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11월의 운세 [문화 전반]

글 입력 2022.11.08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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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은 무슨 맛이지.

뭐가 무슨 맛이야.

딱히 특징이 없잖아. 11월은 뭐가 있지.

11월 특징?

뱀이랑 벌이 없는 달이래

왜?

노벰벌

...

 

*

 

다소 소란하고 비참한 11월이 소리 없이 시작되었다.

 

늦더위가 빠르게 식고 금세 추워질 줄 알았건만 트렌치코트를 입을 수 있는 날씨가 생각보다 오래 유지되고 있다. 아니면 너무 짧은 가을에 익숙해져 길게 느껴지는 것일까. 사실 여름을 좋아하는 내게 쌀쌀한 공기는 그다지 달갑지 못하다.

 

다만 계절은 흘러가는 색이자 향이니 가만히 즐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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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는 듯한 더위와 장마, 어쩌면 더 고통스러운 마른 장마라든가, 울기 위해 태어난 매미가 한참 살다 죽는 시기라든가, 더위에 모든 것을 훌렁 벗어던지는 계절인 만큼 사람들이 쉬이 낯을 드러내는 시기라든가, 하는 것이 한여름의 성격이라면 11월의 가을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공휴일도, 연휴도 없고 성수기도 껴있지 않은 이 달은 어떤 성질이 있을까. 다가오는 연말을 애써 외면하느라 바쁘고, 울긋불긋한 단풍을 낙엽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적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는, 이루지 못한 한 해의 목표가 신경 쓰이고 조바심이 속을 잔뜩 채우는 시기.

 

화려한 엔딩만을 남겨둔 심정으로 모두가 조용히 살아가는, 무언가를 하나라도 더 해내야 할 것 같은 그런 날들. 정말 재미없는 달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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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릴 것도 마땅히 신날 것도 없는 날들은 괜히 더 적적해서 운세 같은 것을 평소보다 더 자주 확인하곤 한다. 고요히 스치듯 지나가는 시간 사이에 성가신 일이라도 생긴다면 삽시간에 우울해지는 탓이다.

 

지하철에서 백팩을 멘 사람들 사이에 끼이거나, 실수로 길가에서 떨어뜨린 블루투스 이어폰 한 쪽이 하수구에 빠지거나, 흰옷에 빨간 국물이 튀는 일진 사나운 날들은 대뜸 찾아온다는 특징이 있다. 그런 더러운 일진에 별 수 없이 무방비로 당하며 불쾌감이 가득한 하루를 보내기는 싫기에, 오늘의 운세는 몇 점인지 미리 확인하며 만반의 준비를 한다.

 

종일 말을 아끼거나 지갑을 내내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등 준비의 형태는 다양하다. 사소하고 비장한 각오들. 너무 작은 다짐이라 잊기 쉬워서 종내 추한 꼴을 보이고 마는 날도 있지만, 별 탈 없이 하루를 보내고 집에 무사히 돌아온 날엔 그렇게나 뿌듯할 수가 없다. 평범한 날을 보내기란 실로 쉽지 않음을 아는 탓이다.

 

그래서 더 간절하게, 요란하고 역동적인 세상에 쉬이 흔들리고 휩쓸리지 않겠다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침마다 머리를 말리며 운세 앱을 확인하곤 한다. 동요하지 않는 삶에 대한 의지이자 어떻게든 잘 살아보려는, 천착에 가까운 집착이다.


이렇게 운세는 신앙처럼 여겨지다가도 중요한 일이 있는 시기엔 언제 그랬냐는 듯 그 존재감이 상당히 낮아진다. 현실에서 믿어야 할 것은 운세가 아니라 따로 있기에. 지루한 날들의 연속에 의식처럼 행운 지수를 확인하다가도 이내 열흘이 넘도록 신경 쓰지 않기도 한다.

 

이 변덕 아닌 변덕은 11월에 유독 심하다. 헛헛하다가 문득 급해지고, 허탈하다가도 절실해지며, 힘껏 늘어지다가도 바빠지는 그런 수선한 시기. 한 해의 끝에만 찾아오는 침울함과 무기력감이 고개를 드는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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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1월과 11월의 내 모습이 같고, 남은 한 번의 그믐 사이에 그 처지가 바뀔 것 같진 않은 예감 때문이리라. 그 사이에 바삐 옮긴 걸음과 가쁘게 내쉰 숨은 무용한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어깨에 힘을 주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이리 착잡한 속도 모르고 성큼 다가오는 연말은 야속하기 그지없지만, 그럴 적마다 웃기게도 부쩍 관심 없던 운세의 흐름을 생각하곤 한다. 운세는 항상 90점 내외의 시기가 지나면 50점을 웃도는 시기가 오고 다시 80점을 상회하는 날들이 돌아온다. 그러니 지금 당장 일진이 사납더라도 언젠간 쨍하고 해 뜰 날이 올 테니 여태껏 그래왔듯 열심히만 살자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저 웃으며 잘 사는 것이 목표인 나는 속 편하게 살고 싶기에 이 비이성적인 미신의 규칙성을 조금은 신뢰한다. 적적한 날들이래도 열심히 걸음을 옮겨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에, 근거 없는 것을 근거 삼으며 매 아침마다 밖을 나선다. 가끔은 행운의 색으로 옷을 맞춰 입고.

 

*


[그렇게 하나하나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떨어지는 잎 하나에도 적절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터였다. 병적이기까지 한 이 행위는 긍정에 가득 차 있어야 할 때만 나오는 버릇이었다. 일종의 의식이자 주문이었고, 찬가였다.] - 이서현, <운수 좋은 날>, 《망생의 밤》, p.52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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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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