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어느 순간, 당신을 불러오는 닮음 - 연극 '거울'

글 입력 2022.11.22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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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동이라는 낯선 동네를 방문한 이유는 하나의 공연 때문이었다. 움직임극을 전문으로 하는 극단 정:지가 모녀 관계를 다루고 연출한 움직임극 <거울>을 보기 위해서였다. 비는 추적추적 내렸고 편의점에서 급히 산 반투명한 우산의 안팎으로 짧아진 겨울 해가 풀어주는 어둠이 차고 있었다. 낯선 길을 오르며 생각했다. 오늘 뭐 하나 얻어갈 수 있을까. 넓게는 인간 가족사 안의 모녀 관계에 대해서, 좁게는 엄마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 쓸 만한 통찰 뭐 하나 얻어갈 수 있을까. 그런 사심 섞인 기대.

 

극장을 발견하기까지 긴 오르막길을 올랐던 것과 달리 이번엔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 극장 안에 들어가니 연극이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이미 두 명의 여성 배우들이 음악에 맞춰, 그리고 그 음악에 의해 촉발된 감정에 따라 움직임을 선보이고 있었다. 극장 스태프의 지시대로 몰입한 그들 옆을 지나쳐가며 소극장에서 느낄 수 있는 날것의 긴장감과 흥미를 내 몸 옆선에 묻혔다. 불이 꺼지고 이제 나도 다른 관객들과 함께 배우들이 그려내는 세계에 몰입할 차례가 되었다.

 

 

거울.jpg

 

 

짧은 머리의 해정이 옷걸이에서 옷을 고르다 다 입기도 전에 바닥에 옷을 집어던진다. 어쩌다 한 번이 아니라 한 벌, 두 벌, 세 벌.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분명하다. 뭔가 화가 난 게 분명하다. 해정의 뒤에서 해정이 던진 옷을 줍고 개켜 놓은 또 다른 여성은 긴 머리칼을 하나로 묶었다. 걱정스러운 듯, 의아한 듯 “해정아”하고 해정의 이름을 부르지만 그 소리는 해정에게 닿지 않는 것 같다. 이름을 부르는 태도 등에서 그녀가 해정의 엄마 순영임이 느껴진다. 해정이 마침내 옷 하나를 몸에 꿰어입을 때 불이 꺼진다.

 

장면이 전환되어 이번엔 해정과 동우의 소개팅이 펼쳐지고 있다. 원래도 기분이 별로인 날인데 소개팅에 마땅한 옷까지 없어서 모든 게 다 싫어졌었나. 아니면 소개팅 자체에 나오기가 싫었나. 그리 보기에는 마땅치 않은 것이, 해정은 소개팅에 영 관심이 없어 보이지도 않고 상대에게 싫은 감정을 느끼는 것 같지도 않다. 일곱 시, 해정이 갑자기 동우의 손목시계를 보더니 눈에 안약을 넣는다. “어디 아프세요?” 동우의 물음에 해정은 내용과 걸맞지 않게 밝고 해맑은 목소리로 답한다. “스테로이드 안약이에요. 평생 달고 살아야 한대요. 유전이라.” 해정이 웃는 대신 동우의 얼굴에서는 어색하던 소개팅 미소가 슬슬 사라진다.

 

그렇다. 해정은 면역계 질환, 포도막염을 앓고 있다. 잘못하면 실명에도 이를 수 있는 그런 병이다. 해정의 심란함과 분노는 여기서 기인했으리라. 크게 건강을 해치는 습관이 없던 해정으로서는 유전적 소인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녀의 엄마 순영이 포도막염을 앓고 있었다.

 

병원에서의 총소리가 기억에 남는다. 의사가 사무적으로 검진 결과를 말하기 시작할 때 총소리가 나고 해정은 그 보이지 않는 총알에 맞아 쓰러진다. 의학적 정보를 의사가 평이한 어조로 줄줄 읊어줄 때 해정은 온몸을 벌벌 떨면서 그것을 듣고 있다. 검은 눈동자는 당장이라도 뒤로 넘어가 사람이 곧 쓰러질 것만 같다. 그 정도의 공포인 것이다. 움직임극의 특성이 여기서 두드러졌다. 아마 현실에서는 손이 두려움으로 파르르 떨려도 그 손을 맞잡고 감추려 할 텐데, 극단 정:지의 움직임극에서는 공포심을 몸의 움직임으로 여과 없이 드러냈다. 보는 사람까지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였다.

 

공포는 막 물을 끓인 주전자 뚜껑의 열감과 움직임처럼 남아 해정을 뒤흔들었다. 순영의 외피를 한 공포의 덩어리가 귀신처럼, 좀비처럼 기어와 의사의 진단을 반복해 들려줬다. 점점 해정에게 다가온 그 두려운 존재는 해정의 발목을 잡고, 다리를 잡고 올라와 온몸을 집어삼킬 듯 보였다. 네, 네, 하며 덜덜 떨던 해정은 괴기스러운 분위기의 음악이 끝남과 함께 쓰러지고 만다.

 

이후 무대는 해정의 회사가 되었다. 팀장이 심심한 듯 길고 긴 딴짓을 하고 있다. 해정이 다가와 휴가를 요청한다. 팀장이 사유를 묻자 그녀의 속마음이 또 그녀의 온몸이 되어 격하게 움직인다. 저 눈이 멀지도 모른대요. 그런데 전 아직 보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너무 많아요. 그러니까 뭐라도 해야겠어요. 해정이 거의 울부짖는다. 그러다 그런데 팀장님에게 이렇게 말씀드릴 수는 없다며 다시 현실의 사회인 해정으로 돌아와 그럴듯한 사유를 댄다. 엄마가 아프셔서 옆에 좀 같이 있어 드려야 할 것 같아요.

 

사실 해정은 엄마에게 갈 계획이 없었으나 무턱대고 낸 휴가에 별다른 여행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날따라 친구와의 만남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 중얼거린다. “이러면 꼭 가야 할 것 같잖아?” 드디어 엄마 순영의 존재가 본격적으로 이 연극 안에 등장한다.

 

순영은 생각보다 밝고 평범한 중년 여성이다. 친구와 차를 마시다가 갑자기 걸려온 딸의 전화에 그래도 밥 한 끼 해 먹이려고 집으로 돌아간다. 친구와의 약속 장소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한정된 무대 공간 안에서 약속 장소와 집 사이의 거리감마저 느껴지는, 조금은 익살스러운 분위기 안에서 순영의 밝은 성격마저 보여주는 걸음걸이.

 

아빠의 죽음 후 2년 만에 만난 모녀는 멋쩍은 대화를 이어나가다 한순간에 익숙한 갈등으로 언성을 높인다. 순영이 버리지 않는 오래된 스테로이드 약들 때문이다. 쓰지도 않는 약을 모아두는 순영과 이것 좀 버리라는 해정. 어쩜 엄마와 딸이란 사람들은 하는 일도 이렇게나 비슷한지. 낯설지 않은 상황에 마음속으로나마 탄식했다.

 

두 번째 갈등은 해정의 터져 나온 목소리 그 자체로 촉발되었다. 역시 식사 시간은 가족의 면면이 잘 드러나는 때다. 일단 밥 먹자고 앉으면 물리적으로 대면할 수밖에 없으니까. 막상 엄마를 대면했을 때는 속에 담긴 말을 꺼내지 않으려던 해정이지만 그래도 그나마 길게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이런 말이 나온다. “엄마, 내가 좋아하는 색은 뭔지 알아? 엄마, 내 생일은 알아?” 어이없어하는 순영에게 해정은 더 무거운 얘기를 꺼낸다. 학창시절 고민을 얘기했을 때 별일 아닌 걸로 치부하던 엄마의 모습, 남자친구와 헤어져 힘들어하던 해정을 위로해주지 않던 엄마의 모습, 회사 상사 때문에 죽고 싶다고 했을 때 외면하던 엄마의 모습. 그리고 마침내 엄마를 탓한다. 남편의 죽음 이후 해정의 엄마로 있기보다 남편의 아내로 존재했던 순영을. 든든한 보호자로 존재하기보다는 해정의 어릴 적부터 해정이 잘 지켜보아야 했던, 보호해야 하는 존재였던 순영을. “엄마로서 존재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했다고!”

 

분노를 표출하던 해정은 엄마, 나 너무 힘들다며, 나 좀 안아달라며 울기 시작한다. 엄마에게 원망의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지만 사실 아직 그녀는 자신에게 포도막염이 유전되었노라고 일언반구 꺼내지도 못했다.

 

해정의 외침에 순영도 순간 화가 났다가, 딸이 우는 모습에 어렵사리 속마음을 꺼낸다. (부작용이 있을 수 있는) 약을 먹으면 몸이 약해질 것 같았어. 세상에 이제 너랑 나 둘 뿐인데 나까지 약해지면 어떡하니. 그래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불안해서 차마 약을 버리지 못한 거라고. 해정은 엄마의 도닥임을 받으며 생각한다. ‘이게 엄마의 진심일까? 하지만, 이러면 내가 헷갈리잖아?’ 그리고 말한다. “엄마, 나 이제 갈게.”

 

자기 인생의 불안과 희로애락을 나름대로 벅차게 ‘자기 혼자’ 잘 끌어안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누수되는 고통과 불안은 어린 딸에게 자기도 모르게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순영의 마음은 어떨까. 아마 가슴 찢어지는 일일 거다. 해정이 눈물을 삼키고 집에 가겠노라고 일어날 때 순간 여기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으리라 본다. 다만 자기도 모른 채로 직감은 했겠지. 답 없는 답이 무엇이건 간에 엄마를 더 몰아붙이지 말자고, 마음이 누그러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누그러짐으로 엄마에 대한 해묵은 설움까지 다 녹여낼 수는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으니 일어난 게 아닐까.

 

갑자기 집에 가겠다는 딸에 순영은 배웅하겠노라고 해정을 따라 버스 정류장까지 같이 걷는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해정은 순영이 해정의 것인 줄 알고 가져온 손거울이 엄마 선물이라고 말한다. 관심을 가져달라는, 연약하고 힘든 나도 온전히 알아주고 안아달라는 내면 아이의 바람은 다소 차갑고 매끈한, 그러나 압도적이지 않은 규모의 메시지가 되어 순영의 손안으로 들어간다. 내가 나를 볼 때 엄마를 보고 마는 것처럼, 내가 나인 채로 살아도 엄마를 닮고 원치 않는 것까지 물려받는 것처럼, 작은 손거울로 엄마 얼굴의 곳곳을 비추며 엄마 안의 나를 찾아달라고. 엄마도 자기 얼굴을 볼 때 나를 보아달라고. 그래도 당신을 압도하는 커다란 전신 거울이 아니라, 작은 손거울로. 엄마가 수긍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라도, 어떤 의미로는 그래서 더 세밀하게 나를 헤아려달라고.

 

 

[크기변환]연극 엔딩.jpg

손거울을 보고 있는 해정

 

 

그럼에도 엔딩 장면에 손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건 해정 뿐이라 나는 마음이 조금 쓸쓸해졌다. 이 연극 자체가 모녀관계를 비추는 거울이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삶에 대해 크고 작은 힌트를 얻고자 이것저것 작품을 보는데 이런 작품을 볼 때면 사람살이 다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그것이 바로 삶의 힌트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묻어두다 간혹 마음이 터져버리는 딸과 벅찬 인생 잘 감당했다고 여겼던 엄마의 놀란 마음. 서로 다른 억울함. 딸에게는 항상 내면 에 깔려 있던 생각이고 분노인데 엄마에게는 ‘아니, 얘가 갑자기’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 갑작스러움이라는 것. 그 감정의 격차와 시차가 밖에서 보니 조금 더 잘 보였다.

 

<거울>에서 두드러지는 소재는 포도막염이라는 특정한 유전질환이었으나 깊게 보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족 간의 유전이다. 이슬아 작가의 저작 중에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던가. 나는 화날 때 엄마 얼굴이 되곤 했다. 정확히 말하면 입가 근육의 움직임이. (엄마와 나는 울 때는 다르게 우는 것 같다) 당연히 나는 그 표정을 좋아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표정을 직접 짓고 나면 내가 하필 엄마랑 싸우고 있을 때에 엄마의 표정을, 그것도 싫어하는 표정 중 하나를 그대로 갖고 있다는 게 너무 싫어졌다. 엄마가 이 닮음을 미처 못 봤기를 바랐지만 눈치를 챘는지는 잘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알아버렸다. 내 입술이 만들고 있는 모양새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엄마 덕분에. 엄마의 화난 얼굴을 비추는 내 눈 덕분에.

 

그런가 하면 지인 한 명은 자기가 주변 사람을 챙기는 태도가 자기 엄마의 그것과 꼭 닮았다고 했다. 그녀 목소리에는 싫음까지는 아니어도 약간 질렸다는 감정이 가볍게 묻어 있었다. 이런 것도 닮나, 이런 식의 감정이. 그러니까, 유전적으로 형상이 닮고, 가족력이 있기도 하고, 감정을 표출하는 방식도 닮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닮고…. 한마디로 별 걸 다 닮을 수 있는 것이다. 자식은 부모로부터 나왔으니까.

 

좋든 싫든 닮았구나, 하고 나를 돌아보게 하고 나와 엄마라는 존재를 돌아보게 하는 것. 멀리 떨어져 엄마 생각을 잘 안 하고 있다가도 순식간에 나는 엄마 딸이구나 하고 생각을 끌어오는 것. 그날그날의 상태에 따라 엄마와 관련된 온갖 애증을 한꺼번에 끌어오는 것. 그 닮음을 우리 눈이 비추고, 거울이 비춘다. 이 현상은 누군가가 세상을 비추어 만들어 낸 작품이라는 거울에 고스란히 비쳐 우리로 하여금 또 생각에 빠지게 만든다.

 

 

[신성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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