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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나는 슬퍼할 줄 모르는 네가 너무 슬프다 - 연극 '사월의 사원' [공연]

‘나’와 ‘너’를 넘어 ‘우리’의 <사월의 사원>으로

by 김소형 에디터
2022.12.11 15:02

 

 

“[사월의 사원]은 집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중략) 작가는 이 집을 공동체로 가능하게 하는 간절한 기도가 울릴 수 있는 사원이 되게 합니다. 세속의 집으로부터 숭고한 공간인 사원으로 뛰어오르는 힘 속에서 우리는 [사월의 사원]의 새로운 언어를 확인합니다.”

 

- 2021 벽산문화제 심사평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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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에 따로 객석이 마련되어 있다는 사전 정보를 입수했지만 정해진 통로로만 무대 위로 입장 하라는 안내를 받았을 때 약간 당황스러운 마음이었다. 연극이 끝난 뒤, 이 또한 감독의 철저한 연출이었다는 생각에 괜스레 고양된 기분이었다.


‘집’이라는 공간을 연출한 무대에서 관객은 그곳에 초대받은 손님이었다. 아마 계단을 넘어서 무대 위로 입장하는 순간 관객들은 현관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온 것일 테다.

 

다만 통상적인 손님과는 달리 우리는 환대 받는 손님은 아니었다. 주제 자체가 무겁기도 했지만 공연을 보는 내내 환영 받지 못하는 입장에서 불편한 감정을 느껴야 했으니까.


평소 연극의 묘미는 배우와 관객이 함께 호흡하는 데 있다는 입장이다. 스크린이나 브라운관에는 없는, 현장 안에서의 직접적인 교감이 연극이라는 장르가 지닌 매력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본 극에서는 함께 소통한다기 보다는 확실한 벽을 느꼈다. 무려 무대 위로 초대받은 손님으로 위치가 격상되었지만, 철저히 지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원래의 무대와 관객석의 거리보다 물리적으로 가까운데도 심리적으로는 훨씬 멀리 있었다.


서로 먼 거리에 있는 것은 배우와 관객 사이만은 아니다. ‘영혜’의 집에 사는 모든 구성원들은 같은 공간을 공유하면서도 서로 분절되어 있다. 마치 그들의 닫힌 마음을 형상화 하듯, 무대 위 각 모퉁이에 위치한 닫힌 문들이 그들 사이의 단절을 나타낸다.


무대에서 가장 밝은 공간이자 메인 배경인 거실이 텅 비워질 때마다 ‘영혜의 집’이 결국 ‘그들의 집’도 ‘우리의 집’도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물리적으로 가장 멀리 있는 캄보디아의 ‘메싸’와 한국의 ‘지수’가 가장 가까이 있다는 모순적인 감정이 들었다.


사실 가장 불편한 것은 이러한 단절이 ‘영혜의 집’이라는 특정한 공간 만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요즘 들어 팬데믹의 장기화로 가장 많이 변화한 것이 ‘개인주의’ 문화라는 생각을 한다. 물론 그 전에도 사회는 점차 개인화되는 중이었지만, 전염병이 시작된 근 몇 년 사이 그 속도가 훨씬 가속화된 느낌이다.


물리적인 거리는 멀어져도 마음은 멀어지지 말지는 다짐이 무색하게 우리는 점점 더 단절되고 있지는 않은가. 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음에도 철저히 분리된 느낌. 


붐비는 지하철 안 각자의 세계에 빠져 있는 사람들, 한 집에 살지만 각자의 방 안에만 있는 가족들, 어느 순간 대화가 사라져 버린 거실의 풍경. 


어쩌면 우리는 개인주의를 빌미로 서로에게 무관심해지는 중인 것만 같다.

 

 


사월의 사원과 우리 가족의 집


 

외로운 영혜는 자신처럼 버려진 사람들을 주워 본인의 집을 채워간다. 하지만 한 공간을 공유하는 그들은 결코 가족이 되지 못했고, 영혜의 집 역시 모두의 집으로 나아갈 수는 없었다. 


우리의 이상과는 달리,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끼리 뭉쳐 그들 만의 세상을 구축할 수 있다는 건 굉장히 낙관적인 환상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타인의 상처에 잘 융화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만, 오히려 더 예민해지고 경계심을 세우게 될 때가 더 많다. 


그 사람들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다. 상처가 제대로 아물지 않는 이상 고통에 완전히 무디어질 수도, 나아가 누군가를 포용할 여유를 가지기도 어렵다는 걸 쉽게 망각할 뿐이다.


연극을 관람하고 나서 아주 본질적인 의문에 휩싸였다. ‘가족’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영혜의 집에 살던 구성원들은 왜 가족이 되지 못했을까? 한참의 고민 끝에 영혜의 집이 너무 자유롭기 때문이라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솔직히 좋은 지 나쁜 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족’의 속성에는 ‘강제력’이라는 분명한 성질이 있다. 사회가 다원화 되면서 가족의 형태도 다양해졌지만, 정도에 차이는 있어도 가족이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제약을 감수해야 한다는 건 변치 않는다. 


가족이란 결국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결국 서로를 ‘책임’지는 것이기에, 완전히 간섭하지 않는 가족이란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혈연, 제도, 법적 구속력, 암묵적인 합의 등에 의해서 서로의 삶의 일부를 공유하고 일상에 침투하게 되면서 마침내 가족이 된다. 서로를 공유함으로써 우리는 ‘나’와 ‘너’의 경계를 넘어 ‘우리’의 기쁨, 슬픔, 분노, 즐거움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영혜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 서로를 간섭하려 하지도, 간섭 당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가끔은 타인의 상처에 다가가보려 하면서도 상대가 나의 상처에 접근하는 것은 철저히 차단한다. 사실은 본인 조차도 자신의 상처를 제대로 마주할 용기가 없기에, 누군가와 함께 아파할 수 있는 기회 마저도 쉽게 놓쳐버리고 만다. 


스스로의 아픔에 고립되는 그들을 그저 안타깝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은, 치료의 시작인 소독을 위해 상처 위에 소독약을 바르는 것이 얼마나 따가운 지를 알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집이 그들의 집, 나아가 우리의 집이 되기를 바라는 영혜 역시도 세상에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기꺼이 자신의 집을 내어주는 다정함은 있지만, 그들의 상처에 진심으로 개입하거나 삶에 간섭하려 들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영혜의 집의 완전한 구성원은 아니지만 본질적으로 이어져 있는, 메싸와 그녀가 향하는 사원이 명확한 주제의식을 드러내게 된다. 이는 곧 이 연극의 제목이 ‘사월의 사원’이 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극을 따라가면서 메싸라는 이름이 캄보디아어로 ‘사월’을 의미한다는 것과, 사고로 목숨을 잃은 그녀의 아들 ‘수린’이 있는 곳이 사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월의 사원>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 인물들에게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저마다의 상처가 있는데, 메싸에게는 그것이 ‘수린’인 것이다.


결국은 그녀를 찾아 캄보디아로 향한 지수와 함께 자신의 상처를 대면하려 사원의 계단을 오르는 메싸로부터, 우리는 영혜의 집에 사는 다른 구성원들 역시 스스로의 아픔을 딛는 것을 시작으로 함께 슬픔을 공유하며 진정한 가족이 되어 가리라는 것을 상상하게 된다.


지수의 편지로 막을 내리는 극의 클라이맥스에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집’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 공간을 점유하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영혜의 집은 진정한 ‘집’이 아니었다. 단순히 머물러 있다고 해서 그 공간이 집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집은 ‘머무는’ 곳이 아니라 ‘돌아갈’ 곳이라는 생각을 한다. 바쁜 일상의 지친 내가 하루의 끝에 향하는 곳,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곳. 오랜 방황에 목적지를 상실하더라도 언제나 도착지로 남아주는 그 곳. 그것이 바로 진정한 ‘집’이 아닐까? 


지수와 해영, 그리고 아마 현주와 기정까지, 모두가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영혜의 집은 이제 ‘그들의 집’이자 그 아픔에 다가가고자 하는 ‘우리의 집’이 된 것 같다. 그리고 집에는 결국 가족이 있기에, 함께 슬퍼할 수 있는 우리는 이미 가족이 된 것이 아닐까.

 

 


슬퍼할 줄 아는 우리가 되길


 

 슬픔의 감정적 속성은 부정에 가깝지만, 그것의 기능적인 역할은 긍정적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기쁨’보다도 더 강한 힘을 가진 것이 ‘슬픔’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슬픔은 사람을 더 사람 답게 만들며, 우리를 한 ‘개인’을 넘어 ‘사회’로 존재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같은 슬픔을 공유하면서 더 끈끈해 진다는 말이다.


극장에서 나오면서 나는 우리 사회를 생각하며 슬퍼졌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는 함께 ‘슬퍼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회보다 더 슬픈 사회가 어디 있을까. 슬플 일이 적어지는 것이라면 좋겠지만, 슬퍼할 줄 모르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을 감히 꺼내 본다.


왜 ‘캄보디아’였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아주 낯선 이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친밀한 국가도 아니기 때문이다. 굳이 구분하자면 정서적으로 그리 가깝지 않은 국가. 한국어로 전달하는 대신 현지 언어와 자막을 사용하는 것도 관람객에 입장에서는 불편했다.


무대를 지나 영혜의 집을 벗어나는 순간까지도 여전히 멀리 있던 그 나라가, 공연장을 빠져나오는 순간 조금은 가까워졌다. 메싸와 지수가 분주히 채워 놓던 장난감들로 장식된 계단을 올라 문밖을 나서는 순간, 내가 걸어온 곳이 바로 사월의 사원이었음을 깨달았다.


언어도, 환경도, 역사도 다르지만, 결국 나와 같은 사람들이 사는 곳. 세상 그 어느 곳에서든 인간을 인간 답게 만드는 것들에는 차이가 없다는 걸. 함께 공감하고 같이 슬퍼할 수 있다면 사월의 사원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걸.


멀게만 느껴지던 캄보디아도 결국 내가 살아가는 세상의 일부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캄보디아보다 물리적으로는 가깝지만 심리적으로는 더 멀 수도 있는 곳들이 떠올랐다. 공방에서 울분에 찬 분노를 터뜨린 영혜 역시 이런 기분이었을까.


자신이 사는 마을에서 일어난 이웃의 비극을 그저 가십으로 소비하는 공방 회원들에게서 환멸과 함께 씁쓸함을 느꼈다. 마냥 극 중의 이야기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은 사실 우리 사회를 그대로 비추는 거울 같았다. 우리는 점점 타인의 슬픔에 너무 무디어지는 것은 아닐까.


개인주의 자체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아를 탐색하고 진솔한 나를 발견하는 것은 한 사람의 삶을 더 건강하게 만드니까. 하지만 공동체 일원으로서의 최소한의 연대와 인간미를 잃은 개인주의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회의가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나의 자유가 중요한 만큼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나의 행복한 삶이 소중한 만큼 나의 이웃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 타인의 의견에 쉽게 휩쓸려서는 안 되지만, 나의 고유한 개성 역시 공동체 안에서 빛이 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잊고 사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함께 울어주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때로는 기쁨보다 우리를 더욱 끈끈하게 만드는 슬픔의 힘을 잊지 않아야 한다. 나의 사월의 사원을 통해 우리의 사월의 사원으로 나아가야 한다. 


나는 우리를 자꾸만 단절시키는 극단적 개인주의, 아니 개인주의를 표방한 이기주의가 미워진다. 같은 나라, 같은 마을, 어쩌면 언젠가는 같은 집에 살아가는 우리의 거리가 캄보디아의 사월의 사원보다도 더 멀어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비관적인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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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당신을 잊어갈수록 나는 더욱 당신을 붙들어 놓으려 합니다.”


사실 일주일 무렵의 시간이 지나 대사가 완벽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바로 적어 두지 않은 내가 조금 원망스럽지만 그 본질은 남아있겠지 변명 해본다.


우리 사회에도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이 있다. 연극을 다 관람하고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점점 더 마음이 무거워졌던 건 고작 한 달 여가 지난 비극이 세상에서, 부끄럽게 내 기억에서도 잊혀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슬픔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상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누군가만의 비극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걸. 우리 사회가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하는 과제라는 걸. 그들의 사월의 사원이 아닌 우리의 사월의 사원이 되기를 바란다.


세상이 점점 차가워져도 눈물의 뜨거움은 잊지 않기를. 사회가 점차 각박해져도 슬픔에 인색해지지는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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