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평화로운 료칸에서 - 이백십일

글 입력 2023.02.16 15:52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산울림.png

[산울림 소극장, 산울림 공식홈페이지]

 

 

‘산울림’ 소극장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전설적인 존재로 추앙되고 있는 것 같은 ‘임영웅’ 연출가-알고보니 지금 산울림 소극장을 창단하셨던-와 숱한 ‘고도를 기다리며’의 포스터. 포스터들은 대부분 1990년대 내지는 2000년대 초반의 것이였던 것 같고. 그래서 이 공간은 과거를 향유해서 살아가는 곳인가, 괜한 걱정이 들었던 것도 잠시.

 

연극이 진행되는 지하로 내려갔다. 고백하자면 필자는 학교 밖에서 연극을 보는 것이 처음이였다. 말하자면 연극 ‘210일’이 나에게는 연극 ‘1일’이였던 셈. 지하로 내려가니 정말 자그마한 소극장이 있었다. 작은 무대였지만 료칸을 나타내는 방 두개와 칸막이, 평상 그리고 그 앞의 목욕통. 그리고 가장 뒤에 있는 아소산이 짜임새 있게 연출되어 있었다. 조금 설레었다. 연극이 시작하기 10분전 같이 갔던 친구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는데 친구는 ‘어떤 무대든, 무대는 반짝인다’고 말했다. 연극을 보며 내내 되새김질 되었다. ‘무대’와 ‘동경’은 떼어놓을 수 없는 콤비.

 

 

 

연극 '210일'


 

연극 ‘210일’은 일본 아소산 아래에 있는 한 료칸에서 진행된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들은 두 친구로 그 중 한명, 게이는 발자국 소리와 보폭이 모두 크며, 몸도 기세 좋은 동물처럼 한껏 부풀리고 다닌다. 그는 두부장사의 아들내미로 사회문제에 관심도 많고 부자들을 싫어한다. 반면 다른 한명인 로쿠는 어딘가 주눅들어 보이는 허약한 친구이다. 그는 종종걸음으로 주로 게이의 뒤를 따라다닌다.

 

그는 그의 친구 게이가 지극히 '범인'의 환경에서 자란것 같지만 '범인'같지 않음에 감탄한다. 게이는 로쿠를 끌고 궂은 날씨에도 아소산을 오른다. 화산이 터졌는지 연기가 자욱하고 게이는 급기야 골짜기에 떨어지기도 하지만 끝내 서로를 잘 의지하여 료칸으로 돌아온다. 게이는 어렵사리 료칸으로 돌아와서도 다시금 아소산을 오르고자 한다.

 

이들의 앞 방에는 도련님 한명이 사는데 몸이 영 좋지 않다. 돈이 궁하여 집에서 보낸 집사에게 용돈을 전해 받는데 지금까지 받은 교육이 아깝지도 않냐는 집사의 잔소리를 뒤로 하고 계속 료칸에서 일하며 요양하기를 택하는 인물이다.


나머지 두 인물 중 하나는 흰 수염을 가진 할아버지로 극에서는 대사가 따로 없다. 주로 방을 닦고 나무 가지를 치는 등의 행동을 보인다. 마지막 인물은 바로 료칸에서 일하는 여직원으로 ‘반숙’을 요구하자 계란 여섯개 중 세개는 완숙으로 세개는 날달걀으로 내오고 맥주를 요구하자 맥주는 없다고하지만 ‘아사히’는 대령하는, 말은 잘 안통하지만 그래서 우스꽝스럽게 재미 있는 인물이다.

 

 

포스터.jpg


 

 

오르락 내리락하는 삶


 

연극이 진행되는 료칸은 삶들이 모여드는 교차로와도 같다. 게이는 (짐작건대) 그다지 좋은 교육도 받지 않았고,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것도 아니지만 사회에 대한 의지가 굳건하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아소산에 연기가 쳐도 비바람이 쳐도 심지어 골짜기에 떨어져도 상심하지 않고 푸하하, 웃어보이며 저 멀리 보이는 아소산을 다시 오르기로 벌써, 마음먹었다. 로쿠는 어떤가. 로쿠는 게이가 끌어내지 않았다면 아소산을 올라 고생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게이가 골짜기에 빠졌을 때 우산으로 게이를 구해주는 저력을 발휘한 것 또한 로쿠이다. 

 

게이와 조금 대조되는 인물이 도련님일텐데 도련님은 방안에서 조용히 책을 읽는다. 그는 돈에 구애 받고 싶어하지 않지만, 그렇게 구애받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에 오히려 구애받게 되는 것 처럼 보인다. 가령 그는 감기에 걸려 몸져눕는데 돈이 없고 그렇다고 해서 밖으로 나가고 싶지도 않아 결국 그는 요양을 위해서 마차꾼으로 일하면서까지 료칸에 남게 된다. 삶은 결국 가만히 있거나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는 없으니. 완전한 자유를 맹목적으로 쫒으면 되려 부자유해진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중요한 것은 이 연극이 이 대조-게이와 도련님-에 집중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오르락 내리락 하는 누군가의 삶들을 료칸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것만 같다. 누군가를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왔다갔다, 가끔은 멈췄다 다시 움직이는 모습을 그냥 그대로 긍정하는 것처럼. 누구는 산을 오르고 누구는 가지치기를 하고 누구는 방에서 조용히 책을 읽는 등 이 모든 일들은 중첩된 료칸, 산과 료칸 사이, 그리고 산에서 평화롭게 이야기된다.


 

 

무대, 배우, 동경


 

영화가 촬영된 신들을 편집, 즉 감독 등의 권한 아래 하나하나씩 테트리스하듯 조립해나가는 과정이라면 연극은 조립, 개조, 편집 등의 2차 가공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영화의 주인공이 배우보다는 스크린 뒤에 있는 감독 혹은 편집자 등이라면 연극은 오롯이 배우가 주인공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배우는 검열될 수 없는, 벌써 관객과 만나는, 그리고 무대 위에서 자유로이 그 극을 자신의 해석대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 배우의 실수가 ‘불가능한’ 것이라면 연극에서는 배우의 실수가 ‘가능해’지는 현재 그 자체를 볼 수 있다.

 

‘나나’같은 애니메이션을 보면 음악을 하는 뮤지션에 대한 개인의 애착과 ‘팬심’같은 것이 자주 등장한다. 연극을 하는 배우에게도 비슷할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들은 훌륭히 극 안에서의 ‘역할’을 소화해내면서도, 언제라도 실수를 하거나 돌발상황을 일으킬 수 있는 현재의 ‘살아있는 (가변의) 얼굴’이라는 이중의 정체성 갖고 있다. 관객은 무의식적으로도 당연히 이 사실을 알고 있고. 그래서 어떠한 편집기술도 가해질 수 없는 이 현재에서 넘어질수도, 떨어질수도, 대사를 틀리고 버벅거릴수도 있는 나와 같은 인간이 저토록 자신의 역할에 몰입해 있는 것을 보면 마음 한켠에서 동경이 피어오른다.

 

말을 돌려했지만, 한마디로, 연극 '210일'을 보며 느꼈던 것은 무엇보다 배우들에 대한 '동경'과 '존경'이다. 무대는 이제는 너무 시시해져버렸거나 우스꽝스러워져버린 '열정'이라는 단어를 재료로 한다는 생각을 했다. 소극장 산울림의 빨간의자에 앉아서. 물론 '연극이 끝나고 난 뒤'에 말이다!


 

[남영신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