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이해할 수 없는 무모한 도전 - 폴: 600미터

글 입력 2022.11.22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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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기 위해 사투하는 내용의 작품을 보면 자연스럽게 나의 안락한 환경에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망망대해에서 조난된 내용의 <라이프 오브 파이>와 <하트 오브 더 씨>, 우주에서의 고립을 다룬 <그래비티>를 보면서 두 발에 땅을 딛고 살아가는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지 실감하게 된다. 영화 <폴: 600미터>를 보기 전에는 포스터와 포스터 문구만 보고 짜릿한 쾌감이 주를 이루는 액션 영화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폴: 600미터>는 짜릿한 장르 영화가 아니라 처절한 생존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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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600미터>는 함께 암벽 등반을 하다 남편을 잃은 베키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남편을 잃은 트라우마로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며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는 베키는 당시 함께 등반했던 친구 헌터의 격려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자 600미터에 달하는 탑에 오르는 무모한 도전을 감행한다. 흔들리는 사다리에 아슬아슬했지만 가까스로 탑 꼭대기에 오르는 데 성공한 두 사람. 이제 완벽하게 임무를 완수했으니 내려올 차례만 남았는데, 아뿔싸. 흔들리던 사다리가 완전히 붕괴되면서 두 사람은 꼼짝없이 600미터 상공에 갇혀버린 신세가 된다.

 

이 영화의 특별한 점은 가장 중요한 임무인 줄 알았던 ‘탑 꼭대기에 오르기’라는 미션이 중반부에 완수된다는 데 있다. 주인공 베키가 극복하고자 했던 등반이었다. 베키의 남편 댄은 끝까지 오르지 못하고 떨어졌기 때문에 세상을 떠났다. 댄과 다르게 정상까지 오르기만 한다면 베키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게 될 것이다.

 

그렇다 보니 나는 자연스럽게 ‘정상에 무사히 오르느냐’가 영화의 핵심 서스펜스일 거라 예상했다. 이런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비껴갔다. 아직 중반부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꼭대기에 오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 영화는 남은 분량을 무엇으로 채우려는 거지? 성취감을 잔뜩 만끽하고 내려가려던 베키가 사다리가 무너지자 허겁지겁 다시 탑 위로 오르면서 영화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화의 제목은 폴(fall). ‘떨어지다’였다. 탑을 소재로 한 대부분의 작품이 어떻게 꼭대기까지 오르느냐만을 중점적으로 다룰 때 이 영화는 어떻게 무사히 땅으로 내려가느냐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고립이 주는 압박감


 

흔히 장르 영화를 홍보할 때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이라는 문구를 여러 번 접했지만, 그 문구가 실제로 와닿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 <폴: 600미터>를 보는 동안만큼은 정말 손에 자꾸 땀이 차서 여러 번 손바닥을 닦아야 했다.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를 만큼 화려한 시각 효과로 관객을 사로잡는 영화들 사이에서 이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탑 꼭대기 위에 선 두 여인만을 보여주며 고립이 주는 압박감을 선사한다.

 

대부분의 재난 영화가 고립된 상황에서 비극이 시작된다. 무인도든, 망망대해든, 우주든, 설산이든 말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의 고립은 유독 더 비참하다. 다른 영화들처럼 아무도 오지 않을 특수한 장소가 아니라 사람들이 사는 곳 한복판이기 때문이다. 무사히 탑에서 내리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을 수 있다. 베키와 헌터는 캠핑 온 사람들이 본인들이 갈망하는 차가운 맥주를 마시는 것을 보고 입맛을 다신다. 딱 600미터만큼만 멀어진 일상이니 더더욱 간절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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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시그널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탑 아래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안 베키와 헌터는 최선을 다해 자신이 탑 위에 올랐음을 알리고 구조를 요청한다. 극적으로 존재를 알리는 데 성공하지만 탑 아래 사람들은 두 사람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리고 구조는커녕 차를 강탈한다. 두 사람의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때마다 그들만큼이나 패배감에 빠지곤 했다. 아예 기대도 없으면 실망도 안 할 텐데 항상 한 끗 차이로 미끄러지기 때문에 기어코 또 다음엔 구조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인공 베키를 탑으로 데려온 친구 헌터는 SNS 인플루언서다. 그들이 탑 위로 올라가는 것도 베키와 트라우마 극복과 함께 아무도 따라 할 수 없는 자극적인 내용의 영상을 만들어 인기를 끌겠다는 목적도 있었다. 영화에서는 헌터를 향해 ‘따봉충(Like whore)’라는 대사가 나오기도 한다. 헌터에게는 6만 명의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있지만, 조난 상황에서는 그 6만 명도 아무런 힘이 되지 않는다. 익명의 관심보다 중요한 건 그들이 탑에 조난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구해줄 한 사람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무모함


 

보면서 ‘스불재(스스로 불러온 재앙)’이라는 단어를 몇 번이나 생각했는지 모른다. 주인공이 위험천만한 상황에 뛰어드는 영화가 한두 편이 아니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동기가 납득이 됐다. 이 영화에는 ‘베키의 트라우마 극복’이라는 명분이 있지만, 극복 방법이 꼭 그렇게 위험해야 할까? 저렇게까지 안전장치가 허술해야 했을까? 애초에 댄이 사망에 이르게 된 것도 세 사람이 위험한 암벽 등반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헌터와 베키에게는 자극적인 위험을 즐기는 기질이 있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SNS 상의 관심과 스릴을 위해 ‘굳이’ 600미터 탑에 오르는 두 주인공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영화를 다 본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역시 안전한 것이 최고’라는 교훈만 얻었을 뿐이다. 두 사람의 무모함에 눈살이 찌푸려지긴 했지만, 영화 자체가 불편하다는 인상은 없었다. 그러한 무모함을 ‘청춘의 낭만’으로 포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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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확실히 두 사람을 통해 대리만족했다는 점은 인정해야겠다. 평생 내가 베키와 헌터처럼 무모한 도전을 펼칠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저들이 탑에서 겪은 일을 청춘의 낭만이나 열정이라고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저들의 도전이 지켜보는 입장에선 손에 땀을 쥘 만큼 짜릿했던 건 분명하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재미있다. 보통 영화의 재미를 따질 때 작품성이나 메시지 등 여러 가지 사항을 고려하곤 하지만, 일단 그런 기준은 제쳐두고 순수하게 오락적인 쾌감만을 따진다면 정말 재미있다. 정말 손바닥에 자꾸 땀이 나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영화가 끝나고 황석희 번역가와 이화정 영화저널리스트가 진행하는 GV 시간이 있었다. 스콧 만 감독은 굳이 위험한 상황에 뛰어드는 사람들을 보며 ‘왜 저런 행동을 하는 걸까?’라는 의문이 들어 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비화를 전해 들었다. 잘 몰랐는데 미국에서는 이런 경우가 아주 흔하다고 한다. 아직도 내가 모르는 세상이 이렇게나 많다.

 

GV 시간 중 영화를 여러 번 보기를 권유하는 말을 들었다. 황석희 번역가가 직접 영화 초반부부터 암시된 복선을 하나하나 읊어주었는데, 이 영화가 생각보다 훨씬 정교하게 만들어졌구나 싶었다. 러닝타임의 절반 이상을 탑 위에 고립된 두 사람만 보여주는데도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GV에서 소개된 고립된 인물을 다룬 다른 영화도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다고 마냥 킬링타임으로 소비할 만큼 메시지가 공허한 것도 아니다. 스포일러라 말할 순 없지만 예상 밖으로 전개된 결말에서 정말 많은 부분을 생각하게 했다.

   

퇴근 후 무기력한 일상을 타파하고자 이 영화를 본 건 꽤 옳은 선택이었다. 지친 월요일 저녁에 잠시 현실을 잊을 수 있을 만큼 짜릿한 시간을 보낸 것으로 만족한다.

 

 

[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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