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서서히 스며드는, 영화 '6번 칸' [영화]

낯선 여행,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로맨스
글 입력 2023.03.15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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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VIEW ***

제 74회 칸 영화제 대상 수상작 <6번 칸>

 

 

6번 칸_메인 포스터.jpg

 

 

고대 암각화를 보러 가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핀란드 유학생 라우라. 무르만스크 행 기차 '6번 칸'에서 만난 낯설고 무례한 남자, 료하.

 

거리를 두려는 여자와 가까워지려는 남자. 목적지에 다다를수록 두 사람의 관계는 미묘한 변화를 겪게 되고... 이 여행의 끝에 불완전한 그들은 어떻게 될까?

 

 

*

영화의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리를 두려는 여자,

 

러시아에서 유학을 하고 있는 핀란드 출신 라우라는 다소 조심스러운 성격이다. 시끌벅적한 파티 한복판보다는 조용한 방 한켠에서 그림을 들여다보는게 더 마음이 편하다. 원래는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하는 여행이었지만 일정이 틀어져 라우라는 혼자 고대 암각화를 보러 무르만스크 행 열차에 올랐다.

 

라우라의 좌석은 '6번 칸'. 여행의 설렘보다도 그를 먼저 맞이한 것은 거나하게 취해버린 같은 칸의 승객이었다. 행동을 거칠게 하면서 초면에 무례한 질문을 하는 그의 목적지도 하필 무르만스크란다. 앞으로 남은 여정이 막막하게만 느껴졌지만 목적지에 다다를수록 맞은편의 승객이 '료하'라는 사람으로 다가오게 된다.

 

가까워지려는 남자

 

라우라에게 남자의 첫인상은 취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뿐이던가 암각화를 보러간다는 자신을 비아냥대고 조금만 거슬리는게 있으면 바로 욕설을 내뱉기도 한다. 마주하지 않는게 상책이라고 생각하던 라우라와 그의 관계가 조금 달라지는 시점이 있었으니, 바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에서의 정차였다.

 

공중전화로 사랑하는 애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라우라가 손꼽아 기다리던 시간이었지만 통화는 순식간에 마무리되었다. 건조하고 무심한 애인의 목소리와 함께. 허탈한 라우라에게 같은 칸 남자가 근처 자신의 집에 가서 한 잔 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건넨다.

 

어디서 빌린 듯한 차, 꼬불꼬불한 러시아 시골의 골목길을 지나 등장한 것은 독한 보드카와 허름하지만 아늑한 집, 그리고 단호하지만 따뜻한 러시아 할머니의 환대였다. 밤새 잔을 기울이고 지독한 숙취와 함께 눈을 떠 아슬아슬하게 열차에 다시 오르면서 라우라는 6번 칸의 남자를 자연스럽게  '료하'로 부른다.

 

 

08.jpg

 

 

무르만스크 도착을 하루 앞두고 료하와 라우라는 식당칸에서 둘만을 위한 만찬을 갖기로 한다. 긴 여정에 마침표를 찍기 직전의 순간, 라우라는 언젠가 료하가 잠든 순간을 그렸던 그림을 건네며 앞으로의 연락을 조심스럽게 기대한다.

 

하지만 료하는 매몰차게 이를 거절하고 여행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애매하게 끝나버린다. 누군가에게는 여정의 끝이 시작일수도 있지만 어떤 이에게 여정의 끝은 끝일 뿐이었던 것이다.

 

무르만스크에 도착해서도 라우라의 일정은 쉽지 않았다. 알고보니 눈보라 때문에 암각화는 겨울에 볼 수 없었고, 숙소 프런트의 직원들이 무미건조하게 추천해준 투어 프로그램을 듣다가 라우라는 다시 료하와 재회하게 된다. 특별한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암각화를 볼 수 없다는 라우라의 말에 료하는 차를 빌리고, 배를 빌린다.

 

마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라우라를 집으로 데려갔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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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센 눈보라와 성난 파도를 뚫고 온 암각화는 생각보다 시시했다. 심지어 영화에서는 암각화가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다. 의아한 표정으로 이게 전부냐고 묻는 료하의 질문에 라우라는 이게 다라고 답한다.

 

어쩌면 그 대답은 라우라 스스로에게 한 말일수도 있다. 고고학에서 의미있는 사료를 감상하겠다는 포부와 멀어져 가는 연인과의 관계 회복에 대한 기대를 모두 담았던 이번 여행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다예요."라고 말하며 설원에서 료하와 뛰노는 라우라의 모습은 그 어느때보다 후련해보였다.

 

암각화를 보고 돌아온 료하와 라우라는 별다른 작별인사도, 다음 만남을 위한 기약도 없이 헤어진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라우라에게 그림 한 장이 남았다. 식당칸에서 료하에게 자신을 그려달라고 했던 요청이 완성되어 돌아온 것이다. 어설프지만 최선을 담은 그림, 료하의 마음이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6번 칸'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로맨스 영화의 장면들은 없다. 기차 칸에서의 운명적인 만남, 마침 잘 통하는 취향, 그로인해 싹 트는 사랑과 영원을 위한 약속은 볼 수 없다. 하지만 좁은 기차에서 서로 다른 타인이 오랜 시간 함께할 때 느껴지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는 제대로 느낄 수 있다. 현실적이면서도 섬세한 두 주인공의 연기가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마치 투박한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탑승한 듯한 자연스러운 카메라 무빙과 러시아의 설원, 90년대를 상징하는 캠코더, 워크맨, 공중 전화와 같은 소품들로 아날로그 감성까지 느낄 수 있으니 매력적이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볼거리를 감상하고 싶은 관객들에게는 '6번 칸'을 추천하고 싶다.

 

 

[정선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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