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떠돌고 부유하며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삶의 여정 - 책 '이국에서'

언젠가 정착지에 이르기 위해 그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 이승우의 장편 소설 <이국에서>.
글 입력 2022.11.2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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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을 수상하며 한국 문학의 거장으로 자리 잡은 이승우가 신작 장편 소설 <이국에서>로 돌아왔다. 이 소설은 자국을 반강제적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한 인물이 떠나온 이국에서도 소속이 없는 외부인으로 규정되며 공동체의 억압과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인간 존재의 정체성은 어떻게 규정되는가. 가족, 관계, 사회, 공동체와 완전히 분리된 인간을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국에서>는 자신이 내부인으로 존재하는 줄 알았던 공동체와 단절된 후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홀로 부유하는 인간이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을 관조하고 고민하게 만든다.


정치 캠프에서 일하던 황선호가 시장의 재선을 위해 뇌물 수수 혐의를 모두 덮어쓰고 사라져야 할 처지에 처하며 이야기는 시작한다. 정치 비리로 인해 그는 이 세상에 아예 태어나지 않았던 사람처럼 완전히 없어져야 하는 존재로 전락했다.


평생 자신을 채워오는 삶을 살았던 황선호에게는 아무 과제 없이 텅 빈 채로 이국을 향해 떠나야 하는 상황이 혼란스럽기만 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없는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삶이 그에게는 당혹스럽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자국에서 자신이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주어진 과제를 처리하듯 바삐 일하며 자신을 가득 채우기만 했다.


관성적으로 일하며 쫓기듯 살아오긴 했지만 자국에서 그는 본인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었다. 수많은 기회들, 문서들, 과제들, 사건들, 그리고 돈 가운데 그는 늘 존재했다. 황선호의 일과 소속된 공동체가 그를 규정해왔으므로 그는 적어도 자신이 그 공동체의 내부인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는 한순간 존재를 부정당한다. 모든 걸 떠안고 떠나줄 수 있냐는 부탁에 혼란스러웠지만, 그는 자신이 사라질지 사라지지 않을지를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는 달리, 그에게는 처음부터 선택을 할 자유가 없었다. 선택의 기회를 부여받지 않은 채 강압적인 지시에 의해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내부인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외부인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정체성의 혼란은 그렇게 찾아왔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생존을 위한 집단의식을 가진다. 소속감과 공동체 의식은 인간이 본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인간에게 가족, 정착지, 일, 목표 모두 버리고 홀로 떠나서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죽음과 다름없는 듯하다. 강압적이고 이기적이고 부패한 공동체에 의해 힘없는 개인은 정체성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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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떠나온 보보민주공화국의 상황도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그곳에서도 그는 소속감의 부재를 경험할 수밖에 없는 외부인이었다. 최근 쿠데타 집권 군부의 독재와 대대적인 개혁 정책이 시행되며 외부인의 입국이 금지됐고, 국내에 있는 외부인에게는 속히 출국하라는 명령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이렇게 전쟁, 테러, 차별, 재해 등으로 자국을 떠나온 난민과 외지인들을 받아주는 곳은 사라져 간다.


강압적인 외부 환경과 끊임없는 갈등 및 폭력으로 인해 연약한 개인들은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게 됐다. 모두가 자신이 살던 곳에 정착하기를 원하지만 대부분이 그렇지 못하고, 잠시 머무르던 이국에서도 억압당하며 그저 부유하는 삶을 살아간다. 과거든, 현재든, 자국이든, 이국이든 생존을 위해 아등바등하는 개인을 공동체는 때때로 거부하고 억압하고 외면한다.


외부인에 대한 규정이 강화되며 황선호 역시 그들과 같은 처지에 처한다. 하지만 떠돌다 우연히 만난 ‘친구들의 집’이라는 존재가 이국에서의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다. 운명처럼 이끌려 우연히 들어간 펍 덕분에 펍의 주인 필, 그의 친구 쟝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인 김경호라는 이의 삶에 닿게 되며 고립됐던 황선호는 이국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어간다.


‘친구들의 집’은 과거 존재하던 공동체였다. 사회의 폭력, 가난, 그리고 불의에 지친 이들이 피난처를 찾아 들어왔다가 머무르게 되며 만들어진 자연발생적 공동체였다. 친구들의 집에는 리더가 없었고 모두가 서로를 친구라고 부르며 동등하게 생활했다. 바깥에서 억압당하던 이들은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며 그저 명상과 공부와 운동과 노동을 하며 공생했다. 김경호와 쟝 역시 이 공동체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외부의 탄압을 피할 수는 없었다. 어떤 무질서나 혼란도 문제 삼지 않았던 친구들의 집은 자연스럽지 않고 인위적인 위계질서와 통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있는 대로 존재했다. 외부는 그러한 그들의 자연스러움을 난잡함으로 매도했고, 결국 그들이 풍속을 해친다는 여론과 선동이 발발하며 그들은 와해됐다.


김경호는 강제적 와해 과정에서 있었던 폭력과 살인을 기록으로 남기려 했다. 공동체의 억압에 저항하기 위해 사진과 글로 처참한 현실을 남기려 시도했지만 그 역시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사실을 모두 알게 된 황선호는 김경호가 편지를 통해 자신을 이곳으로 불렀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이 보보로 오게 된 것은 그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황선호는 어머니의 편지를 보고 진작에 발신인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그를 외면하려고 했던 것 같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부정하고 덮으려고 했다.


하지만 운명처럼 이끌리게 된 그곳에서 김경호의 흔적을 만나고 그의 삶과 가치를 전해 들으며 아버지의 존재를 받아들이게 된다. 자신이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와 이곳에서의 삶을 인정한다. 그렇게 그는 이국에서 가족의 존재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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쟝은 친구들의 집을 이어, 오랫동안 살아온 공간을 떠났으나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 계속해서 공동체를 영위한다. 모두가 잠시 머무는 통로 같은 곳이었지만, 열악한 환경에서도 공동체는 이상하리만치 평안했다. 각자가 잘할 수 있는 노동을 하고, 거동이 불편한 이들을 먼저 챙기고, 갖고 있는 먹거리의 크기가 작든 크든 모두와 함께 나누며 서로를 배려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황선호는 이국에서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난 것이다. 강압 정치와 폭력이 만연한 이국에서도 그들은 노동과 관계를 통해 정체성을 찾고, 변화를 일구려고 했다. 나름의 공동체를 만들고, 통로처럼 거쳐가던 곳을 정착지로 만들 결심을 했다. 종국에는 다시 외부의 탄압을 받을 것이고 이국에서 온전한 정착의 꿈을 이루지는 못하겠지만, 다 함께 오늘을 축복하자고 말하며 자유롭게 살아가고자 한다.


“나는 앞으로도 여기 있는 사람이기를 원해요. 친구들의 친구가 되기를 원해요.” 두통과 불면에 시달리던 황선호는 공동체에 진정으로 속하고 나서야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에 빠진다. 구속과 속박에서 벗어난 삶의 자유를 꿈꾸는 그들을 만나 소속감과 해방감을 느낀 것이다. 그렇게 그는 비로소 자국이 아닌 이국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원하는 일, 그리고 정체성을 자각했다.


<이국에서>는 황선호와 등장인물들의 삶을 통해 어딘가에 잠시 머무르고, 부유하고, 떠돌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준다. 소속된 자국에서마저 온전히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없고, 정착할 수 없고, 외부에 의해 억압받게 되는 인간의 내부를 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황선호와 친구들처럼 노동, 관계, 가족, 사회, 집단 등을 통해 자신을 규정하며 살아가야만 한다. 떠돌고 부유하면서도 어딘가에서 소속감을 느끼고, 타인과 함께 사유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헤매며 언젠가는 정착지에 이르기 위해 그렇게 오늘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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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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