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영언(言)회귀 [문화 전반]

글 입력 2022.12.03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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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친구와의 만남을 앞두고 무언가 빼먹은 듯한 느낌이 들어 스마트폰, 에어팟, 지갑, 립밤 등등을 차례로 확인하던 중의 일이었다. 다 챙긴 듯 그러나 무언가 주요한 것을 빠트린 듯한 허전함은 계절이 바뀌어도 가시지 않는가 보다.


마지막으로 집을 나서기 전, 내가 오늘 만날 친구의 얼굴을 미리 그리며 생각한다. 일본식 가정집에서 든든히 저녁을 먹고 근처 분위기 좋은 카페로 자릴 옮긴다.. 메뉴판의 숫자들에 흠칫 놀라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오늘 많이 피곤했다며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킨다.. 그렇게 타발적 아메리카노 선호자가 된다.. 이후 홀짝이며 서로의 근황에 대해 물으며 대화를 시작하겠지... 대화... 대화... 무슨 대화 아,


그러다 문득, 내가 까먹고 미처 챙기지 못해 방구석 어딘가에 나뒹굴고 있을 그 ‘무언가’의 정체를 알아챈다. 


오늘 나는 나가기 전, 단 하나의 활자도 입지 못했다. 

 

‘친구’라는 두 자에는 무게가 다르거나 질감, 심지어는 제형이 다른 상이한 것들이 뭉뚱그려져 각진 모양을 그리며 꺾인다.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고향 냄새가 나는 친구도,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 모든 걸 잊게 해 줄 술맛 나는 친구도, 호감의 길이만큼이나 멀게 느껴지는 친구이고 싶은 친구도, ‘지인’이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정 없어 보일까 봐 친구로 애써 덮은 친구도. 때로는 이 구분이 모호해질 만큼 다양한 감정이 혼재되어 알아볼 수 없는 친구도. 이 모든 ‘친구’들이 절대로 같은 친구일 순 없다. 그날, 비좁은 ‘친구’의 글자 속에서 꺼낸 그 애는 그중에서도 가장 까다로운 ‘호감의 길이만큼이나 멀게 느껴지는 친구’였다. 


한 마디로 무척 잘 보이고 싶은 친구. 필요한 물건들만 챙긴 것 같은데 어느새 두둑해진 내 가방엔 그 친구에게 보여줄 나의 잘 보일 점이 빠져 있었다.


지하철의 덜컹거림만큼이나 망함을 직감한 심장의 버둥거림을 느끼며 사회적 이슈에 대한 나의 견해(인 듯 보이지만 어디선가 주워들은)와 최근 읽은 책에 나왔던 현학적인 표현들을 머릿속에서 급하게 복기한다. 이미 망했지만,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좋은 인상을 남기리. 

  

그러나, 역시. 내 직감은 타율이 좋은 편이다.


따뜻한 일본 가정식으로 가볍게 워밍업을 한 후, 우리는 카페의 분위기만큼이나 진지한 대화에 들어갔다. 사실 나는 들어가는 척, 갑자기 문 앞을 가로막고는 내 노력의 결과를 선보일 준비에 들어갔다.

 

준비,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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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2. [흔들리는 풀들 속에서 커피향이 느껴지는 초원]

 

호응하는 척 다음 대화거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맹수. 익숙한 먹이가 보이자, 우아하고도 날렵한 움직임으로 확 낚아챈다. 흡족한 미소를 머금은 채,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흥겹게 아니 힘겹게 요리하는 녀석.


지리한 장광설의 원맨쇼가 끝나자 단 한 명의 청중은 박수를 친다. 감직한 미소를 지은 채. 상황과 맞지 않아 보일 수 있지만, 그 미소는 그야말로 매우 감직했다. 짐승 탈을 쓴 연기자는 무언가 잘못됐음을 인지하고는 잠시 넋을 잃다가, 혹시 짐승 탈에 구멍 난 곳이 있나 급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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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크부터야. 필 콜린스의 존재가 확실해지지. ‘인비저블 터치’는 그 그룹의 최고의 작품이야. 만질 수 없음에 대한 서정적인 고찰이지. 그와 동시에, 깊고 풍요롭게 만들었어. 바로 앞 세 개의 앨범에 대해서. 뱅크스, 콜린스, 러더포드가 연주하는 환상적인 앙상블을 들어봐. (...) ‘랜드 오브 컨퓨전’의 가사를 들어봐. 이 노래에서 필 콜린스는 정치적 권력 남용의 문제점을 말하고 있어. ‘인 투 딥’은 1980년대 가장 감동적인 팝송이야. 일부일처제와 헌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 하지만 ‘그레이티스트 러브 오브 올’이 최고로 강렬한 노래야. 자기 보호와 존엄성에 대해서. 그 노래의 보편적인 메시지는 모든 경계를 허물고 뭔가를 스며들게 해. 더 나은 우리를 위해 아직 늦지 않았다고. 타인과 공감하는 건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는 불가능하거든. 우리는 늘 자기 연민에 젖는 거야.  (<아메리칸 사이코> 중)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의 주인공 패트릭이 생각나는 장면이다. 패트릭은 사람들을 집에 초대한 후, 그럴싸한 평론을 뇌까리며 음악에의 박식함을 뽐낸다. 그러나 이 장광설은 자연스럽게 반어법 효과를 내는데, 그가 자신의 통찰력과 깊이를 보여주려고 할 때마다 그의 내적인 공허함과 천박함이 더욱 뚜렷하게 부각되는 것이다.  

 

쓴 약을 겨우 삼켰으나 목구성이 뜨거워져 금방 뱉어버리고 마는 어린아이처럼, 급하게 복습하여 내 것이 되지 못한 글자들을 쏟아내느라 대화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명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껏 꾸민 나와 달리 참으로 점잖고 진솔해 보이는 그 애의 표정에 나는 그만 망함보다 더 망함을 느꼈다. 잘 보이고 싶음이 성공하려면 잘 보이고 싶음이 잘 보이지 않아야 하는 법인데, 그날 나는 잘 보이고 싶음을 무척 잘 보여줘 버렸다. 

 

차마 삼킬 수 없어 뱉었던, 입보다 컸던 글자들은 거기서 사라지지 못하고 밤새 내 머리맡을 하염없이 맴돈다. 낮은 소리로 계속해서 중얼대며. 닥치지 좀... 닥치지 좀... 닥치지 좀... 닥치지 좀...  


왜 그렇게 잘 보이고 싶었나. 왜 나의 가방에는 담아도 담아도 담기지 않는 게 있는 것인가. 이 모든 낭패의 진원을 찾던 나는, 우연히 여전하게 돌고 있는 글자들을 바라보다 오타 한 자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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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

 

덮고 있던 이불을 내던지고는 벌떡 일어나 외친다. 

 

나는 부리나케 달려나가 허울, 아니 허물처럼 벗어놓은 짐승 탈을 도로 가져온다. 마침내 구멍을 발견한 지금, 무척이나 뿌듯하다. 책 뭉텅이에서 덜 해진 활자들을 뽑아내어 성심껏 구멍을 꿰맨다. 곧 다시 쓸 일이 있을 것만 같은 예감에 짐승 탈을 가지런히 정돈한다. 

 

이제 나도 맘 편히 잘 수 있다!

 

 

[박예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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