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침착한 일상과 작별하기 - 한강 작별 [도서]

글 입력 2022.12.1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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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처한 일이 생겼다.”는 것으로 시작하는 한강의 소설 <작별>은 첫 문장부터 환상 소설이라고 밝힌다.

 

그녀는 지나치게 침착하다. 잠깐 벤치에 앉아 잠들었다가 일어났더니 눈사람이 되었는데 그녀는 병원을 찾지도 경찰에 신고하지도 않는다. 어떤 조치도 없이 현수를 기다린다. 사람들 반응은 놀라지만, 경악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눈사람이 되었는데 오히려 평소와는 다른 평온을 느낀다. <변신>의 그레고르가 끔찍한 벌레가 되어도 출근을 걱정했던 것처럼 그녀는 눈사람이 되어도 현수를 만나기 위해 정류장으로 간다. 게다가 함께 바깥에서 있으려고 하는 현수를 배려한다. 그리고 집에 있을 아들을 걱정하며 그를 보러 간다. 지독할 만큼 평온한 일상에서 변한 거라곤 그녀가 눈사람이 된 것뿐이다. 금방이라도 녹을 수 있는 존재가 된 그녀에게 신비가 일상으로 잔인하게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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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침착하다. 자주 “주변의 어떤 사물이라고 상상”해서였을까. 회사에 권고사직을 당하고도 그녀는 슬퍼하기보다는 당장 앞으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 생존을 고민한다. 실업급여, 적금, 예금 등을 빠르게 계산하고 늘 최악의 가능성을 대비했다. 심지어 유언장까지 미리 써 냉장고에 붙여둘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 노후는 여전히 미결이었다. 이 때문에 잠깐 사이에 눈사람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변화가 부정적이지만은 않아 보였다. 아들을 보고 눈사람이 되었다고 알린 후 늑골이 무너지고 옆구리가 부스러지지만,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고통이 없다면 두려움도 없지.”라고 중얼거리며 부모에게 전화를 걸지만, 같은 슬픔을 공유하는 동생에게는 전화를 걸지는 못했다. 어떤 말을 해야 할까. 그녀는 눈사람이 되어서야 인간 같아졌다. 연인과 만나 입을 맞추고, 아들을 껴안고 끝말잇기를 하고, 부모와 통화했다. “어디까지가 한계인지.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가 인간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눈사람이 되어서야 그녀는 하고 싶은 말들을, 진심을 떠올렸다. 미처 토해내지는 못했지만, 다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눈사람인 채로 더 단단해질 냉기가 필요했다.

 

그녀의 연인인 현수는 가난하지만, 생존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다. 당장 급여를 벌기 위해 그만둔 회사를 여러 번 찾아갔다. 살아가는 데 의의를 둔 존재는 과연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녀 역시 현수를 나무늘보의 발톱으로 비유했다. 매우 날카롭게 휘어 있지만, 누군가를 공격하는 대신 나뭇가지에 매달려 버티는 데에만 사용되는 발톱 같은 남자다. 한참 연하에 가난한 현수에게 그녀는 편하게 걱정을 털어놓지도, 그에게 의지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가느다란 실을 느꼈다. 현수는 이를 사랑이라 말했지만, 나는 이것이 마치 같은 처지에 놓인 짐승 무리처럼 보였다. 그녀가 눈사람이 된 후 그와의 실이 끊어진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했다.

 

반면에 아들 윤은 그녀를 마지막까지 사람으로 남을 수 있는 존재의 이유로 읽혔다. 언젠가 다시 사람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 속에서도 그녀는 왼쪽 가슴의 물이 마음에 걸려 연인을 뒤로하고 아들을 보기 위해 집으로 향했다. 윤은 현수와는 달리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했는지, 어떻게 지금 몸을 유지할 수 있을지 현실적으로 물었다. 그리고 그들은 끝말잇기를 한다. 끝말잇기에서 아들은 처음으로 ‘행복’을, 그녀는 처음으로 ‘심장’을 말했다. 그녀는 끝말잇기를 하며 울고 아들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이제 괜찮다는 듯 행동했다. 그는 사물이 아닌, 누군가의 엄마로 행복과 심장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릴 수 있게 하는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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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분명 사람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지만, 눈으로 만든 사람이니까. 눈을 굴려 몸통을 만들고 나뭇가지를 꽂아 팔을 만들고 단추로 눈을 붙이고 날카로운 것으로 코를 붙여도 눈은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작별>은 반대로 사람이 눈이 되었다. 이걸 눈사람이라고 불러야 할지 혼란스럽지만 <작별>은 분명하게도 그녀를 눈사람이라고 부른다. 종종 자기를 사물로 생각하긴 했지만, 생각하고, 걷고, 말할 수 있고 애인과 손을 잡을 수 있는데 과연 그녀는 사람이 아닐까. 눈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녀는 사람이었다. 사람이라고 증명하려면 가슴 부근의 물을 알려야 하는데 그게 가슴까지 얼고 있는 건지 가슴만은 따뜻한 건지 알 리가 없다.

 

소설에서는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가 인간인 건지”라는 서술로 인간을 묻는다. 과연 사랑만이 인간을 정의할까. 톨스토이도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사랑을 말했지만, 나는 그것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조건 없는 사랑도 가능한 짐승이 있으니까. <작별>을 읽으면서 내가 인간과 비인간을 나누는 기준으로 떠오른 건 ‘미래’이었다.

 

그녀가 해결하지 못한 건 노후 문제였다. 언제나 예상할 수 없는 미래를 대비했다. 눈사람이 된 건 그녀의 삶에서 마지막을 떠올리게 한 새로운 사건이다. 처음 눈사람이 되었을 때“이게 혹시 마지막인가.”라고 마지막을 막연하게 추측했다면 소설 후반부에는 “그냥 끝이야.”와“이제 다 틀렸어.”로 구체적으로 변한다. 또 부모에게 전화해서 당부의 말을 전한다. 아버지의 건강을 걱정하고 할머니를 언급하며 부모가 오래 살 수 있을 거라 희망한다.

 

현수 역시 미래를 묻는다. 가난한 그는 그녀가 준 돈으로 홀로 끼니를 해결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잔돈을 그녀에게 주고 싶다. 그녀가 다음에 현수가 돈 내면 된다고 말하지만, “다음에, 언제요?”라고 묻는다. 어쩌면 그녀가 오늘을 넘기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앞으로도 계속 관계가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읽혔다. 현수는 그녀와의 미래를 계속 상상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버스가 불편하고 교통비조차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난해도 그녀를 만났을 것이다. 마지막 입맞춤으로 다시는 보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아들은 구체적으로 그녀에게 미래를 묻는다. 언제 되돌아올 수 있는지, 눈사람이 된 몸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를 묻다가 다시 외출한 그녀에게 전화해서“언제 다시 올 건데?”라고 묻는다. 그 물음에는 엄마와 함께인 미래를 담고 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아들은 엄마가 있는 곳으로 갈 거라 말한다.

 

그녀는 결국 소멸할 것을 알았다. 홀가분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분했다. 마지막까지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생각을 계속 이어갔다. 그때 아들의 전화로 사랑한다고 속삭이면서 후회를 덜어냈다. 드디어 진짜 미래이자 마지막이 왔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녀는 정수리부터 녹아버려 어느새 앞도 보이지 않고 들을 수도 없다. 그러나 결국 발가락의 경계조차 없어진 그녀를 여전히 인간으로 부르고 싶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사력을 다해 뒤돌아보려고 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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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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