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버닝(Burning)’, 그레이트 헝거의 처절한 몸부림 [영화]

글 입력 2023.02.12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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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냐면, 여기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먹으면 돼. 그게 다야. 중요한 건, 진짜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러면, 입에 침이 나오고 진짜 맛있어.”

 

 

해미가 종수에게 보여주는 귤을 먹는 판토마임은 극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메시지를 드러낸다. 바로 무엇이 진실이냐 하는 것이다.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단서들을 자의적으로 조합, 해석하여 그 속에서 인과를 찾은 종수는 서사의 공백을 채워 해미가 실종된 사건의 용의자로 벤을 지목하고 그를 끈질기게 추적한다. 하지만 영화는 사람들의 진술을 엇갈리게 하고 사건의 전말을 의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종수가 진실이라 믿는 것이 실은 허구에 불과할 수도 있다고 우리에게 끊임없이 속삭인다. 

 


   

소극적 존재를 세계의 주체로


 

영화는 줄곧 종수의 시선을 따라간다. 카메라는 종수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비추고, 또 이러한 세상을 바라보는 종수의 모습을 담는다. 따라서 영화를 보는 관객은 자연스럽게 종수의 입장을 몰입할 대상으로 채택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러닝타임의 절반가량의 시간 동안 종수는 자신의 앞에 놓인 세상을 관망할 뿐 사건의 중심부에서 주체로서 활약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종수는 대개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저녁에 같이 술이나 먹자는 해미의 제안으로 함께 저녁을 먹고, 자기가 없는 동안 고양이에게 밥을 챙겨 달라는 해미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그의 집에 드나들며, 해미를 만나러 나갔다가 만나게 된 벤과 함께 밥을 먹고 그의 집에도 방문한다. 서사를 진전시키는 종수의 행동은 대부분 자발적이기보다는 외부의 요청으로 인한 것으로, 종수는 그저 해미가 내미는 손을 잡을 뿐이다. 해미의 부름에 화답함으로써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 속에서도 종수는 한 걸음 물러나 관찰자적인 시선으로 눈앞에 놓인 인물과 상황을 묵묵히 바라보는데, 특히 갑자기 나타난 미스테리한 인물인 벤은 종수의 내면에 파동을 일으키며 그의 주된 관찰 대상이 된다.

 

이렇게 비주체적이고 수동적이었던 종수는 영화의 후반부로 진입하며 사건을 주도하는 주체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가 군대식으로 면접을 하는 직원을 보고 면접에서 갑자기 나와버리기도 하고, 벤이 태운 비닐하우스를 찾기 위해 아침마다 동네를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해미의 행방을 찾기 위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벤을 미행한다. 눈에 띄게 변화된 종수의 주체적인 선택들은 모두 대마초를 피우고 나서 종수가 꾸었던 매섭게 불타오르는 비닐하우스에 대한 꿈으로부터 촉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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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시켜서 집을 나간 엄마의 옷을 불태웠던 일이 계속 꿈에 나온다는 종수의 말은 이 사건이 그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음을 알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날 밤 종수의 꿈속에 등장한 어린 시절의 그는 대단한 광경을 목격했다는 듯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활활 타오르는 비닐하우스를 바라본다. 프로이트의 말대로 꿈을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본다면, 이것은 종수가 처음으로 자기 안에 내재하고 있는 욕망의 씨앗을 발견한 순간으로 볼 수 있다. 이전까지는 세계에 의해 움직여지던 종수가 자신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던 욕망을 마주함으로써 세계를 움직일 동력을 서서히 얻기 시작한 것이다.

 

 

 

종수, 더 그레이트 헝거


 

그렇다면 종수가 욕망하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종수가 불태우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해미로 대치되는 성적 욕망과 애정에 대한 욕망이다. 종수는 해미가 없는 방에서 해미를 떠올리며 자위를 하고, 자신에게 유일한 빛이었던 해미를 빼앗아간 벤을 질투하며, 실종된 해미를 찾아다닌다. 하지만 이것은 종수의 욕망을 둘러싸고 있는 겉껍데기에 불과하다. 홀연히 사라져버린 해미를 찾기 위해 시작된 종수의 여정은 어느 순간 그가 벤이 태운 비닐하우스를 찾아다니고 벤의 개인적인 일상을 추적하는 데 집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목적성을 상실하며, 여기서 종수의 욕망은 해미가 아닌 벤을 향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재력과 몸에 밴 여유로움, 사람들의 대접과 행복한 가정까지. ‘개츠비’ 같은 벤은 가난하고 외로운 작가 지망생 종수가 가지고 싶지만 가지지 못한 것, 그리고 가질 수 없는 것들의 총체다. 이제까지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했던 종수 내면의 이러한 욕망은 모든 것을 가진 벤의 등장으로 인해 촉발되고, 이는 분노라는 이름으로 분출되어 결국 벤을 칼로 찔러 죽이고 불태우는 데까지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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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또한 종수의 가장 근본적인 욕망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부시맨들에게는 두 종류의 굶주린 자가 있대.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 리틀 헝거는 그냥 배가 고픈 사람이고,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에 굶주린 사람이래. 우리가 왜 사는지,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런 걸 늘 알려고 하는 사람.”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에 대한 해미의 설명에 의하면, 종수는 해미가 상징하는 성적 욕망과 벤이 상징하는 부와 권력에 대한 욕망을 지닌 ‘리틀 헝거’일 뿐이다. 그러나 아프리카에 가서 보고 온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종수의 앞에서 직접 춰 보이는 해미를 떠올려 보라. 양팔을 머리 위로 올려서 양옆으로 흔드는 그레이트 헝거의 춤은 마치 하늘을 향해 활활 타오르는 불길의 모습과 닮아있다. 종수의 꿈속에서 타오르는 비닐하우스처럼, 불타는 포르쉐와 벤의 시체처럼. 어쩌면 종수가 무언가를 불태운다는 것은,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본질적인 삶의 의미 앞에서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애원하는 그레이트 헝거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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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욕망이 언제나 제때 먹이를 받아먹으며 잘 다스려진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채워지지 않은 욕망은 자신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내면의 바깥으로 표출시키려 한다. 벤을 칼로 찌르고 나서 이에 불을 지르는 종수의 행위는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바라보고 서 있던 지난 꿈속의 장면과 겹쳐지며 수동적이고 소극적이었던 그가 이제는 현실 속에서 진정한 자신의 욕망을 마주하고 이에 응답하게 되었음을 알린다. 종수가 자신의 굶주린 욕망에 무고한 벤을 ‘제물’로 바치면서 서사가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곤두박질하는 순간, 오히려 삶의 의미에 굶주린 그레이트 헝거로서의 종수의 주체성은 절정에 다다르며 영화는 비로소 세계에 대한 온전한 주도권을 쥔 종수라는 인물을 완성시킨다. 

 

 

 

젊은이의 양지



이창동 감독은 영화 <버닝>에 오늘날 젊은이들의 모습을 담고자 했다. 삶에 대한 불안과 방향을 잃어버린 분노는 주로 종수라는 인물을 통해 형상화되는데, 감독은 이런 종수가 “아버지에게 묶인 채 과거의 덫을 현실로 살고 있는 친구”라고 밝힌 바 있다. 종수는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때문에 엄마를 잃었고(엄마는 도망갔다), 아버지의 자존심 때문에 가난을 물려받았으며(농장이 망했다), 공무원에게 흉기를 휘두르고 구속된 아버지 때문에 파주집에 거주한다(송아지에게 밥을 줘야 한다). 이렇게 종수의 삶의 많은 부분은 아버지로 인해 결정지어졌다. 그런데 종수가 걸린 과거의 덫은 단순히 아버지로 끝나지 않는다. 파주집에서 들려오는 대남방송이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이는 종수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에 일어난 남북 분단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지금의 종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버지와 사회로부터 위임받은 문제를 떠안고 사는 종수는 아마도 모든 우리 젊은이들의 초상일 것이다.


최고가 아니면 루저가 되는 시대, 대입을 위해 인생을 바쳐야 하는 시대, 명문대를 나와도 취업이 어려운 시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도 집 한 채 마련하기 어려운 시대, 그래서 사랑도 포기해야 하는 시대. 이것은 대한민국의 미래라고 불리던 아이들이 자라서 마주하게 된 현실이고, 미래의 꿈나무들은 이른바 ‘N포세대’가 되었다. 기본적인 삶의 질을 유지하는 것조차 어려운 시대에서 그레이트 헝거들이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것은 더더욱 어려워졌다. 사회의 각종 창구로부터 참다못해 터져 나오는 청년들의 이름 모를 분노는 고장 난 나침반처럼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잘못된 곳을 향해 발길질하는 종수의 모습과 비슷하지만, 이는 사실 우주 쓰레기가 되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정상 궤도를 유지하려는 인공위성의 치열한 몸부림과 더욱 닮아있는 듯하다. 

 

 

[윤채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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