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네겐 그냥 격려가 필요했을 뿐이야 : 연극 '오펀스' [공연]

글 입력 2023.02.19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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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오펀스.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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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연극 '오펀스'의

자세한 내용과 결말을 담고 있습니다

 

 

 

SYNOPSIS


 

필라델피아 북부에 위치한 낡고 허름한 집에 살고 있는 고아 형제 트릿과 필립. 충동적이고 폭력적인 형 트릿은 좀도둑질로 동생 필립을 부양하며 아버지 역할을 해나가고 있다. 하지만 동생에 대한 사랑과 강한 보호심, 그리고 버림받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트릿은 필립이 지식 없이 문맹으로 순수하게 살기를 강요하며, 이미 지나간 유년 시절에 동생을 가두어 그가 성장할 기회를 빼앗는다.


동생 필립은 형이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도둑질을 하러 나간 사이에도 결코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어린 시절 알레르기 반응으로 목숨을 잃을 뻔한 필립은 자신이 밖으로 나가면 죽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부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는 필립은 TV 시청과 신문에 실려 있는 낱말 맞추기, 그리고 집안에 굴러다니는 오래된 책 속의 단어들에 밑줄을 치며 형 몰래 은밀한 학습을 시도한다.


한편, 트릿은 어느 날 해롤드라는 이름을 가진 시카고 갱스터를 집으로 납치해 온다. 술에 취한 해롤드는 본인 역시 고아라고 형제들에게 얘기한다. 트릿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해롤드는 마술처럼 본인을 묶고 있던 밧줄을 풀어내고, 해롤드를 감시하던 필립을 설득해 나가며 안심시킨다. 집으로 돌아와 이 광경을 본 트릿이 흥분하자 해롤드는 본인의 총을 꺼내 단숨에 제압한다. 2주 후, 해롤드와 두 형제의 이상한 동거는 시작되고, 세 사람은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알 수 없는 감정에 빠져들며 점차 가족이 되어 가는데...

 

 

 

Orphan (명사) : 고아, 의지할 데 없는 사람


 

사람이 온전히 자신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세상에 대해 가르쳐줄 사람. 외부로부터의 작은 충격에도 취약한 아이가 자랄 때까지 보호해줄 사람. 사회의 규칙을 이해시켜주고 그것을 따를 수 있도록 이끌어줄 사람. 흔히 우리는 이 역할을 해줄 대표자로 '부모'를 떠올린다.

 

그러나 연극 '오펀스'에 등장하는 트릿과 필립에게는 그러한 보호자가 없다. 그들의 부모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명시되지 않는다. 그저 어머니의 코트, 그리고 어머니의 것으로 추정되는 구두 한 짝 정도의 흔적 뿐만을 무대 위에서 볼 수 있었다.

 

트릿이 살아남기 위해서 습득한 행동 방식은 폭력이었다. 집 밖에서는 본인이 당하지 않기 위해 먼저 폭력을 저지르고, 동생 필립은 집을 벗어나지 못하게 함으로써 위험한 세상으로부터 고립시킨다. 제대로 보호받은 적 없으니 어떻게 보호해야 맞는지 알지 못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것도 같지만, 무언가 뒤틀린 채로 이들의 일상이 이어진다.

 

트릿에 의해 납치되어온 해롤드는 되려 트릿을 제압하고, 트릿에게 자신을 위해 일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그는 두 형제에게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또 그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보호자'가 되어간다.


 

 

필립의 이야기 : 난 이제 내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아요


 

필립 이야기.jpg

 

 

밖으로 나가는 것도, 글을 읽는 것도 형에 의해 제지되는 필립은 여전히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몰래 집에 있는 낡은 책들과 신문을 보며 스스로 글을 깨치고 창밖을 열심히 구경한다. 물론 정말 밖으로 나가지는 않는다. 트릿이 밖에 나가면 알러지 반응으로 죽을 거라고 단단히 일러두었기 때문이다. 

 

아마 트릿이 납치해온 해롤드는, 그런 필립에게 아주 오랜만에 만난 새로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처음이었을 수도 있겠다. 무서워하면서도 그를 흥미롭게 바라보던 이유일 테다.

 

이후 해롤드의 집에서 살게 된 필립은 끈을 묶지 않아도 되는 로퍼의 존재부터 구두 주걱을 사용하는 방법, 자신이 밤공기에 알러지가 있지 않다는 사실, 세상 밖을 돌아다닐 수 있다는 사실을 하나씩 배우게 된다.

 

길을 잃을까 두려워 밖으로 나가기를 머뭇거리는 필립에게, 해롤드는 지도를 한 장 건네준다. 이 지도를 계기로 필립은 트릿에게 처음 맞서게 된다. 몰래 글자를 공부하거나 산책을 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은 밖에 나가도 안전하다고 형에게 당당하게 말한 것이다. 트릿의 분노에도 필립은 지도를 들고 집을 떠날 거라고 외친다.

 

위험을 맞닥뜨려도 헤쳐나갈 수 있다는 확신, 자신이 자신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배운 필립은 어쩌면 트릿보다 강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H : 괜찮아, 지도는 주유소에 가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

세상 어디에 있든, 넌 다시는 길을 잃지 않을 거야.

 

P : 전 다시는 길을 잃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언젠가 이 지도도 필요 없게 되겠죠?

 

 

 

트릿의 이야기 : 난, 늘 널 잘 보살폈어


 

트릿 이야기.jpg

 

 

트릿은 어째서 필립을 집에 가둬두었을까? 왜 필립이 세상에 대해서 조금도 알기를 원치 않았을까? 트릿에게 세상은 위험천만한 폭력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트릿에게는 강박이 있다. 형으로서 필립을 지켜야한다는 강박. 이때 말하는 '지킴'이란, 도둑질을 해서라도 돈을 구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부터 필립이라는 아이를 키우는 것까지 포함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트릿 역시 제대로 된 '보호'를 받아본 적이 없는 인물이다. 당장 필립이 저 문밖을 나서지 못하게 하는 것만이 그가 생각해낼 수 있는, 동생을 지킬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소리 지르고 위협하면서까지 필립의 외출을 저지해서라도 말이다.


필립이 산책을 나가고 없는 집안에 들어와 무너지는 트릿의 모습을 보면, 그 선택이 단순히 필립만을 위한 게 아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연약한 동생이 밖에 나가서 우연히라도 해를 입을까봐 걱정되는 마음과 함께, 만약에라도 필립을 잃게 된다면 자신은 더이상 버틸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2막의 끝이 다가오면서 트릿이 무너지는 모습을 거듭 볼 수 있었다. 트릿은 버려지기 전에 버리는 것, 맞기 전에 때리는 것, 지기 전에 이겨먹는 것이 익숙한 소년이다. 해롤드가 숨을 거두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해롤드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그의 손길을 그리워하는 필립을 두고 곧장 옷장으로 달려 들어가 "필립, 해롤드는 죽었어!"라고 소리친다. 그러다 결국 옷장 밖으로 나와 죽은 해롤드의 손을 붙잡고 애원한다. 끝까지 거절했던 해롤드의 격려가 사실은 필요했다고, 그제서야 인정하며 눈물을 터뜨린다.

 

 

T : 해롤드, 나 앵벌이 키즈 맞아요.

내가 그 빌어먹을 앵벌이 키즈예요.

나도 격려가 필요해요.

나 떠나지 말아요, 해롤드.

 

 

***

 

처음에는 막무가내인 트릿을 역으로 이용할 생각이었던 해롤드는, 자신과 같은 트릿과 필립의 처지를 듣고 정말고 그들의 가족이 되기를 자처한다. 두 형제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을 하나씩 채워주고자 한다.

 

누구에게나 날을 세울 필요가 없음을 트릿에게 가르치고,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세상을 필립에게 가르친다. 두 아이들을 "아가야" 혹은 "아들아"라고 칭하는 해롤드의 목소리에는 그의 애정이 담겨 있었다. 물론 그 역시도 애정을 주는 데 익숙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서툴게나마 감정을 주고받는 세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아픔을 이겨내고 있었다. 막이 내린 뒤의 트릿과 필립이, 서로에게 격려를 해주며 살아가길 바라본다.

 

 

H : 우리한테 필요한 건 엄마는 아니었을 거야.

네겐 그냥 격려가 필요했을 뿐이야. 

 

 

 

에디터 명함.jpg

 

 

[장유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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