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숨으로 하는 말 - '침묵'

글 입력 2022.12.11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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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멈추고 입을 다무는 순간을 생각한다.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순간과 상황이 있다. 때로는 침묵이 유일한 선택지다.

 

하지만 무언가를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에 대한 감정이나 생각, 기억이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할 말을 하지 못하면 몸이 아픈 이유는 침묵 뒤에 말로는 다 번역되지 않는 엄청난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침묵은 고요한 상태가 아니라 터져 나가기 일보 직전의 상태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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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아트컴퍼니의 공연 <침묵>이 2016년 초연 이후 6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랐다. 루마니아 출신의 독일 작가 헤르타 뮐러의 소설 『숨그네』를 모티프로 한 작품이다. 99아트컴퍼니를 창단한 장혜림 안무가가 안무를 맡았으며 전 회차 음성해설이 있는 베어리프리 공연으로 진행되었다.


『숨그네』는 제2차 세계대전 우크라이나의 강제노동수용소에 수감되었던 레오의 이야기를 시적인 언어로 그린 소설이다. 개인이 아닌 번호로 불리는 사람들, 이들을 끝없이 괴롭히는 ‘굶주림의 천사’, 그 안에서 하루하루 삶을 지속하는 한 사람.

 

초연이 주인공 레오에게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번 공연은 레오만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서 수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계속 반복되어 온 억압과 폭력, 그리고 그것이 초래한 침묵에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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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KI


 

<침묵>은 60분간 진행된다. 피아노를 맡은 강다니엘 연주자가 무대 왼쪽에 놓인 피아노의 상판을 열며 공연의 시작을 알린다. 연주자는 의식을 행하듯 위판, 상판, 하판, 건반 뚜껑까지 피아노의 장치를 하나씩 연다.

 

소리를 내는 데 필요한 요소만 남은 피아노는 뼈대만 남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 피아노의 모습은 지금부터 무용을 하려는 이들과 닮았다. 관객은 일상에서 우리를 포장하고 숨기는 말을 걷어내고, 몸으로만 이야기하는 공연의 세계로 돌입한다.


하얀 바닥, 어두운 조명 아래에 7명의 무용수가 있다. 한 명의 무용수가 비정형적으로 움직이는 가운데 나머지 무용수는 군무를 추는 듯 일사불란하다. 무용수들은 단체로 움직이며 계속해서 ‘예스’라는 단어만을 끝없이 중얼거린다.

 

아무런 음악 없이 ‘예스’라는 단어와 무용수의 한쪽 옷자락이 다른 쪽 옷자락과 스치는 소리, 숨소리, 발소리, 무릎이 바닥에 쿵쿵 닿는 소리만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단체로 절도 있게 추는 무용은 위압적이며, 홀로 움직이는 무용수의 움직임과 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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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KI

 

 

눈에 띄는 것은 이들이 팔을 사용하지 않을 때는 두 팔을 엑스자로 교차한 자세로 서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자세는 자유롭지 않은 상태로 보이며, 직관적으로 죄수를 연상시킨다.

 

한번 죄수라고 인식하면 이들의 군무 역시 자유를 억압당하고 보이지 않는 규칙의 지배를 받는 죄수들의 움직임으로 보인다. 이들의 움직임은 절도 있고 딱딱하다. 간혹 군무를 추다가 한 무용수가 돌출되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하지만 나머지 무용수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숨그네』를 읽었다면 작품 속에 나오는 수용소의 풍경을 연상하겠지만 사실 이런 상황은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누구든 처할 수 있다. 시간이 되면 똑같은 침대에서 눈을 뜨고 일하고 잠들고. 이들이 낼 수 있는 소리는 ‘예스’뿐. 좀 더 공연이 진행되면 무용수들은 일렬로 서서 한두 명씩 무대를 차례로 가로지른다.

 

분명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데도 누군가에게 끌려다니는 것 같다. 무용수들은 무의미하게 무대의 이쪽에서 저쪽 끝을 반복해서 왕복한다. 오직 생존하기 위해서 행하는 움직임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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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KI

 

 

공연의 큰 전환점은 ‘예스’와 숨소리만 내던 무용수들이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찾아온다.

 

한 사람에게서 시작된 작은 소리의 노랫가락은 점차 다른 사람에게도 퍼지며 곧 합창의 형태가 된다. 노래에서는 초반에는 느껴지지 않던 새로운 의지가 읽힌다. 차마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자유와 희망, 바람이 거기에 담겨 있다. 무용수들의 표정은 간절하고 무언가를 갈망한다.


노래를 부르며 무용수들의 동작도 한결 부드러워진다. 이전의 동작이 직선의 나열이었다면 여기서부터는 좀 더 다양한 선을 그린다. 무용수들은 서로 얽힌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끌어당기는 등 신체적으로도 부딪힘이 늘어난다.

 

무용수들은 비로소 상대방의 존재를 인식한다. 타인은 나의 움직임을 구속하는 짐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가 더 다양한 움직임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조력자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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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KI

 

 

공연의 막바지, 또 한 번 큰 전환점이 있다. 한 무용수가 양손에 잉크를 받아 걸어오는 순간이다. 손가락 사이로 잉크가 무용수가 가는 길을 따라 줄줄 흐르는데,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보라색으로 보이는 액체는 피를 연상시킨다.

 

처음 잉크를 손에 담아 온 무용수는 같은 잉크가 가득 든 대야를 무용수들이 모여 있는 곳에 쏟고, 모든 이들은 이제 같은 처지가 된다. 이들의 움직일 때마다 하얀 바닥에는 잉크의 흔적이 남는다. 개인적으로는 모든 무용수가 피를 연상시키는 액체를 뒤집어쓰고 무용을 이어나가는 공연의 끝 몇 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60분을 가득 채우는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몸짓은 직관적이고 아름다운 또 하나의 언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침묵은 말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 상태이기에, 몸짓이라는 언어로만 통역된다는 것 역시 깨닫는다. 침묵을 구구절절 설명해본들, 한 차례의 움직임이 담을 수 있는 만큼도 전하지 못할 것이다.

 

침묵으로 대신해야 했던 이야기, 오직 숨으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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