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베개를 붙잡고 헤엄치는 법 [사람]

익사하지 않는 걸로. 동지 다음은 크리스마스니까
글 입력 2022.12.24 04:14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이틀 전 우리 집 저녁상의 모습은 어딘가 미묘하게 어색했다.

 

밥그릇과 국그릇, 국이 든 냄비, 깔끔하게 반찬을 덜어둔 그릇 몇 개 그리고 소스 종지와 수저 세트까지, 나무랄 데 없이 잘 정렬된 네모난 식탁 한 쪽에 쭈뼛쭈뼛 겉돌고 있는 게 하나 있었다. 팥죽.

 

한순간에 색을 잃어 더 이상 낙엽이 밟히지 않는 거리, 하얗게 김이 서려 밖이 전혀 보이지 않는 버스 창문. 아직 적응할 것들이 한참 남았는데 어느새 한겨울, 어느새 '동지'란다.

 


000068360016.jpg

 

 

일 년 중 밤이 제일 길다는 동지다.

 

'밤이 길다'. 그 의미가 아주 단순하면서 복잡하다. 누군가는 기대 혹은 희망으로 가득 차 밤이 길어지길 소원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무력감 혹은 걱정으로 가득 차 눈을 감고 수없이 많은 양을 세어도 지나가지 않는 긴긴밤을 질책한다.

 

나의 경우는 또 달랐다. 아무 생각도 하기 싫거나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 나의 동지였다. 어느 날은 오후 6시면 밤이 찾아왔고, 어떤 날은 서너 시면 베개를 붙잡고 밤을 찾기도 했다.

 

이미 놓쳐버린 인연들에 대한 불안감, 어쩌면 자책. 이미 두고 온 것들에 대한 미련, 그러지 않겠다는 의지와의 충돌. 지난 시절 속의 나를 간직하는 사람이 점점 보이지 않고, 내가 가진 기억조차 남의 것인듯 생경한 날이면 눈을 감고, 잠을 부르고, 밤을 늘렸다.

 

우울이라는 건 정말 얄궂게도 가장 들키고 싶으면서도 가장 숨기고 싶은 감정이다. 페이스북이든, 인스타그램이든 어느 곳에나 밤만큼 까만 감정들이 보란듯이 전시되어 있는 이유다. 그럴 듯해 보이지만 여전히 불규칙한 형태로 말이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는 그 어떤 색도, 새카만 색의 물건도 구분하기 어렵다. 밤은 그런 면에서 까만 것들을 전시하기에는 최고의 갤러리다. 그게 내가 밤에게 기대하는 유일한 목적이자 내가 밤을 이용하고 있다는 자기 위로의 부실한 명분이었다.

 

 

000068360011.jpg

 

 

연인 간의 관계에서도 최악은 상대에게 끌려다니는 것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게, 밤은 심해와 같다. 까만 줄에 묶여 질질질. 동아줄이려나, 하고 끌어안은 것들과 유토피아려나, 하고 떠난 꿈나라는 눈을 떠보면 모두 하얀 거품이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익사하지 않기로 했다.

 

밤을 향해 괜히 턱을 치켜 들어 본다. 주변의 변화가 새삼스럽다. 발치에 떨어진 낙엽이 새삼스레 예뻤고 하얗게 김이 서린 버스 창문에는 앞에 앉은 아이가 그려둔 조그만 그림들이 보였다. 인스타그램에는 첫눈 구경에 잔뜩 들뜬 사람들이 가득했다. 둥실둥실, 몸이 물 위로 떠 오른다.

 

물기를 닦아내며 내가 갈 수 있는 곳들을 떠올린다. 저 멀리 내가 아직 모르는 땅의 작은 공원들부터, 집 앞 새로 생긴 카페의 조용한 구석 자리까지. 아담한 내 방, 앉으면 카세트 플레이어와 음반들, 책, 좋아하는 것들로 둘러싸이는 바로 그 자리도. 떠날 곳이 썩 많았다.

 

곁에 남은 특별한 관계들을 떠올린다. 한강 앞에 몇 시간이고 궁둥이를 붙이고 함께 앉아 흘러가는 물의 질감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말도 안 되게 즉흥적인 이야기를 마구 내뱉어도 "그래? 그래!"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와인 한 잔, 소맥 한 잔에 혼자 취해 큰 소리로 애정을 고백해도 "나도"라는 답장을 받을 수 있었고, 작은 단어 하나에 따라붙는 이야기들이 넘실거리기도 했다.

 

각자의 이유로 각자의 애틋함을 가지고 이어온 인연들이 있었다. 끌어안을 것들도 참 많았다.

 


snowman-on-beach-g4185ee986_640.jpg

 

 

일 년 중 가장 밤이 길다는 동지가 바로 이틀 전이었다. 그러나 오늘이 어떤 날인가. 바로 크리스마스이브. 베개를 붙잡고도 헤엄치는 방법을 배운 사람들은 자유롭게 유영하며 까만 밤을 꾸민다. 아마 오늘 밤은 일 년 중 가장 빛나는 밤이 될 것이다.

 

 

[이건하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9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