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방황으로부터 [사람]

글 입력 2023.02.05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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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그간 잘 지냈나요?

 

저는 그럭저럭, 흘러가는 대로 살았어요. 아주 오랜만에 외출해보니 날이 많이 따스해져 있더군요. 발목까지 내려오는 롱패딩이 후덥지근하게 느껴질 정도예요. 봄이 오고 있어요. 겨울이 녹아가요. 제법 기쁜 일이에요.


얼마 전엔 마치 정해진 이치에 따라 움직이듯, 온기를 쫓아 활발해진 사람들 틈 사이에서 아주 오래도록 길을 걸었어요. 그렇다고 멀리 떠나거나 새로운 것을 본 건 아니에요. 그저 늘 돌아다니던 동네를 한 바퀴,두바퀴, 눈에 익은 곳을 수차례 지나치며 거리의 부랑아처럼 걷고 또 걸었어요. 생각이 많아지더군요. 


어느새 발길을 끊은 동네 서점과 브라우니가 포근하던 작은 카페, 창가 자리에 기대어 쉬던 테라스를 지나쳤어요. 늘 진귀한 것처럼 지니고 다니던 작은 노트와 몇 가지 펜도 수중에 없어 걷는 것 외엔 딱히 할 일이 없더군요. 풀밭에 겨우 한 줌 남은 염화칼슘과 눈덩이를 사각사각 밟다가 낡은 벤치에 기대어 몸을 늘어뜨렸죠.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데, 무척 힘겨운 느낌을 아나요?


사람들은 어떻게 결정하고 살아가는 걸까요. 무엇을 보고 어떤 미래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걸까요?

 

물론, 알아요. 그들 중엔 무모한 사람들도 있을 테고, 제겐 없는 지혜가 있을지도 모르고, 또 누군가에겐 무척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죠. 귀에 못이 박이게 들어온 성인의 의무 중 하나임을 잘 알아요. 그럼에도 아무것도 모르겠다면, 절 다그치실 건가요?


힘주어 눌러쓴 글자를 두어번 덧그리다 잠시 펜을 놓았다. 펜을 지지하는 손가락 마디가 아렸다. 힘이 들어가 뼈대가 도드라진 손마디를 주무르며, 다시 생각의 흐름 속으로 침잠했다. 


일전에 제게 이렇게 물으셨죠.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중에 무엇을 쫓으며 살 것이냐고. 무엇을 포기할 수 있고 감내할 수 있느냐고. 그게 제 질문의 해답이 될 것이라 확언하셨죠.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다며 밝게 웃던 해맑은 목소리와 달리, 저는 지난 1년간 그대로였어요.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죠. 그에 반해 조금 더 조급해졌고 다이어리 속 X자는 늘어만 갔어요. 지난한 하루였죠. 


사실 그때 제가 뭐라 답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아요. 분명한 것은, 생각하며 살고 싶다고 답했었나요?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가 솟아나고, 생각의 즐거움에 흠뻑 빠져있던 시기였으니까요. 지금은 뻣뻣해진 머릿속에 진로니, 취업이니 같은 막막한 단어밖에 떠올릴 수 없지만요. 매 순간 한 가지 주제만을 생각해야 한다는 건 제법 가혹한 일인 것 같아요. 아름다움과 떨림을 쫓아 한껏 부풀어 올랐던 세계가 차분히 가라앉아버리니까요. 음음,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할게요. 그럼,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지난 1년간 마음을 이상하게 만들었던 건 ‘평균 이상을 원한다면 평범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어요. 아주 맞는 말이었죠. 평균 이상을 꿈꾸면서 평범하게, 남들 하는 대로 사는 건 어리석은 짓이니까요. 그런데 말이에요. 인간은 삶을 살아갈수록 더 지혜로워진다고 하더니, 저는 왜 지난해에 비해 모르는 것들만 훌쩍 몸집을 불린 걸까요. 비범함과 무모함을 구분하지 못하고 신중함과 어리석음을 분간하지 못하니 말이에요. 하고 싶은 것과 해야만 하는 것의 기로에서, 제가 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대체 무엇부터 해야 하는 걸까요? 


1년이 대체 무엇이길래, 그 짧은 사이에 상황은 아주 이상하게 돌아갔어요. 하고 싶은 일은 열기를 잃고 해야만 하는 것은 지나치게 무거워졌죠. 그럼에도 아무것도 보장된 것이 없어요. 그야말로 혼란의 시대라 말할 수 있겠군요. 예로부터 혼란의 시대엔 위기와 기회가 동시에 찾아온다고 하더니, 제 앞엔 위기뿐이라니. 역시 비범함은 쉬이 갖출 수 없는 자격임이 분명해요. 


이제 슬슬 몇장 남지 않은 편지지가 동이 나기 시작하니, 어설픈 투정은 이만 줄일게요. 다만 지금 가장 투명한 진심은,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후회하고 싶지 않다는 거에요. 인생에 아주 중대한 결정을 내릴 거거든요. 어쩌면 숫자에 얽힌 삶이 서글퍼질 수도, 새로운 일탈이 될 수도 있겠죠. 그럼에도, 나 하나는 제가 책임져야 하는 거잖아요? 


이제 정말 글을 줄여야겠어요. 지금도 편지지 한 귀퉁이에 힘겹게 글자를 욱여넣고 있거든요. 제 방황을 함께 읽어줘서 고마워요. 사막 속에서 어설픈 방향 추라도 찾게 되면 다시 찾아올게요.

 

그럼, 친애를 담아 안녕.

 

당신의 독자로부터.

 


[최현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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