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11월의 바다, 찬란히 빛나고 바래지는 것은 결코 슬프지 않음을 [여행]

파도가 아름답고 예쁘다 하여 붙여진 이름 "파도리"
글 입력 2022.11.13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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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코 11월이 찾아왔다.

 

오기를 기다린 적도, 가고자 하는 마음도 없던 11월은 새삼스런 달이다. 완연한 가을도 완벽한 끝도 아닌,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 놓인 애매한 달. 어쩌면 이십 대 정 가운데를 지나치고 나서야 비로소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에 대한 원망을 긴 무관심 속에 살포시 얹었을지도 모르겠다.

 

올해의 취업 시즌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취린이에게 남은 것은 무수히 많은 실패와 좌절 속 소소한 성공과 미약한 성장일 테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소란스러웠다고 말하고 싶다. 아주 치열하고 바쁜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무엇도 되지 못한 스스로가 미워지는 순간들에 끊임없이 초조하고 불안했던 한 해였다. 어찌되었든 올해의 도전은 미완성으로 막을 내렸고, 나는 다음 만남을 기약하게 되었다.

 

발가락 골절로 10월을 꼬박 본가에서 요양을 하며 지냈다. 지난 주 한 달 동안 하고 있던 깁스를 풀었다. 그 한 달 사이 준비했던 모든 취업 일정도 막을 내려 비로소 육체와 정신 모두에 자유를 되찾았다. 하지만 한 해가 두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여유마저 온전히 즐길 수 없게 만든다.

 

몇 달 사이에 낯설어진 운전대를 다시 잡고, 엄마와 단둘이 태안 바다로 드라이브를 다녀왔다. 고향 바로 옆이기에, 살면서 수도 없이 방문한 태안 바다는 여행이라는 말을 붙이기도 멋쩍게 한다. 그러나 그 많은 조우 중 11월의 바다는 처음이라 괜스레 설레는 마음은 단순히 콧바람 쐬기는 아니라고 말하는 듯했다.

 

11월과 바다는 붙여 놓기에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성수기인 여름은 당연하고 겨울 바다는 그 나름의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을 이끌지만, 가을에는 바다를 잘 찾지 않으니까. 그것도 가을과 겨울의 틈, 11월은 생동하던 모든 것들마저 서서히 스러지는 시기인만큼 그 바다 역시 황량하고 쓸쓸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11월의 바다는 너무 아름다웠다. 살면서 이렇게 온전하게 바다를 느꼈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그 모든 아름다움을 가슴에 담아냈다. 어쩌면 여름 바다는 끈적이고 북적여서, 겨울 바다는 살을 에는 추위 때문에 그 안에 담긴 찬란함과 포근함을 제대로 즐겼던 적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복잡한 마음을 비우기 위해 떠났던 바다에서 오히려 나는 충만해진 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새로이 발견한 푸름


 

솔직히 말하자면 서해를 품고서도 언제나 다른 바다를 향한 동경을 피웠다. 생각날 때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는 바다가 있지만, 그 바다는 언제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냥 바다. 조금의 특별함도 담지 않은 그 수식이 태안 바다를 향한 나의 감상의 전부였다. 

 

태안 바다의 개성을 담당하는 ‘갯벌’. 그것의 생태적 아름다움은 나의 자부심이기도 하지만, 미학적 아름다움을 논한다면 통상적인 기준에서 어긋난다고 생각했다. 갯벌을 품은 바다는 맑고 투명한 파란색과는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 푸른 것은 맞지만 파란 것인가에 대해서는 언제나 망설임을 느꼈다.

 

내가 바다를 좋아하는 이유가 될 만큼, 나는 ‘푸르다’는 그 말의 어감도 색감도 너무 사랑한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파란색’, 투명하고 맑은 바닷물을 연상시키는 바로 그 색을 가장 사랑하기에 언제나 동해 바다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가질 수밖에 없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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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살면서 처음으로 방문한 ‘파도리 해변’에서 나는 태안 바다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했다. 늘상 그런 바다를 그렸던 나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파도리의 해변은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파랑을 품고 있었다. 지난 여름 제주의 바다에서 본 것만 같은 아름다운 푸름으로 채워진 공간에서 나는 그 청량함에 잠식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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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아름답고 예쁘다고 하여 붙여진 ‘파도리’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 파도는 시각적으로도, 청각적으로도 수려했다. 태안의 여타 해안들과는 다르게 조약돌로 이루어진 해변은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존재감을 과시했고, 돌멩이에 부딪히며 만들어지는 파도의 포말은 마치 돌림노래를 하듯 아름다운 화음을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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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색적인 광경도 보았다. 말로만 듣던 태안 바다의 해녀들을 보았다. TV에서나 보던 해녀들의 움직임을 멀리서 나마 바라볼 수 있었다는 게 정말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다.

 

비록 물 때를 맞추지 못해 유명하다는 해식동굴을 방문하지는 못했지만, 굳이 더 많은 특별함을 바라지 않아도 될 정도로 충분히 행복했다. 여행에 남은 아쉬움을 토로할 때마다, 남아 있는 것이 다음의 이유가 된다고 하셨던 엄마의 말씀이 깊이 공감되는 순간이었다.

 

 

 

생명의 끈질김과 삶의 생명력


 

바다에 핀 꽃이라니.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존재와 마주쳤다. 해안 절벽의 거대한 바위 틈에 조심스레 자리잡은 꽃을 발견했다. 평소에는 무심히 지나쳤을 꽃의 아름다움이지만, 척박함을 뚫고 자란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무시하기란 어려웠다. 인터넷에 검색하니 ‘해국’이라는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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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이 잘 드는 바위틈이나 경사진 곳에서 잘 자란다는 해국의 꽃말은 ‘기다림’이라고 한다.

 

생명력이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밖에 없는 바위틈에 기어코 뿌리를 내리고 아름답게 피어난 해국은 누군가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는 순간을 위해 거친 풍파를 견뎌내는 것일까? 7월에서 11월 초까지 핀다는 이 꽃을, 그 기다림의 끝 무렵 우연히 마주칠 수 있었다는 것이 행운처럼 느껴진다.

 

우연히 해국을 발견할 또 다른 누군가 역시 이 꽃이 지닌 꽃말을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당신을 만나는 순간을 위해 열악한 조건 속에서 피어난 꽃을 기특하게 바라 봐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그랬듯 삶의 위로와 희망을 느꼈으면 좋겠다.

 

우리의 삶 역시 고난과 역경 속에도 꿋꿋이 버텨내는 해국의 아름다움을 닮아 있다고, 겉으로 드러나는 외관 뿐만 아니라 그 아름다움을 피워 내기 위해 기다린 시간이 해국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는 것을 떠올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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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국을 지나쳐 바라본 해안 절벽 끝에서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나무들을 보았다. 침식에 의해 뿌리가 다 드러난 나무들이 어쩐지 절벽을 타고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생명력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수많은 세월이 축적된 존재조차 무참히 베어버리는 우리 인간들을 보며 나무는 왠지 수동적인 것처럼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뿌리마저 드러난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자신의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버텨내는 나무를 바라보며, 지극히 인간중심적으로 판단했던 무심한 태도를 반성했다. 

 

파도리가 담고 있는 아름다움은 그저 표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공간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인간의 발자취가 담기기 전부터 꾸준히 축적되어 온, 억겁의 시간이 만들어낸 자연의 경이로움에 가슴이 벅차 오른다. 지금의 아름다움을 만들기 위해 해변이 겪어 온 풍화는 얼마나 지독했을까? 그저 예쁘게만 보이는 동글동글한 조약돌 역시 한 때는 거친 바위였을 거라니. 

 

내가 삶을 사랑하는, 사랑해야 하는 이유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실수와 실패는 나조차도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들곤 했다. 특히 올해는 유독 그랬다. 다소 자존감이 높다고 생각해 왔는데도, 반복되는 좌절에 가끔은 이 삶을 미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파도리가 선사한 아름다움은 다시금 내가 나의 삶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이유가 되어 주었다. 실패와 좌절 마저도 사랑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거친 풍파가 아름다운 해변을 만들어 낸 것처럼, 풍화가 없는 인생은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패는 언제나 아프고, 좌절은 항상 고통스럽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나의 삶을 사랑할 것이다.

 

 

 

11월의 바다는 잘 있습니다.



평소 사람 많은 공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탓인지, 근처에 멋진 해수욕장을 두고도 성수기에는 굳이 그곳에 발을 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철이 지난 바다를 방문할 때가 많았는데, 한적함과 여유를 즐기는 한 편 한 때는 사람과 활력으로 가득 찼던 흔적들을 발견하고 왠지 쓸쓸한 기분을 느끼기도 하였다. 빛 바랜 파라솔, 버려진 튜브, 텅 빈 넓은 해변은 마치 바다가 외로워 하고 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을 들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철이 지난 수준을 넘어, 날씨 마저도 쌀쌀한 11월의 바다로 향하며 고독한 해변을 상상했다. 하지만 ‘만리포 해변’의 인기에 밀려 해수욕보다 데이트 코스로 더 유명한 작고 다정한 해변은 전혀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소담한 어촌 마을로 둘러싸인 바다는 적당한 인파와 함께 실로 사람 사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얼마 전 읽었던 이병률 시집의 <바다는 잘 있습니다>라는 제목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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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리에 위치한 대형 오션뷰 카페에 들어설 때도 번잡함이나 황량함과는 다른 분위기를 읽었다. 성수기의 오션뷰 카페는 커다란 통창으로 쾌적하게 바다를 즐기려는 의도와는 달리 인파에 밀려 온전히 바다를 감상하기에는 번잡스럽게 느껴지곤 했다.

 

반대로 비수기에 방문하는 카페는 사람이 너무 적어 큰 공간을 점유한 작은 인원이 초라하게 느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테이블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적당한 손님과, 그들의 얼굴에서 비춰지는 여유는 드디어 내가 바라던 이상적인 오션뷰 카페를 찾았다는 기쁨을 느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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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기 전날의 날씨는 늦가을 답지 않게 온화했고, 불어오는 선선한 바닷바람은 특유의 끈적임 없이 적당한 바다내음을 품고 있었다. 여름 겨울에는 엄두도 내지 못한 바깥 테이블에 자리하며 오붓한 대화와 함께 드넓게 펼쳐진 바다의 수평선을 감상했다. 푸른 바다를 수놓은 윤슬을 바라보며 사색하는 시간이 더 없이 행복했다. 실로 오랜만에 바다를 보며 실컷 멍을 때렸다. 어쩐지 미디어에 온종일 노출되어 지냈던 순간들이 나도 모르게 몸과 마음을 지치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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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우는 것을 통해 채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가벼워진 것과는 다르게 흔들리던 내 마음은 단단해졌다.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11월의 충만함을 엿봤다. 풍요로움을 비워낸 늦가을은 쓸쓸한 줄만 알았다. 생명력이 넘쳤던 한 때의 흔적을 겨우내 움켜잡고 있는 11월의 풍경이 다소 초라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찬란히 빛난 후에 바래지는 과정이 결코 슬프지 않다는 것을. 벌거벗은 가로수 사이에 듬성듬성 자리잡은 코스모스에서, 가을의 끝자락을 부여잡은 억새에서, 추수 후 남겨진 지푸라기에서, 수많은 인파가 떠나간 바다에서 나는 텅 빈 충만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배운 것 같다.

 


[김소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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