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부정당하는 삶을 향한 몸부림, 뮤지컬 '실비아, 살다'

글 입력 2023.03.17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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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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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완전한 현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시간의 물리적 단위를 미세하게 쪼개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갈 뿐이지 단 한 번도 멈춰서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는 가장 가까운 과거와 가장 가까운 미래만 존재할 뿐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로 밀려나 버릴 지금 이 순간을 최대한 붙잡아 곧 다가올 미래를 준비한다.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것은 과거다. 그렇다면 역으로 미래가 과거를 바꿀 수 있을까?


논리 자체가 어긋난 것처럼 들리지만 20세기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실비아 플라스의 삶을 다룬 뮤지컬 ‘실비아, 살다’에서는 그렇지 않다. 실비아 플라스는 여성으로서의 삶을 잔혹하고도 섬세하게 묘사했던 20세기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로, 그 작품성을 뒤늦게 인정받아 유일하게 사후에 퓰리처상을 수여받은 인물이다. 인생을 자살로 끝마친 그녀의 생애는 역사 속에 소멸됐지만, ‘실비아, 살다’는 그 삶을 다시금 끄집어내려는 시도로 실비아가 필명으로 사용했던 ‘빅토리아 루카스’를 실비아의 미래를 상징하는 실제 인물로 등장시킨다.


그녀는 무대 위에서 실비아가 캠브릿지에서 만난 동료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실비아는 비평가 댄 포스터에게 자신의 시에 대한 객관적인 의견을 묻기 위해  입학생 명단에서 본 빅토리아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빅토리아의 정체에 대한 일종의 복선이다. 이때 포스터는 실비아를 두고 죽은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가 명확한 여류시인에 불과하다는 혹평을 늘어놓는다.

 

뒤에서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빅토리아는 실비아가 비평가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자 그녀와 손을 잡고 포스터 앞에 맞선다. 이 사건을 계기로 빅토리아는 실비아의 가까운 친구가 된다. 동등한 친구 관계라기에는 실비아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든든한 조력자에 가깝지만 말이다. 빅토리아에 대해서는 아무런 배경 설명도 등장하지 않지만, 그녀는 실비아의 삶에서 결정적인 순간이 닥쳐오면 어느샌가 실비아의 곁에 등장해 그녀를 지켜본다.


캠브릿지에서 만난 동료 시인 테드 휴즈와의 첫만남도 마찬가지다. 테드는 실비아에게 어릴 적 자신의 글에 대해 조언해줬던 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 서로의 존재에 처음부터 이끌린 두 사람이 사랑을 속삭이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출 때, 빅토리아는 무대 뒷편에 서서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볼 뿐이다. 그들에게 닥칠 미래를 예견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실비아와 테드는 시인 부부가 되어 행복한 신혼을 시작하는 듯 했지만 그 삶에는 이내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실비아는 아내로서 짊어져야 했던 출산과 양육의 의무, 그리고 가사노동의 책임으로부터 시인의 삶을 지켜내고자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남편, 나아가 남성 시인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고자 하는 실비아의 노력을 주변에서는 자연스럽게 깎아내린다. “뛰어난 실력이네요. 집안일 하면서도 틈틈히 시를 써 보세요.” “테드 휴즈가 당신에게 ‘좋은 영감이 되어준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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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는 아내로서의 삶과 작가로서의 삶을 동시에 붙들고자 한다. 그녀는 두 아이를 책임져야 하고, 또 사랑하는 남편의 곁에 있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벗어던지지 못한다. 어릴 적 남편을 떠나보낸 후로 두 자녀를 홀로 키우면서 한평생을 희생하며 살았던 어머니를 향한 속죄의식 때문이다. 엄마를 닮아야 하지만 엄마처럼은 살고 싶지 않다는 자기모순적인 생각이 실비아의 내면을 어지럽힌다. 시를 향한 본능적 열망은 그녀를 가둔 환경 안에서는 날개를 펴지 못한다. 그녀는 그런 자신의 삶을 투영해 유리 종에 갇힌 여자 에스더를 주인공으로 소설 ‘벨 자(Bell Jar)’을 쓰기 시작한다.


실비아가 혼란을 겪으며 몸부림치는 상황에서도 빅토리아는 어김없이 등장해 그녀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일깨운다. “내가 이상한 건가?” 스스로를 검열하고 자책하는 실비아에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빅토리아는 실비아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는 순간마다 찾아와 그녀의 지지대가 되어 준다. 그러나 빅토리아의 등장은 곧 실비아가 위기에 처하는 순간이기에, 그녀가 무대에 오르는 순간이 늘 유쾌하지만은 않다. 끝끝내 빅토리아가 실비아에게 가장 크게 개입하는 순간들이 들이닥치고야 만다.


실비아가 집에서 테드와 다투던 중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테드가 그 전화를 받으려 하자, 어느새 집안으로 들어선 빅토리아는 실비아에게 다급히 그 전화를 네가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빅토리아의 존재가 실비아의 눈에만 보인다는 사실, 다시 말해 빅토리아가 그저 대학 동료가 아닌 특별한 어떤 존재라는 사실이 관객 앞에서 드러나는 순간이다. 빅토리아는 여기엔 어떻게 들어왔냐는 실비아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책을 집어던져 테드의 시선을 끌고 실비아를 떠밀어 전화를 받게 한다. 


그 전화로 실비아는 테드가 외도를 저지르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남편의 배신에 분개한 실비아는 별거를 결정하고 두 아이를 기르며 홀로 살아간다. 그녀의 어머니가 처했던 상황과 오버랩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실비아는 자신의 어머니와는 다른 선택을 한다. 고달픈 삶 속에서도 시 쓰기를 손에서 놓지 않고, 테드를 통해 친분이 있었던 비평가 알바레즈에게 계속해서 시를 보여준다. 알바레즈는 휘몰아치는 감정이 그대로 녹아든 그녀의 시를 두고 ‘맹렬한 야수’와도 같았다고 평한다. 


이 시기 그녀는 자살을 시도한다. 사실 그녀에게는 두 번째였다. 9살이었을 때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떠나려 했던 첫 번째 시도에 뒤이어, 20대의 실비아는 자신의 삶을 비관하며 교통사고를 낸다. 그러나 그녀는 이번에도 실패한다. 실비아는 그 실패를 이야기하면서 ‘돌아온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는 자살시도가 그녀에게는 일반적이지 않은 뭔가 다른 의미를 지녔음을 보여준다. 


그녀에게는 실제로 자살시도 이후 발표하는 작품마다 성공을 거두는 징크스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그녀의 자살시도는 삶의 목표를 되찾으려는 일종의 터닝 포인트에 가까웠다. 그녀의 이 테스트는 기차여행 도중의 ‘비상정차’에 비유된다. 그녀의 삶은 종착지까지 가는 기차에서도 거듭 비상정차를 시도하는 여정을 닮았다. 이런 실비아의 비극을 표현하는 넘버 ‘10년에 한 번씩’은 죽음의 위기에 직면해야만 삶의 이유를 발견할 수 있는 그녀의 절절한 외침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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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상황은 30대에 접어들자 점점 수렁에 빠져든다. 형편이 어려워지는 것도 모자라 테드는 다시 한 번 실비아와 두 아이들을 내쳐버린다. 실비아가 자신이 쓴 시로 마음을 돌려보려는 그를 붙잡자, 단 한 번도 당신의 글을 좋아했던 적이 없다며 비수를 꽂기까지 한다. 실비아는 분노와 광기가 뒤섞인 감정을 종이 위에 쏟아낸다. 머릿속의 문장들과 눈앞의 종이에 완전히 몰두한 채 타자기를 미친듯이 두드리는 실비아의 모습은 타자기 소리에 이루어지는 퍼포머들의 춤과 어우러져 글과 한 몸이 된 그녀의 상태를 시각화한다. 


그녀는 세 번째 자살을 치밀하게 준비하기 시작한다. 아이들이 먹을 빵을 만들어 놓고, 테이프로 아이들 방의 문틈을 막은 뒤 가스를 켠 오븐에 머리를 넣으려는 계획을 세운다. 다음날 방문할 가정부를 맞이하지 못하게 될까봐 아래층에 사는 할머니가 몇 시에 일어나는지까지도 미리 알아 둔다. 하지만 역시 빅토리아가 나타나 이번에는 실비아가 실패할 것임을 알린다. 빅토리아가 실비아의 앞날을 모두 알고 있음을, 즉 그녀가 실비아의 미래임을 직시하게 되는 순간이다.


자살 시도가 실패한다는 것은 실비아에게는 스스로 생명을 채 끊어내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삶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영원히 잠드는 최후를 뜻한다. 빅토리아는 실비아의 내일을, 아랫집 할머니가 가정부가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그녀가 가스에 중독되어 죽음을 맞이하게 될 다음날을 알고 있다. 실비아는 마침내 세 번째 자살 시도를 그만둔다. 그리고 극 초반에 등장한 그녀의 글 속 문장처럼 좁고 어두운 계단 꼭대기에서 빛을 향해 나아가기로 한다.

 

 

"우린 모두 술 탄 물을 마신 거야. 

술 마시면 술 취하지. 어쩌겠어? 

술 취하면 진상 부려. 당연한걸?"

'실비아, 살다 - 술 탄 물' 中

 

 

빅토리아는 스스로를 의심하는 실비아에게 이렇게 노래한다. 실비아는 스스로 술병을 택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실비아의 물잔에 따른 술 때문에, 술이 섞인 물을 술인 줄도 모르고 마셨을 뿐이다. 자각하지 못한 채 계속 술 탄 물을 마시면 끝내 중독될 수밖에 없다.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른 채 자신의 주변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그저 현재의 상태에 잠식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빅토리아는 늘 술잔을 지니고 다닌다. 이는 미래의 실비아가 자신이 겪는 혼란이 스스로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됨을 암시한다. 타고난 야망과 능력을 타고나 세상에서 눈을 뜬 이상 재능을 꽃피우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렇기에 동료 남성 작가에게 뒤처질 것 없는, 나아가 그들을 뛰어넘는 재능을 지녔는데도 평생토록 그들과 동일한 자리에 설 수 없음을 알았을 때 실비아가 느끼는 감정은 분노여야 마땅했다. 

 

그러나 실비아는 그러한 감정마저도 부정당하고 무력감에 잡아먹힌 삶을 살아간다. 그래서 그녀가 삶의 당위성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죽음의 끝자락에서 자신의 생명력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자살로부터 살아남아 삶으로 '돌아오는' 순간이 실비아에게는 자신의 호흡을 자각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실비아는 빅토리아, 즉 자신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자기 자신을 믿고 굳건히 일어선다. 

 

뮤지컬 '실비아, 살다'는 유리 종을 깨뜨리고 세상에 나설 실비아의 앞날을 기대하게 한다. 그러나 빅토리아의 존재 그리고 죽음을 택하지 않는 실비아의 결말은 픽션이다. 극중의 유일한 희망은 오늘날에 더해진 상상일 뿐, 오히려 그 나머지에 해당하는 비극들이 실비아 플라스의 실화를 담고 있다. 이 사실이 공연의 결말을 그저 해피엔딩으로 바라볼 수 없는 이유다. 우리가 실비아를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은 그녀에게 미래를 미리 알려주는 것뿐이다. 지극히 문학적인 상상력 없이는 그녀를 구해낼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만든다. 1932년에 태어났던 실비아가 지금도 살아있다면 그녀는 어떤 글을 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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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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