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부지런한 봄이 온다

글 입력 2023.03.01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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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 당신] 부지런한 봄이 온다


 

낯선 사람을 만나러 서울에 간다. 약속을 잡는다. 썬데이 애프터눈, 한강진역 근처 카페에서. 각자 헤어져야 하는 시간 또는 그 뒤 저녁 일정도 이야기 하지 않은 투박하고 넉넉한 일정. 낯선 사람은 박예진 에디터이다.

 

그를 만나려 기다리고 있었던 카페는 자리가 만석이였다. 바깥에 자리를 잡고 그를 기다리는데 무덤덤하던 며칠과는 달리 머리가 조금 복잡해졌더랬다. ‘이럴줄 알았으면 각 잡고 인터뷰 질문을 가져올걸 그랬나..’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인사를 하고, 그가 쓴 글에 대해 얘기하고 특히 재밌게 읽었던 ‘영언회귀’에 대해 묻는다. 자연스럽게 행동하려 한다. 넛티 아인슈페너를 주문하고, 들이키고, 노트북을 켜서 다시 그의 글들을 조금 훑어보고.

 

그리고 에디터 박예진님을 만났다.

 

자리를 옮겼다. 첫번째 카페는 야외자리 밖에 없었던 탓이다. 쌀쌀한 날씨에 멀지 않은 카페로 이동했다. 바에 앉으려고 하자 위스키 주문 손님만 앉을 수 있다는 재밌는 카페였다. 아쉽게 테이블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장님이 영화 소공녀를 재밌게 보셨나? 속으로 잠깐 생각했다. 나는 이전에 커피를 마셨던 탓에 차를, 예진님은 커피를 마셨던 것 같다. 그리고 구운 브리치즈와 견과류. 나른하고 설레는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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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술 섞인 커피를 파는 카페]

글 ‘영언회귀’ 중 예진님이 발견한 오타 한 자의 정체는?


 

박예진 에디터의 글 ‘영언회귀’는 ‘잘 보이고 싶은’ 친구를 만나고 온 에디터의 경험을 쓴 이야기이다. 친구와 이야기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아메리칸 사이코의 주인공 패트릭과 비교한 부분이 인상적인 글인데 다 읽고 나서도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 있었다. 친구와의 대화 뒤 스스로의 모습을 반추하며 일종의 부끄러움과 후회스러움을 느꼈던 에디터로 하여금 ‘유레카’ 외치고 다시 ‘짐승 탈’을 쓰게 하며 ‘맘편히 잘 수 있’게 하는 오타 한 자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오타 한 자는 그 친구에게 말하지 않고 남겨진 무언가, 그러니까 그 친구를 다음에 만날때면 또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이를테면, ‘기워입는 옷’처럼 언어로 상대방에게 다 표현될 수 없는 마음과 생각에, 언어의 여백과 부족함에 우리는 또 상대방과 ‘다음’을 기약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두운 밤 침대에 누워 오늘의 대화를 되새김질 해보며 조금 몸서리치다 문득 벽 앞에 보이는 투명한 글자, 오늘 내 언어의 여백- 혹은 오류, 또는 부족함-을 발견하여 그 글자를 떼 머리맡에 베고 마침내 곤한 잠을 잘 수 있게 된다는.

 

솔직히 말하면, 그의 말을 듣는 이 때가 2월, 아니 오래지 않은 2023년 최대의 유레카! 순간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박예진 에디터를 만날 때 즈음 ‘듣기의 윤리’라는 책을 읽고 있었는데 문제의식을 아주 단적으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하위주체(subaltern, 쉽게 번역하면 소수자)는 그의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언어가 부재하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니며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언어는 잘 들리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 주체에게 ‘말하라’고 하는 것보다 ‘듣는’것이 중요한데 주디스 버틀러에 따르면 듣기란 계속해서 묻는 것이다. 너는 누구니? 오늘 물었다면 그 대답을 고정된 것으로 삼지 않고 내일의 너에게 또 너는 누구인지 계속하여 물어본다.

 

하여간에 책에서 이런 부분을 읽고 있던 참에 그가 정곡을 찌른 느낌이었다. 언어는 부족하고 부족해,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 채워진 것 같지 않고 상대방이 나를 이해한 것 같지도 않다. 그렇지만 언어가 완벽할 수 없음에, 매번 꿰멜 수 있는 구멍이 있음에 상대방과의 다음이 기약된다. 다음에 상대에게 할 이야기가 완벽히 진실이 아니거나 ‘선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상대를 다시 만날 수 있는한 문제는 없다. 다시 얼굴을 맞대고 벽에서 뗀 글자를 비로소 적어넣으면 된다.

 

에디터의 말은 그 후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계속 곱씹어졌다. 가령 논문을 읽는데 “기호의 해독이란 기호 생산자가 ‘의도’한 의미가 그 수용자에게 왜곡 없이 올바로 전달되는 이상적인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재라는 양자간의 단절을 그 해독가능성의 조건으로 삼을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단절적인 비연속성이란 역설적으로 기호의 반복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데, 이러한 가능성을 매개로 한 기호의 독해란 무수한 반복 속에서 개입하는 타자성 속에서 필시 굴절될 수밖에 없으며, 그 안에서 의미는 “산포”되며 변전을 겪게 된다.”*는 문장에서 에디터의 말소리가 들리는 것 만 같았다. 그가 어떤 뉘앙스로 기워입는 영언회귀를 말했는지 다 알지는 못하겠지만 그 안에서 난 희미한 희망을 보았으니…이미 과거에 속하는 한 사람의 말이 내 현재와 얽히고 섥힌다는 것이 새삼 놀랍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조각을 우리 몸에 들인 즐거운 잡종.

 

 

 

[저녁, 반지하의 카레집]


 

우리는 이제 카레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생각해보니 역 안의 사물함에 맡기면 됐을 캐리어를 기여코 끌고 왔고 우리는 골목의 오르막길에서 캐리어를 잠시 같이 끌었다. 카페에서 이야기할 때 서로를 마주 보았다면 카레집에서는 바에 앉았다. 카레집은 낮아서 거리의 사람들을 올려다보아야 하는 구조였다. 우리는 서로 나란히-side by side- 앉아 창밖으로 보이는 사람 구경을 했다.

 

이야기는 돌고 돌아 우리는 당연한 수순인냥 어떤 삶을 살고싶은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예진님은 왠지 이런 질문이 들어올까봐 오는길에 준비를 했다고 웃어보이며 이야기했다. 말하길, 그는 부지런한 삶을 살고 싶다고. 그가 생각하기에 우리 대화에 오갔던 페르난도 페소아는 누구보다 불행을 부지런히 산 사람이였다고 덧붙였다.

 

부지런함의 미학. 쓱싹쓱싹 집안을 쓸고 닦고, 정원을 가꾸는 그의 모습이 상상됐다. 그는 쉽게 스스로를 기만하는 길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부지런히 자신의 생각을 들여다보고 고이지 않으며 계속 나아갈 것이다. ‘체’하거나 ‘척’하더라도 스스로 속아넘어가주는 일은 없을 것만 같은 사람. 그래서 다자이 오사무를 좋아하는가? 그가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을 추천해줬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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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만난지 2주가 넘은 것 같은데 문득 생을 부지런히 살고 싶다는 말이 다르게 들려온다. ‘부지런히 살고싶다라…’ 우리가 만났던 서울이 아닌 내가 살고 있는, 바다가 있는 도시에서 읊조려본다. 삶으로 그 단어를 가져다 오니, 그 단어 앞에 내 일상을 비춰보니 게을러 졌던 내 정신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언젠가부터 집요하게 생각을 밀어붙이고 타인과 사물을 이해해보려는 태도– 요가로 따지자면 막대자세에서 할 수 있는데 까지 손끝을 펼치는 노력 같은 것-, 무엇보다 섬세함으로의 노력이 멎고 있다. 피곤하다는 핑계는 현실적이며 강력하고. ‘뭐 그렇게 깊이 생각하나, 그냥 살아’ 라는 마음의 목소리가 파도친 것이 여러 번, 이 목소리가 쿨한 것이 아니라 단지 충분히 부지런하지 않았던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부지런한 삶은 – 특히 그 빗자루질의 대상이 스스로의 존재라면- 필연적으로 고통스럽고 어떤때는 지리하고 지지부진하기까지 하면서도. 봄 같은 목소리로 부지런히 사는 생을 원한다 말했던 사람을 떠올려본다. 그는 생의 부조리함에 대해 많이 쓰는 사람이고, 부조리함에 저항이나 쿨함 같은 거창함으로 응답하는 것이 아닌 씨익- 달큰한 미소로 ‘부지런함’을 대답해 보이는, 부지런한 사람. 내일은 도서관에 가서 다자이 오사무의 책을 빌려봐야겠다.

 

 

*장제형, "법의 수행성과 자기해체-벤야민과 데리다의 법과 폭력 비판", 2019, P107-108


 

[남영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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