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포스트 '자만추' 시대가 도래했다 [사람]

글 입력 2022.11.08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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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자만추' 시대를 선언하다


 

가을의 초입,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잔을 기울였다. 20대 대학생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으레 그러하듯, 무르익는 분위기 속에 각자의 연애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K는 모임에서 유일하게 솔로 라이프를 즐기고 있었다. 외로운 크리스마스가 걱정된다는 그에게 우리는 지인을 소개해 주거나 소개팅을 주선해 주려 했지만, K는 그런 자리가 어색하다며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그를 설득하려던 중, 나는 어이없는 선언을 내뱉고 만다.

 

"자만추 시대의 종말이 도래했다!"

  

'자만추'와 '인만추'는 서로 다른 연애 스타일을 지칭하는 신조어이다. 자만추란 '자연스러운 만남 추구'의 줄임말로, 친구 또는 지인으로 우연히 만나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지는 연애다. 반대 개념으로 등장한 '인만추'는 '인위적인 만남 추구'의 줄임말이며, 미팅 또는 소개팅처럼 연애를 목적으로, 그러니까 '애인 후보1'로 서로 만나 성사된 연애다.

 

사랑에 정답은 없다지만, 굳이 선호하는 쪽을 따지자면 나 역시 K처럼 '인만추'보다는 '자만추'가 더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트 자만추 시대를 선언하게 된 이유란 무엇인가?

 

 

 

첫째, 코로나 19가 남기고 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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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로,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하면서 자연스럽게 타인을 '만날' 기회가 줄어들었다. 나는 사람들이 흔히들 말하는 '코로나 학번'이다.

 

교복을 입고 고등학교 야간 자율 학습실에 앉아 있으면, 성인이 된 자기 모습을 그리는 끝없는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곤 했다. 미성년자에게 성인이 된다는 것은, 그동안 자신들을 가두던 규제를 모두 풀어헤치고 진정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는 일종의 환상과도 같다.

 

그렇지만 코로나 19는 막 성인이 된 01년생들에게 '할 수 있는 것'보다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더 많이 가져왔다. 마스크를 벗고 대화하면 안 된다. 4인 이상 모이면 안 된다. 9시 이후에 외출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반가움이나 설렘보다도 두려움과 걱정이 앞섰다. 누군가와의 만남은, 그 사람이 혹시라도 보유하고 있을지 모르는 바이러스를 마스크 너머로 흘겨다 보는, 숨 막히는 탐색전이 되었다.

 

그런 만큼 만남의 장으로 꿈꾸던 북적북적한 과 MT나 단체 술자리는 고사하고, 당장 대학교 강의실에서 교수님의 수업조차도 들을 수 없었으니. 본가에서 노트북을 켜고 비대면 수업을 들으며, 왠지 모를 씁쓸함과 함께 그렇게 대학 생활이 시작되었다.

 

물론, 거리 두기 규제가 완화되면서 일상은 다시금 궤도를 되찾아가고 있다. 몇 년간 미루기만 했던 학교 축제, 대면 수업과 함께 와글와글한 캠퍼스 라이프도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코로나 19가 휩쓸고 간 공백의 자리에는, 생활에의 몰두 또는 어떤 종류의 두려움이 들어섰다. 주변을 둘러보면, 벌써 고시 준비를 위해 또는 군대로 떠나거나, 몇 년 동안 칩거 생활을 하다 보니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두려워졌다는 친구들도 많다.

 

2년간의 거리 두기, 코로나바이러스는 우리에게 물리적 거리를 유지하라고 요구했지만, 어쩌면 사람들 사이 마음의 거리도 그만큼이나 멀어지지 않았을까.

 

 

 

둘째, 우연성을 긍정할 여유의 부재


  

둘째, 현대인의 바쁜 일상에는 만남을 위한 우연성이 들어설 틈이 없다. '자연스러운 만남'을 위해서는 우연성의 도움이 필요하다. 목적이 연애는 아니었지만, 두 사람을 가까워지게 할 어떤 우연한 계기가. 그러니까 우연히 관심사가 같다거나, 우연히 같은 사건에 휘말린다거나, 혹은 우연히 마주쳤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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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영화 <비포 선라이즈>를 보고, 이것이야말로 정석적인 '자만추'라고 생각했다. 각자 여행하던 두 주인공이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 운명처럼 사랑에 빠져 밤새 비엔나 거리를 여행하는 이야기. 우연과 운명은 정말이지 한 끗 차이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기차에서 한 쌍의 부부가 말다툼을 시작한다. 뭐야, 자막 기능이 고장 났나? 한글 자막이 통 나오질 않는다. 의아해하던 중, 급기야 두 부부는 언성을 높이고 아내는 남편이 읽고 있던 신문지를 거칠게 잡아챈다. 긴장감이 고조되는 상황.

  

부부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셀린느는 불편함에 자리를 옮겨 제시의 옆자리에 앉는다. 제시는 묻는다. "저 두 사람 왜 다투는지 알아요?"

  

아하, 자막이 잘못된 게 아니었구나. 독일어로 된 부부의 말다툼을 배경 음악 삼아 시작되는 멜로 드라마. 셀린느와 제시는 처음 만났는데도 마치 오랫동안 알던 사이처럼 대화가 잘 통한다. 빠른 속도로 중앙선을 넘나드는 탁구공처럼, 완벽한 대화의 티키타카. 대화의 '케미스트리'란 바로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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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같은 상황을 한국의 지하철로 가져와 대입해 본다. 아침 8시 30분, 2호선 열차에서 갑자기 한 쌍의 부부가 언성을 높이며 다투기 시작한다.

 

한 승객은 얼굴을 찌푸리며 열차 칸의 엄청난 인파를 뚫고 도망치듯 자리를 옮긴다. 밀려나다시피 길을 터주며, 유유히 사라지는 그를 날카롭게 째려보는 주변 승객들. 다른 이는, 이어폰 볼륨을 한층 크게 높이고 스마트폰 화면에 얼굴을 들이민다.


이런, 틀렸다.

 

우연한 사건으로 '자만추'를 실천하는 셀린느와 제시는, 적어도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 2호선에는 없다. 현대인의 일상은 우연성보다도 정시성의 영역이다. 늘 정해진 시간까지 정해진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이들에게 우연성은 반갑고 설레는 이벤트가 아니다. '신속, 정확한' 목적지 도달을 방해하는, 예상치 못한 장애물일 뿐이다.

 

그래서일까, '인만추'를 추구하는 이들은, 상대방의 마음을 잴 필요 없이 연애라는 서로 같은 목적이 있어서 감정소모가 덜하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는다. 게다가 소개팅의 경우, 미리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고, 특히 외적 이상형에 가깝지 않다면 아예 만나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 연애 과정에서 수반되는 일종의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날마다 여행 같다면 또 모를까. 현대 사회의 사랑은 샛길에서 싹트지 않는다. 일상을 살아내는 현대인에게, 샛길로 돌아가기보다는 큰 도로를 직진하는 사랑이 훨씬 접근성 있는 선택지이기 때문이다.

 

 

 

방식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


 

이러한 이유로, '자만추' 시대의 종말이라는 쓸데없이 진지한 선언을 내뱉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실은 '인만추'든 '자만추'든 연애를 시작하는 방식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사랑의 방정식을 푸는 해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각자 원하는 대로 사랑하고 또 그로부터 무한히 행복해질 수 있다면, 방식이 뭐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그렇지만 코로나바이러스가, 전쟁과 재난이, 추위가, 우리가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만큼은 빼앗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만추의 종말이, 따뜻한 이웃의 멸종을 의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최근 크고 작은 사건사고로 시국이 불안정하다. 어릴 적 아버지께서 신문을 읽으실 때마다 '시국이 어지럽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무슨 뜻인지조차 몰랐던 그 말을, 신문을 챙겨 읽을 나이가 된 내가 지금까지도 하고 있다. 당최 시국이라는 건 불안하지 않을 때가 없나 보다. 

 

그런 외부 세계의 혼란은 사람들 마음의 문을 틀어 잠그고 그들이 내면의 밀실로 숨어들어 가게 한다. 그래서일까, 인위적이든 자연스럽든, 타인과 만나 진심을 나눈다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당장 나 자신을 돌보기에도 정신없이 바쁜 세상이라서다. 

 

그렇지만, 겨울이 되면 각자의 밀실에도 똑같은 눈이 내린다. 차디찬 고난과 시련은, 사랑을 어려운 일로 만들면서도 동시에 사랑해야만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된다.

 

며칠 전 인터넷에서 펭귄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귀엽고 자그마한 펭귄은 남극의 매서운 겨울바람도 버텨내는 강한 동물이다. 이들이 추위를 극복하는 비결은, 동그랗게 겹겹이 서서 서로에게 꼭 붙어 기대는 '허들링(huddling)'이다. 이때, 밖에서 홀로 추위에 떠는 펭귄은 안쪽으로 들여와 따뜻한 온기로 감싸 안는다. 펭귄들은 혼자가 아니다. 

 

이건 사랑의 또 다른 형상화구나! 펭귄처럼 우리도 만남 그리고 사랑을 통해 서로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준다면, 추위에도 끄떡없을 것만 같다.


날씨가 점점 쌀쌀해지면서, 옷장에 깊숙이 숨어 있던 패딩 점퍼를 꺼냈다. 겨울이 오고 있다. '자만추'든 '인만추'든, 올해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따뜻한 시간 보내며 마무리할 수 있길.

 

 

[김채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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