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노는 게 제일 좋아 : 장 줄리안

글 입력 2022.11.09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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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선과 형태. 그보다 더 단순한 색의 조합. 어디선가 언뜻 보았던 일러스트의 주인공을 찾았다.

 

회색의 매끈하고도 납작한 DDP의 건물과 사람들 틈으로 주황색이 반짝, 눈에 들어왔다. Then There. 그러면 거기.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상하게 안으로 초대받는 기분이었다.

 

티켓 박스에서 안쪽으로 들어가기 전, 오디오 가이드가 무료로 제공된다는 배너를 발견했다. 앱까지 다운로드했다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의 작품이 그를 말해주지 않을까?

 

확신에 찬 상태로 재입장 불가 안내를 받으며 본격적으로 첫 번째 테마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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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는 총 12개의 테마가 있는데, 아쉽게도 팸플릿에 관련 정보가 없다. 고로 사진 등 기록을 남겨야 각 테마에 관한 설명 등을 기억하기 용이하다.

 

그러나 이런 점에서 전시 자체에 집중하기 좋다. DDP 전시회들의 특성인 것인지, 지난봄에 이곳에서 열린 '팀 버튼 전'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팸플릿에 별다른 정보가 없고, 첫 번째 테마에 유독 사람들이 빽빽하게 몰리고, 전시장 운영요원이 자유롭게 관람하기를 권하고, 벽을 따라 꽉 들어간 사람들 틈으로 전시 작품을 흘끗 대는 것.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지만, 오늘은 그날에 비해 수월했다. 아마 영어 필기체로 빼곡한 드로잉 일기가 주는 오묘한 피곤함 때문이지 않았을까.

 

나 또한 전시장 벽은 물론이거니와 그 아래로 늘어진 작가의 스케치북 속 일기까지 다 읽어 보기엔 시작부터 지칠 느낌이었으므로 이곳에 직접 작가가 와서 그렸다던 벽 내용 위주로 보았다. 가장 인상 깊기도 하다. 일종의 자기소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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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살의 자신이 처음 런던으로 가 학교를 다녔다는 것부터 동생을 비롯한 가족들, 아내 사라와의 첫 만남, 첫아이, 두 번째 아이, 그리고 팬데믹까지. 작가의 지난 10년 축약본이다 보니 오히려 한눈에 어떤 사람인지 대략적으로 느껴졌달까.

 

가족을 사랑하고, 그림을 사랑하고, 소통을 사랑하는 사람임을 직감했다. 거대한 나무를 그려 가계도를 보여주고, 글씨 자체는 다소 악필에 가까울지 언정 읽는 이를 배려한 여백과 크기 조절이 느껴졌다.

 

그리고 지난 기록들만 해도 스케치북 100권이 되는데 굳이 현장에서 그려 넣었다는 건 관람객들과 긴밀히 연결되고 싶어 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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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동생 니코와 만든 영상물을 보며 새삼 내 안에 있던 선입견을 깨달았다.

 

그림이라고 해서 무조건 정지된 형태가 아니다. 사진은 순간을 포착하여 하나의 틀에 담는 것이지만, 그림은 그리는 이의 손길을 따라 수천 장의 사진으로 바뀔 수 있다. 그것을 빠르게 재생하면 영상이 된다.

 

형제가 함께한 작업물은 무척 유쾌했다. 공주를 구하러 가는 기사 이야기 등 스토리텔링은 다소 진부했으나, 컷을 넘기는 전환 포인트와 음악. 둘의 조화가 좋았다. 대중이 좋아할 포인트를 정확히 구현해 내길 즐기는 사람이어서일까. 적어도 어떻게 하면 눈길을 사로잡을지 아는 듯했다.

 

물론 이렇게 실험적인 창작물들은 동생과 자신이 지금도 즐기는 '놀이'라고 하긴 했지만. 만드는 사람이 즐거우면 보는 사람에게 어느 정도는 전해지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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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면이 같은 영상물로 재생되던 공간을 지나면, 더욱 획기적인 섹션을 만난다. 이곳은 마치 각종 색종이를 손길 가는 대로 오리고 칠하고 붙인 느낌이었다. 그가 왜 '놀이'라고 칭했는지 단박에 이해 간다.

 

떠올린 아이디어나 직접 만든 소품 등이 꼭 어린 시절의 장난 같다. 우리 대다수는 이렇게 재기 발랄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현실로 구현해 낼 엄두를 내지 않는다. 시간 낭비라는 생각 혹은 귀찮음 때문에. 이때 실감했다.

 

매일매일 그림을 그리고 일기를 쓰는 사람이 단순히 성실한 사람이 아니라, 끈기 있는 사람이란걸. 미루고 싶은 마음을 모르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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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마주한 드로잉 습작들. 전시장 천장부터 바닥까지 그리고 좌우 어디로 고개를 돌리든 종이와 선 뿐이었다.

 

우리는 대개 실력이나 수준을 따질 때엔 눈에 뻔히 보이는 것을 기준 삼는다. 그러다 보니 펜으로 팔랑대는 종이 위에 그린 그림은 무척 쉬워 보인다.

 

다양한 미술을 보면 볼수록 느끼는 거지만, 엘리트주의는 과거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무언가에 진심으로 꾸준할 수 있다는 건 죄다 빠르고 정신없이 흐르는 요즘 세상엔 더욱 희귀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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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부는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드로잉을 즐겨왔는지 보여준다면, 뒤로 갈수록 우리 일상과 가까워진다.

 

완전한 제품 컬렉션과 맞닿기 전, 드로잉과 상품 사이의 가교 역할 같은 공간이었다. 드로잉 일기에 비해서 훨씬 직관적인 이미지를 담고, 그 안에 메시지도 담는다. 어떻게 해석할지는 저마다 차이가 있을지라도 이게 무엇인지는 모두가 이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드로잉 소재는 늘 일상에서 얻는다더니 정말, 우리네 일상이다. 핸드폰 보느라 고개를 푹 숙이고, 식사할 때도 전자기기와 함께하고, 음식이 나오면 핸드폰 카메라부터 켜는 것까지.

 

블로그를 통해 자신의 드로잉을 세상에 알린 작가인지라 SNS에 비판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을지 의아하지만, 꽤 많은 가짓수를 보여준 걸 보면 부정적인 영향을 인지한 상태 같았다. 인스타그램을 지운 지 몇 달 되었기에 왠지 모르게 반가운 포스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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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드로잉만큼이나 중시한 게 있었으니, 가족이다. 이건 전시 처음부터 느꼈던 점이다. 구태여 하나의 섹션으로 만들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달까. 다만 이렇게 약간은 소꿉'놀이'처럼 식사 자리를 꾸며내서인지 따뜻함을 느꼈다. 사람의 형상을 한 의자들이라는 게 재밌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의자가 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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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엔 거울이 있어 끝없는 형상들의 향연 같은 공간이었다. 앉을 만큼 튼튼해 보이진 않지만, 의자를 좋아하는 것인지 이런 형태가 심심치 않게 보였다.

 

전시를 보다 보면 상업적인 제품 만들기 딱 좋을 디자인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역시나 수많은 콜라보를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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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초반을 생각하면 그림체가 꽤나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드로잉 일기에서는 엷은 수채화 느낌, 혹은 탁한 색상도 자주 사용하고 은근 복잡한 구조로 그린다. 이건 타깃층을 명확히 한 결과이기도 하다.

 

예전 인터뷰를 보니 그는 자신을 위한 것은 누구에게 보여줄 것이 아니라 상관없지만, 대중을 위한 작업은 그들을 고려해 창작한다고 했다. 패션, 소품, 잡지 표지 등 다양한 곳과 콜라보를 해올 수 있었던 게 이런 마인드 아니었을까. 누구보다 자유분방하게 재밌는 거리 만들길 좋아하지만,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정확히 캐치해 내는 점 때문에 그를 찾는 이들이 많았을 것 같다.

 

드로잉, 포스터, 잡지, 패션, 컵, 스케이트보드 등 디자인 하나로 뻗어나간 온갖 미술을 본 느낌이었는데, 마지막에 하나가 더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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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라니. 이것까지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하나 재밌는 건 캡션이 없다. 대중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는 바람의 일환이었을까. 제목, 제작연도, 재료, 사이즈 등 아무런 정보가 없어서 자유롭게 보고 지나갈 수 있다.

 

미술 분야에서 회화 작품을 가장 좋아하는데 가끔은 하나하나 면밀히 분석하면서 봐야 할 압박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캡션 하나 없다고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보게 되리라곤 생각 못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타깃층이 명확한 전시 구성이었다.

 

작품마다 톺아볼 내용이나 정보가 없었기에 역으로 좋은 영감을 받았다. 나도 그려보자는 생각. 전시장을 나선 후 아트숍에서 튼튼한 양장 노트 하나를 구입했다. 그리고 집에 오자마자 드로잉 일기를 썼다. 그렸다고 하는 게 더 맞으려나. 얼마나 그릴지 기한 따위는 생각 않기로 했다.

 

그저 그리고 싶을 때 그리고, 쓰고, 채워갈 것이다. 어린 시절에 만화책을 보고 따라 그렸던 기억을 되살려 재미난 '놀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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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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