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표트르 안데르제프스키 리사이틀

표트르 안데르제프스키와의 만남과 그의 연주
글 입력 2023.03.03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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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한국에서의 평균율 2권 연주 이후 약 15개월 만에 한국을 다시 찾은 표트르 안데르제프스키에게 진행자가 묻는다. 당신은 작년 2월부터 11월까지 약 9개월 정도의 안식 기간을 가졌다. 그 기간에 무엇을 했는가? 그는 공연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어서 너무 좋았다며, 좋아하는 사람들을 불러서 요리를 해 먹기도 하고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을 즐겨 읽었다고 답한다.

 

이어서 그는 어렸을 때 피아노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부모님이 꼭 남매가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하길 바라셨는데 누나가 바이올린을 선점하는 바람에 자신이 피아노를 하게 된 것 뿐이라며, 피아노 연습을 하기가 싫어 농땡이를 부리다가 아버지가 오는 소리가 들리면 얼른 피아노 앞에 앉아 연습하는 시늉을 하곤 했다고 말한다. 보통 피아니스트가 할 것으로 예상하기에는 피아노를 치는 일에 대해 조금은 냉소적으로 느껴지는 대답이다.

 

진행자가 그렇다면 언제 피아니스트가 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인가?’ 라고 묻는데, 이에 대한 대답이 또 걸작이다.

 

마음 먹은 적은 없다. 지금도 그냥 연주를 하고 싶어서 연주를 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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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안데르제프스키의 리사이틀 하루 전 날 2월 27일 압구정의 음반 가게 풍월당 5층 구름채에서 <피아니스트 표트르 안데르제프스키와의 만남>이 진행되었다. 피아니스트에게 음악에 대한 것이든 일상에 대한 것이든 이것 저것 물어보는 일종의 토크 콘서트였고 운 좋게 추첨에 뽑혀서 가게 되었다.

 

상당히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그의 음악적 견해에 대해 들을 수 있었는데, 할 말이 생각 날 때마다 잠시 주제에서 이탈하는 한이 있더라도 즉흥적으로 말을 덧붙이는 방식과 두 다리를 쭉 뻗고 의자에 편안하게 기댄 채로 사람들의 얼굴 하나 하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모습 등을 통해 기본적으로 상당히 여유롭고 자유로운 품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행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해 보였는데, 한국에서의 표기와는 조금 차이가 있어 [피오트르 안데르셰프스키]에 가까웠다.

 

직접 피아노를 쳐주며 파르티타 6번 sarabande에 대한 과거의 해석과 현재의 해석을 살짝 비교해주기도 하고, 그가 음악에 접근하는 방식에 대한 인상적인 문답이 오고 갔다. 상기한 피아니스트가 될 결심에 대한 이야기 외에 재미있었던 대답은 어떤 작품을 연구하다 보면, 그 곡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시기가 어느 때가 되었든 결국에는 작곡가를 ‘만나야’ 한다는 말이었다. 평소에 안데르제프스키가 엄청난 실력에 비해(테크닉 면에 있어서 그는 현존 최고 중에 하나다.) 너무나 적은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어서 상당히 아쉬웠고 의문도 컸는데, ‘작곡가를 만나야 한다’는 표현을 들으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오랜 기간 연구와 반복 끝에 작품과 작품자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뒷받침으로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었다고 느끼는 음악 만을 무대에 올리는 것 아닐까? 그는 심지어 프로그램이 정해진 채로 초청이 오면 잘 응하지 않고 대게 자기가 치고 싶은 곡을 스스로 결정해서 친다고 한다.

 

내가 제일 많이 가지고 있는 그의 음반들도 바흐를 연주한 음반들이고 바흐를 녹음할 때마다 상을 휩쓰는 만큼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작곡가는 누구냐는 질문에 안데르제프스키가 베토벤이라고 답한 것은 의외였다. 태어나서 들은 첫 번째 협주곡이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이라고 하며 베토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라 단언하셨다. 다음 날의 베토벤 연주에 대한 기대가 배가 되기도 하고, 그런 것 치고는 베토벤 녹음을 그리 많이는 안 하셨는데 이제 곧 하시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직까지 나의 베스트는 그가 연주하는 바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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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들 한분 한분에게 굉장히 친절하시다

 

 

연주자가 자연인으로서 어떤 사람인지를 유추해보면서 동시에 그의 연주 방향을 짐작해 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따라서 전날에 즉흥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은 만큼, 나는 그 다음날인 28일, 공연장으로 향하면서 그 날 저녁의 연주에 있어서도 어떤 의외의 면모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공연 프로그램의 상당수가 이전에 녹음해서 음반으로 나와 있는 곡들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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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바흐 파르티타 6번 BWV 830

시마노프스키 마주르카 Op. 50 중 3, 7, 5, 4번

베베른 변주곡 Op. 27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1번 Op. 110


예상과는 정반대로, 그의 연주는 꽉 짜인 틀 안에서 기존 음반의 해석을 같은 방향으로 더 강화하는 쪽으로 발달했다. 전반적으로 과거 녹음과 해석의 방향이 대동소이 했던 것이다. 그런데 ‘소이’한 부분에서 과거의 녹음에서 내가 살짝 아쉽다고 생각한 지점들이 훨씬 마음에 들게 바뀌어서 너무나도 만족스러웠다. 거기서 느꼈다. 아, 이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어떤 작품의 이상적인 구조나 형태가 고정되어 있고 그 형태를 세월에 걸쳐 더욱 완벽하게 가다듬어 가는 스타일이구나. 예를 들어 안드라스 쉬프같은 대가는 젊었을 때 Decca에서 녹음한 평균율과 노년에 ECM에서 녹음한 평균율의 해석이 다르다. 그러나 안데르제프스키의 경우는 같은 곡을 두 번 녹음할 일이 없어 보였다. 음반과는 완전히 다른 해석을 바란 사람들은 조금 아쉬웠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뿌리를 깊게 내리고 가지가 굵어지는 단단한 나무처럼 일종의 장인 정신이 느껴져서 또 다른 의미로 놀라웠다.

 

롯데에서 하는 피아노 리사이틀을 갈 때마다 특유의 심한 울림 탓에 정부 차원에서 롯데콘서트홀에서는 피아노 연주를 하지 못하게 하는 법안을 통과시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그러나 안데르제프스키 발표회 만큼 홀 사운드에 만족했던 날은 없는 것 같다. 오히려 그가 다음 내한 때 또 롯데콘서트홀에서 했으면 좋겠다고까지 생각한 것이, 유독 안데르제프스키의 터치와 롯데홀의 상성이 너무 잘 맞았다. 예를 들어 안드라스 쉬프의 경우에는 특유의 날아갈 것 같이 가볍고 촉촉한 터치 때문에, 크리스티안 짐머만의 경우에는 적지 않은 페달 사용량 때문에 뒤에서 들으면 롯데홀의 울림에 의해 살짝 뭉개지는 듯한 느낌이 있었는데, 안데르제프스키의 경우는 롯데의 어쿠스틱이 그의 터치와 만나 높은 층고까지 상승하는 성당의 음향을 만들어 냈다. 객석이 그리 많이 차지 않은 탓에 평소보다 울림이 더 크면 컸지 작지는 않았을 조건에서 그 정도로 홀을 뚫어버린 강력한 타건이 너무나 놀라웠다.

 

인상적이었던 몇 부분을 적어 보자면,


그의 파르티타 6번 음반을 들을 때마다 첫 악장 Toccata에서 푸가가 나오기 전의 서주 부분이 내 취향에도, 다른 연주자들과 비교해보아도 탬포가 급하고 루바토가 너무 급진적이라 아쉬움을 느끼곤 했다. 그 속도감이 푸가로 들어간 후에는 항상 최고의 긴장감을 유지하며 앞으로 쭉쭉 나아갔기에 좋았지만 앞부분은 들을 때마다 조금 어색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 공연에서는 기본적인 템포는 비슷했지만 내가 음반으로 들을 때마다 급진적으로 음이 꺾인다고 느끼던 부분(특히 악보상 6, 7번째 마디)이 훨씬 자연스럽게 처리되어 듣기가 편안했다. 해석이 전반적으로 자연스러워지고 더욱더 설득력을 갖춘 것 같았다.

 

그의 파르티타 6번에서 내가 좋아하는 악장 중 하나는 세 번째 악장 Courante인데, 거의 모든 연주자가 종결부를 장대하게 연주해서 강하게 마침표를 찍는 듯한 느낌으로 연주하는 반면(많은 연주자가 마지막 화음을 분산하여 아르페지오로 친다.), 그는 종결부에서 속도를 떨어트려 잠시 멈춘 다음 마지막 화음을 굉장히 새침하면서도 무심한 느낌으로 (그는 이 화음을 아르페지오로 처리하지 않고 한번에 친다.)슬쩍 올려 둔다. 이 느낌이 너무 좋아서 그의 음반을 여러 번 듣게 되었는데 실황으로 접하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마지막 악장 Gigue를 듣고 있으니 원래 프로그램이었던 프랑스풍 서곡 BWV 831이 파르티타 6번 BWV 830으로 바뀌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이 악장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르티타 6번의 Gigue는 5분을 넘어가는 복잡한 푸가다. 그날의 마지막 곡인 베토벤 소나타 31번의 마지막 악장에도 역시 장대한 푸가가 있다. 푸가라는 기법이 그날의 주제로서 프로그램 전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다. 6번 전체에서 가장 페달을 적게 쓰며 강하고 빠른 타건으로 소리가 워낙 귀에 다이렉트로 꽂혔던지라, 바흐의 파르티타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Gigue는 파르티타 1번의 Gigue인데도 불구하고 그날은 6번의 것이 가장 좋아졌다.


이어진 시마노프스키와 베베른은 여전히 나에게 생소하게 남아있는 작곡가들이다. 그래도 요즘에 짐머만의 시마노프스키 음반을 즐겨 들은 덕에 베베른보다는 시마노프스키의 작품이 훨씬 친숙해져 듣는 재미가 꽤 있었다. 처음 들을 때는 좀 더 전통적인 춤곡에 가까운 쇼팽의 마주르카와 많이 달라 당황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는 말인가? 곡에 대해 나름 조사도 해보고 반복해서 듣다 보니 20세기의 파편화된 슬픔을 민요의 영향 아래 전통적인 춤곡 양식에 담아내고 있다는 느낌이다. 잘 모르는 곡이라 아직은 이런 느낌적인 느낌이야 식의 인상 비평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 작품과 곡에 대한 좋고 싫음을 떠나 피아노의 소리 자체만을 두고 보면 시마노프스키의 마주르카와 앙코르였던 평균율 2권의 12번이 가장 좋았다. 시마노프스키는 직접적으로 오는 음향이 선명해 과한 울림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고 평균율은 반대로 울림을 적극 활용해 반사 음향의 거룩한 성당 분위기를 만들었다.


베베른의 변주곡은 그 유명한 쇤베르크와 그의 패거리답게 12음 기법을 사용한 무조음악이다. 아직도 이 음악을 감상할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이런 음악은 공연장에서 아무리 들어도 어떤 형태가 잡히지 않아서 음향적 효과에 집중하는 편인데 시마노프스키에 이어 연주자가 어떤 ‘소리’를 만들어낼까에 귀를 기울이니 무난히 즐길 수 있었다.

 

베베른의 변주곡이 끝나자마자 기립 없이 바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1번이 이어졌다. 연주자의 독보적인 해석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은 역시 31번의 메인 요리라 할 수 있는 3악장이었다. 3악장은 <레치타티보 – 탄식의 노래(Arioso dolente) - 첫 번째 푸가 탄식의 노래의 회귀(L’istesso tempo di Arioso) - 두 번째 푸가> 의 구성을 따르고 있다(참고로 이 악장의 네 번째 파트 L’istesso tempo di Arioso에서는 앞서 나왔던 탄식의 노래인 아리오소 도렌테(Arioso dolente)의 멜로디가 반복되고, 두 번째 푸가의 주제는 첫 번째 푸가의 상행하는 주제를 거울로 비춘 것처럼 뒤집어 반진행시킨 것이다.).


아리오소와 푸가가 서로 번갈아 나오기에 이 곡은 그 둘 간의 관계설정이 중요하다. 안데르제프스키의 해석 중에 가장 눈에 띈 것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3악장 도입부를 지나 나오는 탄식의 노래(Arioso dolente)와 탄식의 노래의 회귀 부분을 둘 다 매우 느리고 진중하게 치는 것. 두 번째는 두 번의 푸가 모두 주제를 처음 제시하는 부분을 아주 작고 여리게 표현한 뒤 푸가가 진행되며 점차 스케일을 키워 나가다가 절정에 이르면 베이스에서 푸가의 주제를 왼손 옥타브로 아주 강하게 두드려 대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느리고 감정적으로 진한 아리오소와 장대한 푸가의 극명한 대비를 유도하고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 식의 푸가 진행을 통해 낙폭이 크고 드라마틱한 해석을 시도했던 것 같다. 요즘 자주 듣는 브렌델 연주가 가끔 심심해질 때면 그 대안으로 안데르제프스키의 연주를 들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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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전곡 녹음을 하지 않아 항상 일부를 발췌했던 선집만을 냈던 그가 과연 언젠가 골드베르크 변주곡 전곡 녹음을 할지 매우 궁금했기에 싸인을 받으며 그에게 혹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녹음할 계획은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지난 9개월간 안식 기간을 가지며 그 고민도 해보았지만 아직은 그 곡을 대하는 데에 있어 자기가 가진 문제들(have problems라고 표현하심)이 있고 아주 어려운 곡이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언젠가는 할 수도 있다고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를 지어 보이셨다. 그것을 아주 마일드한 약속 정도로 받아들이고, 언젠가 그의 골드베르크를 들을 수 있기를 소망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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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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