 포함하는 개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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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게, 내가 '사과'를 보았다고 가정해 보자. 일단 한 사물로서의 사과가 어디에 어떻게 위치해 있는지를 가장 먼저 눈으로 볼 것이다. 그다음에는, 색과 모양을 통해 그것이 '사과'임을 '인지'하겠다. 굳이 색과 모양이 아니더라도, 향이나 만져지는 표면의 느낌, 그 외의 요소들로도 그것이 사과임을 알 수 있겠다만, 복잡해지니 생략하고. 사과가 먹을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고, 나아가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 것인지까지 생각할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이 끝나고 나면? 배고픈 상태라면 사과를 기호에 따라 요리하여 먹을 수도 있고, 당장에 조각내어 그대로 먹을 수도 있겠다. 그다지 사과가 당기지 않는다면 그대로 둘 수도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사물을 바라본다.

 

이렇게만 본다면, 인간은 일반적 동물보다 조금 더 높은 지능을 가진 동물과 다를 것이 없다. 위의 과정을 간단히 요약하면, '사과는 먹을 수 있는 사물이며, 어떠한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다'까지 판단한 것이 '인지'의 종착지였기 때문이다. 비약일지도 모르나, 나의 관점에서 돌고래와 인간은 크게 다르지 않다. '쓸만한가'까지 알고 나면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머리를 모아 발전을 꾀할 줄 아는 영악함이 없었다면, 그 영악함을 개개인의 시점에서 '인지'하고 '사유'할 줄 몰랐다면, 우리도 돌고래나 코끼리와 같이 하나의 개체로서 수명이 다할 때까지 살고 자연의 상태로 돌아가는 식의 루틴을 지니는 동물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여러분은 당장 여러분이 속한 사회와, 그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현상들을 어떠한 방식으로 인지하나. 그리고 인지한 바를 어떻게 해석하고 수용하며, 나아가 발언하나.

 

 

오늘 톺아볼 '페터 바이벨: 인지 행위로서의 예술' 전시장의 작품 사이사이 허공에는 이 질문들이 둥둥 떠다닌다.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2023년 2월 3일부터 5월 14일까지 진행되는 [페터 바이벨: 인지 행위로서의 예술] 전은, 독일의 카를스루에 예술 미디어 센터(이하 ZKM)와 공동으로 기획되었다. 전시의 제목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ZKM의 예술 감독, 페터 바이벨이 일평생 남겨온 예술의 자취를 돌아보는 회고전으로, 미디어 아트에 있어 한 획을 그었다고도 볼 수 있는 그의 작품들을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다.


페터 바이벨은, 미디어 아트를 포함, 넓은 예술적 스펙트럼을 통해 사회 속 문제를 인식하는 그만의 시선을 선보이는 큐레이터다. 또한, 예술과 과학을 넘나들며 다학제 간 프로젝트들을 다수 공개하여 그 진가를 인정받은 예술가이자 학자이기도 하다. 이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선보이는 약 70점의 작품들은 그의 예술적, 학문적 정체성과 가치관들을 아이코닉 하게 드러낸다.


 

 

당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네.



'뭐지?'


전시장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한 생각이다.

 

내가 잘 찾아온 게 맞나?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미술관이나 갤러리 등에 가서 마주하는 '전시'는, 희고 넓은 공간에 걸린 여러 액자들, 구석구석 놓인 구조물들의 집합체, 즉 화이트 큐브식이지 않나. 눈높이에 맞춰 보기 쉽게 작품을 배치하고, 기획 의도나 제작 배경에 관한 간단한 텍스트 몇 줄로 벽을 장식하여 관람객들로 하여금 작가의 인사이트를 유추하게끔 하는 것이 요즘 현대 미술 전시 전반이 추구하는 지향점이라고 생각해 왔다. 아무리 독특하여 그 안을 예상치 못하는 전시라고 해도, 작품이 놓인 위치가 어디인지나 큐레이터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는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게끔 연출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근데, '페터 바이벨'전에서는 일상 공간 속, 그것도 생각지 못한 곳에 작품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독특한 사물들을 배치한다. 하여, 처음 보는 사람들이 당황할 수밖에 없는 현장을 만들어 놓는다. 전시 동선 따위도 없었다. 그 한가운데서 길을 잃어버린 나를 발견했을 땐 우스우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나름 전시장 많이 돌아다녀서 동선 찾기에 익숙해졌다고 자부했었는데, 그게 살짝 부끄러워질 정도로 방황했더랬다. 생각 없이 터덜터덜 돌아다니다가 작품이라고는 인지하지도 못했던 흐느끼는 돌을 마주한 이의 심정이 어땠을지 여러분은 유추할 수 있으신가. 당황스럽고, 경악스럽고,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크기변환]흐느끼는 돌, 국립현대미술관.jpg



이전 같았으면, 취향이 아니라며 관람을 포기하고 나왔겠지만 이상하게 더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때는 왜 그런 마음이 생겼는지 몰랐는데, 이제 와 돌아보니 전시 제목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인지 행위로서의 예술'이라지 않나. 바닥에 나뒹구는 돌의 근처 어디서 나는지 모를, 한구석의 희미한 신음 소리가 귀를 스쳤을 때, 그리고 그것이 '인지 행위로서의 예술'이라는 제목과 함께 머릿속을 때렸을 때, 소리의 근원을 찾고야 말겠다는 이상한 오기가 생겼던 것 같다. 그 '인지 행위'라는 것을 오늘 제대로 해내고야 말겠다는 다짐으로 작품을 째려보기 시작했더랬다.


그리고 조금은 실망스러운 기분을 가지고 전시장을 나섰던 것 같다. 결국 소리가 나오는 곳을 내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고 전시 마감 시간에 쫓겨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찝찝하진 않았다. 누군가의 흐느끼는 소리가 왜, 어디서 나오는 건지 꼭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 게 아니라는 감상이 들어서일까. 페터 바이벨이 어떤 의도로 '신음하는 돌'이라는 작품을 세상에 내어 놓았는지에 관해서는 더 공부해 봐야겠지만, 당장에 나에게 그 작품이 준 교훈은 이렇다. 삶을 살아가면서 어쩌면 당연하게 여길 사회의 흐름 속, 누군가의 흐느낌을 인식한다는 것. 나아가 그가 왜 흐느끼는지, 어디서 신음하는지 궁금해하는 것만으로도, 한 개체로서의 인간이 목표하는 '인지 행위'가 완성되는 길목에 서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지극히 당연시되는 사회의 관념이나 풍습 아래에 신음하고 있을 누군가의 목소리를 '인지'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 진화의 발판이 되는 것이 아닐까.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보면, 누군가 나중에 같은 의구심을 '발언'했을 때 함께 목소리를 더할 수 있지 않나. 또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이가 성장하여 '발언'할 수 있는 예리함과 독특함을 가지게 된다면 정말로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꿔볼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 아닐까.


작품에 담긴 페터 바이벨의 통찰을 아직은 다 이해할 수 없지만, 나름대로 이해한 날것의 감상도 그 자체로 여운을 남긴다. '신음하는 돌'을 통해, 난해하고 파괴적인 현대 미술이 사회에서 가지는 필요성을 다시 한번 '인지'하게 되는 계기를 얻은 것 같다.

 

 

 

모나리자 본 적 있으세요?


 

모나리자를 본 적 있으신가.

 

질문을 받은 대다수가 '본 적 있다'라고 대답할 듯싶은데, 그 외형에 관해 설명해달라고 한다면 아마 다들 아주 잘 설명해주지 않을까. 묘사하는 방식들도 아주 다양할 것이다. '눈썹 없음', '인자한 웃음' 등등.


여기서 한 번 더 물어본다. 모나리자가 '얼마만 한지' 아는가?

 

그럼 대다수가 대답을 머뭇거릴 것이라 생각한다. 정확한 크기를 모르기 때문에 말이다. 왜? '실제로', '육안으로'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설령, 실제로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크기를 안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인터넷이나 책, 신문이나 잡지 등 자료를 통해 알게 된 수치 상의 크기를 아는 것일 것이다. 정확히 '어, 그 그림 우리 집에 있는 가족사진 액자랑 크기가 비슷해.' 라든가, '내가 지금 들고 있는 가방만 해'라고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크기변환]비례축소, 기준 시스템의 역설_매체.jpg

 

 

이 사진은 1974년에 제작된 '비례 축소: 기준 시스템의 역설 (매체)'라는 작품의 사진이다. 남자 한 명과 각각 크기가 다른 나무 두 그루를 담고 있는 사진들을 걸어 놓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자세히 보자면 위 줄엔 남자를 따로 둔 사진, 큰 나무만 담은 사진, 작은 나무 하나만 찍은 사진을 각각 두었다. 또, 큰 나무와 남자를 함께, 작은 나무와 남자를 함께 담은 사진을 아래 줄에 배치했음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나무의 크기에 따라 인지되는 남자의 크기가 달라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 유추할 수 있겠다.


사진에 담는 개체가 하나일 때, 그것의 크기에 연연하지 않고 바라보기 때문에 실재하는 해당 개체의 존재감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위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다. 나아가 생각해 보면, 우리가 매체를 통해 바라보는 상황, 사물, 또는 사람이 실제로 어떤 아우라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앞에서 언급했던 모나리자와 같이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루브르까지 굳이 직접 가지 않고도 모나리자가 가진 의미와 그 그림이 만들어진 배경, 그림 속 요소들에 부여된 의도들을 매체를 통해 접할 수 있다. 따라서 '모나리자'라는 작품이 얼마만큼 중요한지 '인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뿐이다. 직접 보지 않고는 그 그림이 지닌 아우라와 존재감을 느끼거나, 작품으로서 지니는 무게가 어떠한지 파악할 수 없다.


또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매체가 가진 신뢰도의 위험성인 것 같다. 우리는 사진으로, 잘 그린 그림으로, 누군가가 써 내린 글로, 이제는 스마트폰과 컴퓨터로도 지구 곳곳을 둘러볼 수 있다. 이 말은, 매체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는 뜻이다. 직접 확인할 수 없는 곳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물론, 내가 지금 속해 있는 세상의 뉴스를 보더라도 매체를 한 번 거쳐 듣게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매체 뒤에 숨은 이가 보고 느낀 대로 전한 이야기에는 그의 의견과 시야가 반영되기 마련이라, 결코 깨끗한 본질을 마주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개를 통해서라도 우리는 그 이야기를 접하길 원한다. 이는, 기술이 발전하기 전부터 '소문'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던 역설이나, 현대에 이르러 더욱 강력한 힘을 얻어 이제는 선동이라는 복잡한 행위도 어렵지 않게 만드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러한 부분을 페터 바이벨이 꼬집고자 한 게 아닌가,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페터 바이벨은 적지 않은 세월동안 수많은 학문과 예술 작품, 사회 현상들을 보며 위와 같은 역설을 목격했고, 다섯 장의 사진을 통해 날카롭게 발언한 것이 아닐까. 우리가 '비례 축소'라는 작품을 접하고, 이 역설을 극복하는 사유의 힘을 갖길 바라며.




사막에서 바늘 찾아



'페터 바이벨: 인지 행위로서의 예술' 전의 전반에서 선보이는 전위적인 예술 작품들은, 관람객들이 평소 신경쓰지 않고 살았던 것들을 한 번 더 돌아보게 만드는 파격을 지녔다. 여기서 파격적이라 함은, 과히 자극적이란 뜻은 아니다. 그저, 아무렇지 않게 지나칠 수는 없을 정도로만 뾰족하고, 반짝인다는 의미다. 처음 접했을 때는 일상 속의 사물임에도 색다르게 다가오는 오브제들이 조금 당황스러울 수 있으나, 보다 보면 깊게 생각하게 되고, 외려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인지'라는 행위는 어쩌면, 일반인들에게는 그냥 '존재를 알기'정도의 무게로 느껴질 수 있지만, 현대의 예술가에게는 사뭇 다른 가치를 가질 수 있겠다. 그들은 '당연한' 시스템 사이의 '부당한' 모서리를 찾아내는 눈을 지니는 동시에, '당연한' 면을 뚫고 나오는, 작지만 반짝이는 바늘을 만드는 발언자이기 때문이다. '현대 미술'의 난해함과 자극성을 마냥 불필요한 사치로 느꼈던 이들에게 그 개연성을 알려주는 매개가 바로 이 '페터 바이벨'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막 속에서 오아시스만을 찾아 정처 없이 걸으며, 그저 그 곳이 주는 뜨거움과 모래의 까끌거림만을 알고 살았던 현대인들에게 따끔한 바늘과도 같은 일침을 가하는 예술. 그 목적지를 위해 조금 더 반짝이는 바늘을 찾아 헤매는 예술가들에 대한 존경심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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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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