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끔찍이’ 여기거나, ‘끔찍하게’ 여기거나 [영화]

<마더>와 <케빈에 대하여>가 그려내는 모성의 의미
글 입력 2023.02.13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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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어머니의 몸으로부터 나온다. 제아무리 가족의 형태가 변화하더라도, 모두에게 그 ‘어미’가 있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생물학적 관계를 떠나서, 아이와 엄마의 사회적인 관계 역시도 보편적인 모습을 띨까? 많은 이들은 대체로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모성애’에 대한 믿음은 그토록 굳건하니까. 예나 지금이나 이 모성애는 절대적이고 숭고한 가치처럼 여겨진다. ‘엄마 같은 따뜻함’, ‘엄마의 손길’ 같은 표현이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 방증일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엄마의 손길’은, 따뜻한 어루만짐이 아니라 차가운 손찌검일 수도 있지 않은가? 미디어는 분명 따뜻한 엄마의 모습을 더 자주 표상하지만, 우리는 종종 뉴스에서 자식을 학대하거나 방임한 어머니들을 본다. 그럴 때, 우리는 당연해 보였던 바로 그 전제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된다.


 

“모든 어머니는 자식을 사랑할까?”

 

 

 

자식을 끔찍이 여기는 엄마, 마더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는 자식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엄마의 전형을 보여준다. 김혜자가 분한 엄마의 배역은 아들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굳게 믿으며, 그 믿음을 정당화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멱살을 잡히고, 모욕을 당하고, 돈을 빼앗기더라도 그녀는 굴하지 않는다. 엄마니까. 모름지기 엄마라면, 자식을 보호해 줘야 하는 게 당연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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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녀의 이런 믿음이 무색하게, 살인을 저지른 건 정말로 그녀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아들에게서 돌아서는 대신 진실에게서 돌아서기를 택한다. 끝내 유일한 목격자를 죽이고 만 그녀는, ‘기억을 잃는 침’을 자신에게 놓으면서 긴 여정의 종지부를 찍는다. 그녀에게 모성이란, 자식의 두려운 이면을 볼 때 그대로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이었다. 결말을 암시하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 그녀가 춤을 추다가 오묘하게 웃으며 손으로 눈을 가려 버리는 것은 그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될 수 있는 건, 이처럼 기괴한 모성을 표현하는 데 ‘김혜자’라는 배우를 기용했기 때문이다. ‘국민 엄마’이자 대한민국의 전형적인 어머니를 상징하는 아이콘인 김혜자는, 이 영화에서 자식을 위해서라면 살인도 서슴지 않는 무서운 엄마로 변주된다. 이는 영화 속의 상황을 우리의 삶으로까지 확장시킬 여지를 남긴다.

 

엔딩 장면은 그 의도를 더욱 노골적으로 내비치는데, 김혜자는 자신에게 침을 놓은 뒤 관광버스 안에서 춤추는 수많은 엄마‘들’ 사이로 걸어 들어간다. 결국 봉준호는 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어머니의 사랑이 극한으로 치닫는다면, 어떤 끔찍한 일까지도 벌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말하자면, <마더>는 사랑을 통해 사랑이 아닌 것을 말한다.

 

 

 

자식을 끔찍하게 여기는 엄마, 에바


 

반면 <케빈에 대하여>는 <마더>와는 전혀 다른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낸다. 틸다 스윈튼이 분한 ‘에바’는 다른 아이들과는 어딘가 다른 ‘케빈’을 자식으로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아이를 갖고도, 아이를 낳고도, 아이를 기르면서도 그녀는 행복하지 않다. 그것이 원인이었는지는 몰라도, 케빈은 그녀에게 늘 험악하게 군다. ‘몰라서’ 실수하는 게 아니라 ‘알고도’ 나쁜 행동을 일삼던 케빈은, 에바에게 행복이 아닌 불안과 좌절만을 안긴다. 그리고 에바 역시 그런 케빈을 새롭게 낳은 딸에 비해 홀대한다. ‘엄마는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냥 익숙한 거야’라는 케빈의 말이 맞았다. 에바에게 케빈은 축복이 아니라 절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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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케빈은 자랄수록 점점 더 뒤틀린 심성을 갖게 되었고, 결국은 가지고 있던 활로 수많은 사람들을 쏴죽이게 된다. 심지어 자신의 아빠와 여동생까지도. 묘한 점은, 케빈이 평소 자신과 잘 놀아줬던 아빠를 죽이고 자신과 각을 세웠던 엄마는 살렸다는 것이다. 그런 케빈에게, 에바는 지금까지 묻지 않았던 질문을 던진다.


 

“이제는 말해 줘. 왜 그랬니?”

 


그러자 케빈은 답한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대화가 끝나고, 에바는 복잡한 표정으로 케빈을 안아준다. 그렇게 에바는 있는 그대로의 케빈을 받아들인다. 이해할 수 없는 아들을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을 비로소 떼며. 미워할 수밖에 없는 아들에게서 뒤돌아서지 않고, 그를 향해 활짝 팔을 벌려 보이며. 에바에게 모성은 그간 외면해오던 자식의 두려운 이면에 대한 뚜렷한 응시였다.

 

사실 이 영화를 보는 대부분의 관객들은, 사이코패스처럼 보이는 케빈보다 주인공인 에바에게 더 공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가 가져다주는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실 우리가 모성애를 아름답다고 느끼는 건 ‘다 내어주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다 내어주기를 바라는 사랑은 얼마나 폭력적인가. 그럼에도 끝내 아들을 사랑하고야 마는 에바의 모습은 얼마나 가련한가. <케빈에 대하여>는 사랑이 아닌 것들을 부단히도 보여주다가 결국은 사랑을 말한다.

 

 

 

마더와 에바, 군무와 독주


 

<마더>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김혜자가 분한 배역의 이름이 ‘마더’라는 것이다. 적어도 엔딩크레딧에 따르면 그렇다. 그래서 <마더>에서 마더는 ‘엄마’나 ‘도준 엄마’라고 불릴 뿐, 그 이름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반대로 에바는 ‘케빈 엄마’라고 불린 적이 거의 없으며, ‘에바’나 ‘에바 캐처도리언’이라는 풀네임으로 불린다.

 

그 미묘한 간극이, 서로 평행선을 달리는 이 두 영화의 차이를 설명해준다. 마더는 도준의 엄마로서만 살아가며 그 정체성을 위해 자신을 내던지지만, 에바는 케빈의 엄마라는 사실에 고통스러워하며 그를 단절시키고 싶어한다. 그러나 정작 아들이 지은 죄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은 건 마더였고, 그토록 싫어하던 아들의 죄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죄책감을 느끼는 건 에바였다. 모성은 이렇게나 다르다.

 

이 차이는 엔딩에서도 드러난다. 우리가 생각하는 ‘마더’, 즉 보편적 모성의 극한에 가까운 전자는 엔딩에서 ‘군무’의 이미지로 표현되지만, 우리가 낯설다고 느끼는 에바 개인의 모성인 후자는 엔딩에서 ‘독주’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마더는 다른 마더들과 섞여 춤을 추지만, 에바는 외롭게 복도를 걸어간다. 그러나 자식의 죄를 고발하려는 자를 죽인 마더를 감싸는 건 단조풍의 씁쓸한 음악이지만, 자식의 죄에 대한 책임을 떠안고 살아가는 에바를 감싸는 건 장조풍의 밝은 음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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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인 아들을 둔 엄마’라는 같은 소재를 너무나도 다르게 풀어낸 이 두 영화는, 우리에게 모성의 본질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남긴다. 아니, 사실 <케빈에 대하여>는 여기서 더 나아가 모성이 자연적으로 획득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자아낸다. 모성의 본질이 존재함에 동의하는 듯한 <마더>도, 마더가 목격자를 죽이고 난 뒤 “엄마...”라며 탄식하는 장면을 통해 모든 어머니들도 결국 누군가의 딸이자 보호받아야 할 존재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결국 모성이란 절대적이고 굳건한 존재가 아니라, 상대적이고 모호한 존재일 수 있다.

 

그러니 섣불리 ‘모성은 이런 거야!’라고 정의내리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외려 모성은 이제 ‘사랑’이나 ‘따뜻함’과 같은 특정한 의미를 품지 말아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자식을 끔찍이 여기는 것도, 자식을 끔찍하게 여기는 것도. 자식의 이면을 끝내 외면하는 것도, 자식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것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한 명씩 있을 어머니들(母)의 그 어떤 성질(性)도 ‘모성’이 될 수 있으므로.

 

 

[강민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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