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일상 속의 불안, "레이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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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스릴러를 주제로 한 이야기는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공간은 공포, 스릴러 장르의 단골 소재다. 영화 “숨바꼭질”은 내 집에 남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조성해 이야기를 진행하고 영화 “여고괴담”은 누구나 한 번쯤 거쳐 가는 학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소재로 해 몰입도를 높인다. 이렇듯 공포, 스릴러 장르에서 친근한 장소를 소재로 한 이야기가 많은 이유는 현실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관객이 극에 이입하기 쉽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릴러물의 정석에 가까운 소설이 있다. “레이디스”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영화 "캐롤"의 원작 소설 "소금의 값"을 작성한 작가이며 '20세기 에드거 앨런 포', '서스펜스의 대가', '불안의 시인', '매혹적인 어둠의 소설가' 등 다양한 수식어로 대변되었다. 소설 "레이디스"는 그의 초기 심리소설 열여섯 편을 묶은 단편집으로 이러한 수식어가 붙은 이유를 단번에 설명한다.
열여섯 편의 소설은 하나같이 줄거리를 나열하면 시큰둥해질 법한, 소소하고 현실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진행된다. 담담한 문체는 일상을 아주 구체적이고 정밀하게 묘사해 현실성을 높인다. 평범한 하루에서 삐져 나오는 각 인물의 속마음이나 불안하게 연출되는 타인의 시선을 읽다 보면 마치 내가 그 상황에 부닥친 듯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로 지친 택시 운전기사가 시골에서 여유를 되찾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최고로 멋진 아침”의 일상은 어린아이와의 우정을 의심하고 여유를 즐기는 주인공을 무능력한 인간으로 여기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에 점점 무너진다. 성홍열에 걸린 이웃집 아이들과 할머니를 간호하는 이야기에 불과한 “루이자를 위한 초인종”에서는 끝나지 않는 병간호에 자기 삶을 잃고 예민해지는 과정을 그린다. “미스 저스트와 초록색 체육복”은 누구나 공감할 법한, 공개 수업에 앞서 강박적으로 학생을 몰아세우는 교사와 그 노력이 헛수고가 된 상황을 이야기한다. 문화권에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겪어봤을 상황으로 긴장감을 조성하니 집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새로운 시작을 향한 공포
그토록 근사했던 건 오로지 어린이였다는 것, 부모님이 손을 흔들며 꼭 붙잡으라고 소리쳐주었다는 것, 짧은 원피스 차림으로 목마에 걸터앉아 있었다는 것, 그리고 한 시간도 못 되어 잠자리에 들고, 까치발을 해도 침대 밑에 발이 닿지 않고, 내일이면 일어나 자동차 뒷좌석에서 “우리 오늘 밤에는 어디서 자요, 아빠?”라고 물었기 때문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모두, 다 영원히 사라지고 없었다. 그저 눈물을 흘리기엔 너무 엄청난 비극이다.
레이디스, 모빌 항구에 배들이 들어오면, 114p
도저히 믿을 수 없었지만, 그녀는 온 감각으로 깨달았다. 이날 아침과 이 도시는 그녀에게 너무나 커다란 일부로 자리 잡을 것이고, 그녀가 알고 있던 다른 아침들과 다른 도시는 낯설어지고 역시 두려움의 색채를 띠게 될 거라는 사실을.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덜컥 내려앉는 심장으로 이 방 이 순간의 감각을 정확하게 다시 포착할 것이고, 이 기억은 번번이 떠오를 것이다.
레이디스, 공 튕기기 세계 챔피언, 128p
앞서 짧게 설명한 “공 튕기기 세계 챔피언”은 뉴욕으로 이사 간 가족의 이야기다. 아버지는 고향에서 자주 먹던 스위트 밀크가 없어 뉴욕 사람과 소통에 차질을 겪는가 하면 지나치게 단호한 경비원은 가스 연결을 요구하는 어머니 본인을 진상처럼 느끼게 만든다. 딸 엘스퍼스는 겨우 말을 건 또래 친구에게 무시당하고 말투가 왜 그렇냐는 핀잔을 듣는다. 가족이 살아가던 기존 세계가 무너지고 범접하기 힘든, 냉혹한 새 세계가 다가온다. 두렵다. 엘스퍼스는 이러한 공포를 느끼면서도 딸이 새 친구를 사귀었다는 부모님의 기대에 반하지 않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낯선 곳으로 이사를 가본 사람, 하다못해 새 학기에 아무도 모르는 친구들 사이에서 어색한 기분을 느껴보기만 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고독이다.
“엄청나게 친절한 남자”라는 짧은 소설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아이 샬럿이 낯선 남자를 만나며 시작한다. 낯선 남자는 드라이브를 제안하고 샬럿은 그를 기다린다. 차에 탄 순간 샬럿은 지루한 일상이 그리워 도망치고 싶다. “최고로 멋진 아침” 역시 새로운 세상에 대한 환상을 품었으나 어느 순간 완벽에 가까운 마을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한없이 낯선 도시에 불안감을 느끼는 남자를 표현한다. 독립하고자 하는 거미 이야기를 그린 “시드니 이야기”의 시드니도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려는 희망을 품지만 좌절한다. 호기롭게 모험을 시작하지만 맛없는 사냥감은 구하기도 힘들어 매일 굶고 빗자루로 추측되는 커다란 초록색 벌레가 거미줄을 거둬낸다. 결국 거미 시드니는 다시 살던 곳으로 돌아간다.
새롭게 시작하는 일, 이전에 경험해보지 않은 일을 하기 전에는 설레면서도 불안하다. 하이스미스는 다소 따분하지만, 한없이 평화로운 세계가 붕괴할 때의 공포를 잘 알고 있다. 굉장히 보편적이어서 누구에게나 쉽게 와 닿는다. 되고 항상 꿈꿨던 미래가 막상 현실이 되자 상상했던 것과 너무나 다르고 끔찍하거나 지루하게 여겼던 과거는 되돌아가고 싶은 공간이 되던 기억. 그래서 꼭 인물이 겪는 상황이 나의 일처럼 근접하게 다가온다.
인물이 아니라 독자가 극 중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어질 정도로 현실의 감각을 자극하는 감정 묘사는 잠시 책을 덮게 만든다. 누군가 뒤에서 쫓아오는 사람도 없고 괴한이 칼을 들고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지도 않는데 읽는 내내 심장이 불안하게 뛴다. 그만 볼까 싶지만 자꾸만 생각나는 매력적인 이야기는 결국 다시 책을 펼치게 한다.
거절 당한 관계의 고독
그는 숨을 참았고, 잠시 그 여자의 찌르는 듯한 외로움과 위태로운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파닥거리는 그녀의 마지막 희망이 입술에 닿는 듯했다. 말 한마디만으로도 그 여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었다. 아니, 두센베리는 그럴 수 있었다.
레이디스, 하늘로 막 비상하려는 새들, 319p
그때 별안간, 하이페리온 호텔이 아니며 정황이 아주 다르다는 걸 깨닫는 한순간, 고독이 캄캄한 숲처럼 그를 에워싸고 무서운 속도로 솟구쳐 자라났다. 묘한 건 서둘러 그녀를 쫓아갈 생각이, 어떻게든 그녀를 찾고 싶다는 충동이 전혀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약함, 외로움, 부족함, 실패와 추락 말고 그가 무엇을 줄 수 있을까? 그는 그를 둘러싼 외로움의 핵이었고, 그 핵심에는 부적절성이 있었다. 심지어 그는 사랑에도 부적절했다.
레이디스 ,마법의 문, 359p
“마법의 문”은 여닫이문이 있는 술집에서 공허하게 시간을 보내던 힐데브란트가 매혹적인 여성을 만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힐데브란트는 그녀를 만난 후 외로움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지만 여성은 약속을 앞두고 사라진다.
“하늘로 막 비상하려는 새들”은 우연히 다시 만난 여인에게 절절한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보낸 돈의 이야기다. 돈은 매일 오지 않는 답장을 기다리고, 그 과정에서 이웃 두센베리라는 사람의 편지를 훔쳐 읽게 된다. 두센베리를 향한 절절한 사랑이 적힌 편지를 읽은 돈은 자신의 상황과 겹쳐 보며 두센베리인 척 편지를 보내 약속 시간과 장소까지 잡는다. 돈이 사랑을 고백한 이는 한참 뒤에야 거절의 편지를 보내고 두센베리를 사랑한 사람은 약속 장소에 오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
“모빌 항구에 배들이 들어오면”에서 제럴딘은 반복해서 배신당한다. 멋지고 훌륭하게 보이던 해군은 그와 약혼한 후 다신 돌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팔아버린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를 지옥에서 꺼내준 남편 클라크는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증오한다. 의처증이 있고 폭력까지 서슴지 않던 클라크를 피해 도망간 제럴딘은 고등학교 때 만난 친구로 오해한 경찰에게 잡히면서 자유를 빼앗긴다.
앞서 언급한 “공 튕기기 세계 챔피언”이나 “최고로 멋진 마을” 역시 사람들에게 배척받으며 오는 공포를 같이 그린다. 낯선 공간이 고독해지는 가장 큰 이유는 관계에 섞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관계 속에서 거부당하거나 배신당한 사람들의 아픔과 서로를 외면하는 상황이 주가 되는 소설은 공포스럽진 않지만 공허하다. 군중 속의 고독, 내가 감정을 주는 만큼 돌려받지 못할 때의 서글픔, 모두가 날 좋지 않게 보고 있는 듯한 불안감. 끝이 좋지 않을 것을 알면서 읽는 위태로운 관계를 볼 때면 어쩐지 심장 한 켠이 서늘하다. 특별한 것도 없는 관계를 보여주는 이야기는 특별하지 않기에 쓸쓸하고 외롭다.
인간 내면의 광기
지켜보던 루실은 어느새 뭔가 진짜 참사가 일어나길 바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엘로이즈에게 위험하고 끔찍한 일이 일어나서 자신이 대신 몸을 던져 공격자를 막아낼 수 있다면, 그래서 엄청난 용기와 헌신을 입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는 총알이나 칼을 맞고 중상을 입겠지만 습격하는 사람을 때려눕혀 쫓아버릴 것이다. 그러면 크리스천슨 부부는 그녀를 사랑하게 될 테고 영원히 데리고 있어 주겠지. 지금 어떤 미친 사람이 느닷없이 나타나 그들을 덮친다면, 입이 험하고 눈에 핏발이 선 누군가가 나타난다면, 한순간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레이디스, 영웅, 254p
인간 내면의 광기를 가장 잘 드러내는 단편은 “영웅”이다. 루실은 정신병원에서 돌아가신 어머니처럼 자신도 광기에 쌓일까 봐 두려워한다. 의사의 조언대로 도시에서 벗어나 긴장도 풀고 어머니도 잊기 위해 정원이 아름다운 집에 가정교사로 취직한다. 루실은 다친 아이들을 구해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을 극단적인 순간이 오길 기다린다. 루실의 소망과 다르게 평화로운 일상이 흘러가고 불안해진 루실은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애프터 부인, 그대의 푸르른 산비탈에 둘러싸여”에서는 운동에 도취한 남편의 상담을 받으러 온 아내, 애프터 부인 이야기다. 남편은 의사를 전혀 신뢰하지 못하고 약간의 의처증도 있는 듯 보인다. 의사는 애프터 부인이 가정폭력을 당했겠다 여기고 그가 사는 호텔에 방문한다. 호텔에서 그는 의외의 상황을 맞이하고 새 환자를 맞이한다.
“달팽이 연구자”에서는 달팽이 연구에 심취한 중년이 우글거리는 달팽이 떼에 파묻히는 이야기를 그린다. “프림로즈는 분홍색이야”에선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그린 회색 그림에 채색하기 위해 강박적으로 색을 찾아다니는 플레밍 씨가 마구를 실제와 다른 색을 칠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 하나로 정성 들여 채색한 그림을 부끄러워한다. 그는 채색한 그림을 남들에게 보여줄 때마다 지레 찔린 듯 먼저 핑계를 댄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나열한 소설의 주인공은 모두 하나에 심취해 다른 것을 놓친다. 어떤 인물은 심취를 넘어 강박에 가까운 수준까지 간다. 대부분은 무언가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설명이 되어 있어도 공감하기 힘든 경우가 대다수다. 새로운 상황에 부닥친 인물을 묘사할 때 공감대를 형성해 몰입하게 했다면, 타인의 강박과 집착에 대한 이야기는 반대로 인물에게 벽을 세운다. 책 속 인물이 새로운 상황 그 자체가 된다. 그들의 강박적인 행동을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을 맞닥뜨렸을 때처럼 불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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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스미스의 소설은 안개가 낀 고요한 호수를 보는 것 같다. 언뜻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일상이지만 그 속에서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 겁내는 것을 포착해 섬세하게 펼쳐둔다. 아직 어떠한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는데 무서운 예감이 가시질 않는다. 어두운 호숫가를 걸을 때 귀신이 나올까 봐 겁내듯이. 실제로 모습을 드러낸 사건은 특별히 이상한 곳이 없지만 찝찝하고 불길하다.
열여섯 편의 단편 소설은 공포와 스릴러란 일상에 밀접할수록 더욱 효과를 발휘한다는 걸 똑똑히 보여주는 교과서 같다. 징그러우면서도 매혹적이고 두려우면서도 호기심이 동해 끝까지 읽기 전까진 결코 멈출 수가 없다. 가장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불안을 자극한다.
“레이디스”는 작품 한편 한편이 인상적이다. 가장 매력적인 작품을 고르라고 하면 선뜻 말할 수 없지만, 제목을 보고 내용과 인상을 말하라고 하면 술술 떠들어댈 정도다. 각기 각색의 이야기와 이야기를 모아두었다.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색다른 것 없어서 색다른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이 우울하고 불길한 책 속에 흠뻑 빠져들 것이다. 스릴러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가장 교과서적인 작품으로 느껴질 것이고, 관심 없는 사람에겐 스릴러라는 장르의 매력을 맛보여 줄 테니까.
[김혜원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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