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도서/문학]

글 입력 2023.02.11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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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별것 아닌 일에도 계산기를 두들기는 폼이 자연스러워졌다. 이제는 침도 안 바르고 사소한 거짓말쯤이야, 무대 위 배우처럼 능수능란하게 해낸다. 날씨마냥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오늘의 비리와 시도 때도 없이 올라오는 각종 기만, 논란에 대한 사과 영상들은 나의 이기심, 거짓말, 계산적인 속내에 대한 민망함을 경감시킨다. 악에도 정도가 존재하는 것 같은 세상에서 비교적 자그마한 나의 악을 숨기며 적어둔 핑계를 외우다 문득, 이제는 애써 수치를 찾지 않게 될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한다.


맞들었더니 너무 나아진, 심히 가벼워져 이제는 사라질 것만 같은 부끄러움 한 가닥을 아예 놓쳐버리기 전에 움켜줘야 한다. 모두의 부끄러움에 안녕을 물으며 박완서 작가의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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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는 1974년 8월 <신동아>지에 연재된 박완서 작가의 단편소설로, 주인공 '나'의 부끄러움 회복의 역사를 그리고 있다. 주인공 '나'는 과거 유난히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아이였지만 6·25 전쟁 당시 생활고를 겪으며 어머니로부터 몸을 팔라는 강요를 듣고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훼손당한다. 도저히 그 일을 할 수 없었던 '나'는 차라리 시골의 부농이라고 소문난 남자와의 결혼을 택한다.

 

하지만 아이를 보지 못하고 남편의 교만함과 무식함에 질려버린 '나'는 이혼을 택하고, 곧이어 T대학 강사와 두 번째 식을 올린다. 돈, 명예에 담박하고 약한 것들에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사람인 줄 알았던 그는, 결혼 후 돈과 명성에 기갈이 들려 있는 실체를 비춘다. '나'는 환멸 속에서 또다시 이혼하며 지금의 세 번째 남편을 만나게 된다. 사업가인 그는 철저한 배금주의를 조금도 위장하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전 두 남편 보단 그나마 덜 이중적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세 번째 결혼과 함께 서울에 올라와 그곳에 있던 동창 친구들을 만난다. 속물적인 대화가 오고 가던 중 과거 '나'만큼이나 부끄러움을 많이 탔던 '경희'의 얘기를 듣고 그녀에 대한 호기심을 키운다. 그러나 고관집 안주인이 된 '경희'에게서 '나'는 부끄러움의 껍데기만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녀에게 과거의 모습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고관집 부인 친구와 친해지라는 남편의 등쌀에 못 이겨 일본어 학원에 등록한 '나'는 학원 간판이 즐비한 종로 거리를 지나가다 우연히 일본인 관광객들을 마주치게 된다.

 

그때 한국인 가이드가 일본인 관광객들에게 "이 구역에서는 소매치기를 조심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나'는 그제서야 잊고 있었던 부끄러움의 감정을 다시금 뜨겁게 느낀다.


 

내 주위에는 많은 학생들이 출렁이고 그들은 학교에서 배운 것만으론 모자라 XX학원, 00학관, △△학원 등에서 별의별 지식을 다 배웠을 거다. 그러나 아무도 부끄러움은 안 가르쳤을 거다. 나는 각종 학원의 아크릴 간판의 밀림 사이에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는 깃발을 펄러덩펄러덩 훨훨 휘날리고 싶다. 아니, 굳이 깃발이 아니라도 좋다. 조그만 손수건이라도 팔랑팔랑 날려야 할 것 같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고. 아아, 꼭 그래야 할 것 같다. 모처럼 돌아온 내 부끄러움이 나만의 것이어서는 안 될 것 같다. (38쪽)

 


주인공이 한국인 가이드가 일본어로 말한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를 알아듣고 부끄러움의 감정을 회복한 이유는 첫 번째, '나'의 이중성을 폭로당했기 때문이다. 이제껏 남의 이중성, 허영만을 덧없이 판단하던 '나'는 일본어를 알아들음으로써 그들의 요구에 맞게 행동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직시한다. 혐오했던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자신과 그 허물을 감각한 그녀에게 마침내 부끄러움이 허락되는 순간이다.

 

두 번째 이유는 당시의 한국 사회와 관련이 있는데, 한때 한국 땅을 침략했던 일본인에게 도리어 종로에서의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말은 한국 땅이 그만큼 변했음을 시사한다. 근대화로 인해 속물성과 허위의식이 팽배하여 부끄러움이 사치스러운 감정이 된 당대 사회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고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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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나'가 갈구했던 부끄러움이란 감정은 결국 순수, 감수성에의 은유이다. 부끄러움이 소중한 이유는 자신의 허물, 즉 이중성을 알아차려야만 느낄 수 있는 수치심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이중성을 인지조차 못하는 이에겐 감히 허락되지 않는다.

 

박완서 작가는 각종 학원의 아크릴 간판의 밀림 사이에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는 간판이 필요하다는, 아직까지도 유효한 말을 이 책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물질의 풍요로움을 좇다 공허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 부끄러움이라는 그 작은 신호를 놓치지 말고 따라가라고. '세상은 부끄러움에 대해 가르쳐야 하고 우리는 부끄러움을 배워야 한다.'

 

 

[박예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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