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닮았지만 닿지 못하는 엄마와 딸 - 연극 '거울'

글 입력 2022.11.19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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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식이 너무 닮았을 때, 우스갯소리로 자식이 인생을 스포당했다는 말을 한다. 나이가 든 자신의 모습을 부모에게서 찾을 수 있겠다는 의미다. 재미로 하는 말이지만, 부모를 닮고 싶지 않은 누군가에게는 공포이고 저주일 테다. 결코 닮고 싶지 않은 사람을 유전 때문에 닮아갈 수밖에 없다는 건 비극이다.

 

연극 <거울>의 해정도 그런 사람이다.

 

 

[정지] 거울 포스터_최종.jpg

 

 

어느날 해정은 건강검진을 갔다가 포도막염이라는 유전병을 진단받는다. 뚜렷한 치료법 없이 염증을 막기 위해 평생 스테로이드 안약을 넣고 살아야 하는 병이다. 유전적 소인이 강하다는 의사의 말에 해정은 같은 병을 앓는 엄마 순영을 떠올린다. 특별히 눈에 나쁜 일을 한 적도 없고, 건강 관리를 열심히 하는 편인데도 이 병을 얻은 건 순전히 순영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자 탓이다. 해정은 절망한다.


해정이 진단받은 병은 해정과 엄마의 관계가 어떤지 관객에게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엄마에 대한 해정의 기억은 대부분 엄마가 가진 병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기억 속에서 아빠는 해정이 아픈 엄마를 잘 돌봐줘야 한다고 말한다. 그때부터 오랫동안 해정에게 엄마는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기보다 늘 자신이 나서서 챙겨야 하는 존재였다.


<거울>은 움직임극인 만큼, 인물의 감정은 말과 행동만이 아니라 다양한 움직임으로 표현된다. 그중에서도 해정에게 엄마와 관련된 것들은 어둡고, 냉정하고 두려운 모습으로 무대에 나타난다. 예를 들어, 엄마와 같은 병을 진단받는 순간은 의사에게서 총을 맞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의사의 진단이 아무런 예고 없이 해정의 삶을 관통하고, 남은 삶도 좌지우지한다는 걸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엄마의 모습은 악몽으로 형상화된다. 길고 검은 머리를 늘어뜨리고 해정을 향해 서서히 기어와 그의 몸을 휘감는다. 해정이 엄마에게 가진 감정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초반부 주로 불안정한 해정의 모습을 다루며 긴장감을 이어가던 연극은 엄마인 순영이 등장하면서부터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된다. 해정의 기억과 달리 현실에서 해정과 동시대를 사는 엄마 순영은 생각보다 평범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딸과의 통화 끝에 언제 한번 집에 들르라고 덧붙이는 모습, 다른 아주머니와 만나서 차를 마시기도 하고 춤도 배우는 순영에게서 관객은 자신의 엄마를 떠올릴 것이다. 특별히 대단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평범한 모습의 엄마. 그에게서 악몽과 같은 모습을 발견하기란 어렵다.

 

 

거울.jpg

 

 

해정과 순영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 현실의 가족관계는 다면적이고 복잡하다. 대부분의 가족관계에서는 완전한 악인도, 완전한 선인도 없다. 기대하는 사람과 실망시키는 사람이 있을 뿐. 가족에게만큼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은 가족관계를 더욱 모순적이고 복잡하게 만든다.

 

상황에 따라 위아래로 입은 검은색 의상 위에 각각 다른 옷을 걸치지만, 엄마를 만나러 갈 때만큼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해정의 모습에서 관객은 그 속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엄마가 자신의 약하고 꾸미지 않은 부분을 품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좌절될 때마다 해정의 실망감은 더 커졌을 것이다.


오랜만에 찾은 엄마 집에서 어색한 안부 인사만 주고받던 식사 시간, 갑자기 모녀의 갈등은 폭발한다. 늘 자기보다 돌아가신 아빠를 먼저 생각하는 게 서운한 딸과, 딸을 생각해서라도 자신을 잘 챙겨야겠다고 다짐하는 엄마. 가족간의 갈등은 늘 이런 식으로 일어난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 이 가족의 오래된 갈등의 뿌리를 건드리고, 서로 감정을 다치는 것으로 이어진다. 두 사람은 서로를 미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그 마음을 어찌할 수 없어서, 어떻게 해야 그 사랑을 상대방이 이해하도록 표현하는지 알지 못해서.


두 사람이 서로에게 소리 지르며 자신의 본심을 조금이나마 내비쳐 보일 때, 비로소 이들은 서로의 솔직한 얼굴을 조금 엿보게 된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다. 해정은 더 하고 싶은 말을 삼킨다. 자신도 엄마처럼 포도막염 진단을 받았다는 말을 끝내 하지 못하고, 자신을 위한다는 엄마의 말이 진심인지 궁금해하면서 솔직하게 묻지도 못한다. 그저 자신을 끌어안는 엄마를 자신도 아무 말 없이 안을 뿐이다. 이 갈등의 뿌리까지 뽑아 내려다 갈등과 함께 관계 자체가 끝나 버릴까 두려운 이들의 선택은 그렇게 또 어색한 말과 표정으로 가면을 쓰고 멀어지는 것이다. 해정은 급히 식사를 마치고 가봐야겠다며 집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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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막바지에 이르러 제목인 '거울'을 다시 생각해본다.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자식이 그만큼 부모를 많이 닮는다는 것이다. 자식이 자라는 동안에는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인이 되면 부모만 자식의 거울이 되는 게 아니라 자식 또한 부모의 거울이 된다. 두 거울이 서로를 끝없이 반사시키는 모습은 서로 닮아가면서도 영영 닿을 수 없는 해정과 순영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움직임으로 시작했던 이 극은 움직임으로 끝난다. 엄마는 무대를 천천히 거닐고, 해정은 그 옆에서 다양한 움직임을 보인다. 해정의 움직임은 슬퍼 보이기도 하고, 화가 나 보였다가 체념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 가지로 표현할 수 없는 엄마를 향한 감정이 움직임에 스며 있다. 마음이 맞지 않는다고 끊어낼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서, 상처를 주고 또 받으면서도 여전히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지 못한다. 극적인 문제 해결은 없다. 치료가 아니라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 평생 스테로이드 안약을 넣는 일처럼, 서로를 무한히 반사하는 거울처럼, 앞으로도 해정과 순영은 그렇게 계속 살아갈 것이다. 그것이 가족이니까.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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