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덕질의 끝판왕은 창작자가 되는 것이라던데 : 제1회 인사이트 데이

글 입력 2022.12.07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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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에서 유는 탄생할 수 없다던가. 세상 모든 발전은 작은 아이디어에서 시작했고, 그 아이디어는 대개 불편과 아쉬움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무언가를 만들고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엔 공통점이 있다. 어떤 것에 지극한 관심을 두며 즐겁게 소비하다가 문득 부족함을 느낀 것이다. 관점이 비슷한 사람이 하나 둘 모여 사람들이 되고, 그 집단은 하나의 정체성을 표방하여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 크기와 정도는 제각각일지라도.


기존 문학 비평이 지닌 위계질서는 비단 등단 과정에 그치지 않는다. 비평가와 독자 사이의 거리감도 상당하다. 종종 소설의 '해설'을 읽어본 이들이라면 어느 정도 공감하리라고 생각한다. 살아생전 처음 보는 단어의 등장은 물론이거니와 마치 번역 소설을 읽는 것 같은 이질감. 한국어인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대목도 만났다. 모든 해설이 다 이런 건 아니다. 충격적으로 낯선 해설들이 생각보다 쉽게 보인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그래서일까. 이번 인사이트 데이의 강연자 아니, 강연 '팀'이라고 해야 하나. 아카이빙을 기반으로 콘텐츠를 제작 중인 엠디랩프레스(M.D.LAB.PRESS)의 박준기 에디터 소개말이 인상 깊었다. 글을 읽고 쓰는 모임에서 출발하여 전문가와 비전문가 사이의 오묘한 곳에 그들만의 자리를 만들어 가는 현재까지. 그들이 기획하여 발행 중인 시리즈는 크게 두 갈래다. 하나의 색깔을 테마로 하여 그 색의 재료를 활용한 비건 레시피북 'Vege Colors', 그리고 한 명의 작가를 덕질하듯 깊고 넓게 아카이빙하는 '글리프'. 주제가 하나라는 점에선 맥락을 같이 하지만, 깊이 들어갈수록 다양하게 꺼낼 이야기가 많아지므로 이번 이야기는 후자에 집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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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랩프레스 인스타그램 피드 중 일부 (@m.d.lab.press)

 

 

김다희 에디터와 박준기 에디터의 말 중에서 가장 많이 나온 키워드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면 '덕질'이었던 것 같다. 덕질. 가볍디 가벼운 인상의 단어였다. 특히 일방적인 소비에 가까운 이미지였다고 할 수 있겠다. 고로 사용하는 것도, 듣는 것도 썩 좋아하지 않는 표현이었는데 선입견이 많이 깨졌다. 덕질이라고 해서 소비의 영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나에게도 사례가 있었다. 김연경 선수 경기를 왕창 보다가 배구를 직접 배우러 다녔고, 드라마 <킬링 이브>에 푹 빠져 첫 시즌을 수차례 본 덕에 눈 감고 들어도 어떤 장면인지 상상으로 그려낼 수 있었다.


이렇듯 무언가를 진득이 좋아해서 깊이 파고드는 건 생각보다 흔한 일이다. 다만 차이는 '한때', 그러니까 지속 가능성에 달렸다. 두 에디터가 자주 언급한 또 다른 키워드였던 것 같다. 엠디랩프레스와 비슷한 시기에 창간한 출판 잡지들 중 지금까지 남아있는 동료들이 그리 많지 않다고 했다. 좋아하는 마음이 있기에 시작하기는 쉽지만, 그 이후를 잇기 위해서는 또 다른 동력이 필요한 셈이다.


특히 아카이빙은 끝없는 자료 검색의 연속 아니던가. 김다희 에디터가 말하기를, 징크스인지 뭔지 모를 게 있다고 했다. 바로 글리프의 새 호를 발간하기 직전에 이번 호의 주인공인 작가가 신작을 낸다고. 그럼 디깅과 디자인 편집과 수정 등 모든 과정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해야 할 테다. 본업 있는 사람들이 부업에 쏟는 열정과 에너지가 이 정도라니. 지난 일요일이 꽤 추웠어서 실내 공간엔 냉기가 맴돌았는데, 그들이 간혹 눈을 반짝이며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줄 때엔 놀라웠다. 이렇게까지 진심일 수가 있나 싶어서.


1호 정세랑부터 6호 김초엽까지, 덕질을 떼어놓고서 꾸준하게 이어가는 힘으로 박준기 에디터는 '마감'을 뽑았다. 아마 모두가 공감하지 않았을까. 마감 기한이 생겨야 역순으로 타임라인을 정하며 일을 처리하는 방식을. 하지만 앞서 말한 징크스처럼 변수가 도사리는 바람에 마감이 코앞에 다가와서는 모든 게 하나로 섞여버리긴 한다. 그렇기에 발행이 끝난 후 팀원들과 어떤 시간을 보내는지가 더 중요한 것 같다. 회포를 풀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잠시 각자의 시간을 가지며 에너지를, 새로운 호기심을 채운 후 스리슬쩍 다시 모이고. 그 유동적인 움직임이 보지 않아도 눈으로 그려져서 왠지 모를 만족감을 느꼈다.


비슷한 문제의식과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사람의 취향은 가지각색이거늘, 모여서 대화하고 탐색하고 조율하는 일련의 과정이 꽤 아름다워 보여서 말이다. 대학생 때부터 이어진 연으로 각자의 장점을 살려 하나의 결과물을 낸다는 것. 과정은 힘들어도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해볼 법하겠다고 생각했다.


김다희 에디터는 마감에 덧붙여 '피드백'을 언급했다. 글리프는 텀블벅을 통해 공개된 후 몇몇 독립 서점에서 만날 수 있는데, 해당 호를 받은 독자들의 반응이 다음을 기약하게 만드는 듯하다. 글리프는 한 호가 탄생할 때마다 한 작가를 덕질하고, 글리프를 덕질하는 독자들도 이제는 꽤 있을 것 같아서 이 또한 재밌는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것을 나누면 이런 나비효과가 생기는 건가, 싶기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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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splash

 

 

한 사람의 족적을 한 곳에 빼곡히 담는 건 그 자체로 힘든 일이지만, 이를 가공하는 과정은 더 까다롭다. 읽는 이가 없으면 모은 의미가 사라진다. 소비자로서 즐기고 싶다면 자신만을 위한 일로 충분하지만 창작자는 다르다. '달라야 한다'가 더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소비자 없는 창작물은 자기만족에 그치니까.


그래서 글리프는 에디터, 그러니까 편집자의 범위가 단순 교정/교열에 그치지 않는다. 텍스트와 디자인 사이의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초기 단계부터 협업한다. 어떻게 하면 더 쉽게, 더 효과적으로 읽힐 수 있을지 고민하며. 이건 두 에디터가 보여준 글리프의 지난 호들 중 일부 페이지에서 확연히 느껴졌다. 'SF'라는 다소 낯선 세계관을 중심 소재로 잡는 김초엽 작가, 주요 사건의 전개가 날짜/연도 별로 세세한 정유정 작가, 실제로 발생한 사건/사고를 자연스럽게 소설 속에 녹이는 김금희 작가 등. 소설들을 읽으며 느꼈던 포인트를 정확히 녹인 잡지 구성이 어찌나 인상적이던지. '기록'이라는 말이 품은 딱딱한 텍스트의 느낌보다 '아카이빙'이라는 행위가 잘 어울리는 출판 스튜디오가 맞구나 싶었다.


본업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을 오래 유지하려면 발행할 콘텐츠에 대한 애정은 밑바탕에 깔고, 서로 배려하되 가끔은 뼈아픈 조언과 지적이 필요한 것 같다. 내부에서 해결할 수 없을 땐 외부의 도움을 기꺼이 빌리려는 태도 또한 중요하다고 느꼈고 말이다. 무언가를 열성적으로 만들어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서인가. 나도 무언가를 꾸리고 싶다는 생각이 내내 들었다. 앞으로 나는 무엇을 좋아하며 사람들과 어떤 걸 나누게 될까. 다섯 명의 에디터가 만드는 아카이빙을 기대하며, 그리고 나의 앞으로도 상상해보며 글을 마친다.


 

[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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