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한국, 이 작은 땅에는 야수들이 산다 [도서]

글 입력 2022.11.06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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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이야기가 필요할 때


 

사람을 압도하는 거대한 이야기를 기다리게 될 때가 있다. 일상 곳곳에 배어드는 부드러운 이야기, 소소한 공감과 위로를 전하는 이야기들도 있다. 작은 이야기들에 한참 빠져 지내다 보면 반대의 것에 끌리게 된다.

 

한눈에 담기지 않는 웅장한 자연의 광경, 수없이 쏟아지는 인물들, 삶을 관통하는 역사적 순간들에 순응하기도, 대항하기도 하는 장면들이 보고 싶어진다.

 

성난 이야기의 파도에 휩쓸리고 싶을 때, 『작은 땅의 야수들』을 만났다.

 

 

작은땅의야수들_표1+띠지.jpg

 

 

『작은 땅의 야수들』은 한국의 역사를 넘나들며 이야기한다. 사람들의 삶을 그 이전과 이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뒤바꿔 놓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 하에, 이야기는 시작된다.

 

 

1917년 겨울 평안도 깊은 산속. 극한의 추위 속에서 굶주림과 싸우며 짐승을 쫓던 사냥꾼이 호랑이의 공격으로부터 일본인 장교를 구하게 되는데, 이 만남으로 그들의 삶은 운명처럼 연결되고 반세기에 걸친 이야기가 펼쳐진다. 사냥꾼, 군인, 기생, 깡패, 학생, 사업가, 혁명가…… 파란만장한 인생들이 ‘인연’이라는 끈으로 질기게 얽혀 만나고 헤어지고 재회하며 한반도의 역사를 아름답게 수놓는다.

 

- 줄거리 中

 

 

 

단숨에 사로잡는 이야기


 

『작은 땅의 야수들』의 매력은 시작점에서부터 돋보인다.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기대를 품고 책장을 넘길 때, 첫 장면부터 읽는 이를 완전히 사로잡는다.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날, 깊은 산속을 배경으로 한다. 끝없는 굶주림에 지친 사냥꾼과 호랑이가 마주치는 순간, 날카로운 긴장감은 단박에 모든 것을 제쳐두고 이야기에 온전히 집중하게 한다.


김주혜 작가에 관한 짧은 소개 글이 첫 장면과 교차하며 시작된다는 점 또한 흥미로웠다. 출판사 직원이던 작가가 회사를 그만두고, 저축한 돈으로만 생활하며 소설 창작에 집중하던 겨울.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어느 날 공원을 달리며 본 풍경에서 설원 위의 사냥꾼과 호랑이를 떠올렸다. 장면을 구상한 그의 모습 또한 하나의 장면이 되어 강렬히 다가왔다. 책을 곁에 두고 읽는 내내 도입부와, 글을 쓰기 시작한 작가의 모습이 떠오른 이유다.


이처럼 『작은 땅의 야수들』은 이야기가 이어지는 내내 긴장감이 감돌게 하는 소재가 등장하고, 짧고 빠른 호흡으로 사건이 진행되어 몰입도를 높인다.

 

 

 

영화를 읽는 시간



긴장감 넘치는 연출, 소재와 함께 다채로운 인물들이 등장한다. 다양한 인물들의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와 대사, 행동은 소설을 읽는 내내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효과를 준다. 그중에도 기억에 깊숙이 남은 장면은 주인공 옥희와 정호가 처음 만날 때이다.


옥희는 어린 시절 가난으로 인해 기생의 길에 들어선다. 차분하고 수더분한 성격으로 걱정을 사지만, 그만의 지혜로움과 매력으로 사람들을 사로잡게 되는 인물이다. 기생 견습생이던 시절, 어린 옥희는 수많은 사람들이 교차하는 경성의 한복판 거리에서 무대를 하게 된다.

 

공연이 절정에 이른 순간, 가득 몰려든 군중을 향해 꽃잎을 흩뿌린다.

 

 

옥희는 꽃을 한 움큼 집어 오른쪽으로 던졌다. 꽃잎들이 옅은 푸른 바람에 실려 잠시 떠다니다가 분홍색, 흰색, 보라색 무늬를 만들며 하늘하늘 떨어져 내렸다. 군중은 그 모습에 넋을 잃고 손뼉을 쳤다. 도심 거리는 햇빛으로 가득했고, 자박자박 발을 뗄 때마다 옥희의 꽃신 바닥은 잘 다져진 모래땅 위에서 바삭거렸다. 그 모든 것들이, 공기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옥희의 폐를 가득 채웠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이런 감정이 가능하다는 것도 몰랐던 그것은 바로 자유롭다는 느낌이었다. 옥희는 날개를 펼치듯 두 팔을 펄럭이고 싶었다. 그 욕구를 꾹 누른 채 그는 웃음을 터뜨리며 꽃 한 송이를 아무렇게나 던졌고, 그것은 공중으로 치솟았다가 한 소년의 얼굴에 정면으로 떨어졌다.

 

- p. 150

 

 

그런 옥희를 바라보는 소년이 있었다. 아버지를 잃고 홀로 경성에 올라온 정호는 가족을 잃은 가난한 동네 아이들과 함께 소매치기를 하고, 싸움을 겁내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던 치열한 삶 속, 정호는 옥희를 보고 첫눈에 반하고 만다.

 

 

정호가 그 여자아이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그가 바구니에서 코스모스 한 송이를 집어 들더니 환하게 웃으며 정호의 얼굴을 향해 그 꽃을 던졌다. 얼굴 위에 부드러운 꽃잎이 떨어지는 순간, 정호는 저 아이가 자신에게 일부러 장난을 치고 있다는 생각에 공포와, 그리고 똑같은 이유로 환희에 빠져들었다. 그의 놀란 마음을 눈치챈 미꾸라지와 영구가 웃음을 터뜨리며 사정없이 놀려대는데도 정호는 그게 전혀 짜증스럽거나 거슬리지 않았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그 자신도 아직 알지 못했으나, 어떤 경이로운 것에 대한 의식이 그의 가슴속 깊이 들어왔다.


- p. 152

 


장면들 속에 인물들의 감정이 너무나 선명히 느껴졌다. 거대하고 사소한 사건 앞에 인물들이 느낀 감정을 살아 움직이듯 전달한다. 그러면 읽는 사람은 직접 그 인물과 하나가 되어 감정이 전이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장내의 소란과 분주한 풍경이 일순간 멈추고 얼굴을 스치며 천천히 떨어지는 꽃잎의 감각만을 느끼는 인물이 그려졌다.

 

인물 간의 사랑과 우정이 나의 것처럼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나아가 요동치는 역사 깊숙이 들어가는 재미가 있었다. 3.1 운동을 계획하고, 함께할 것을 설득하는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독립선언문 읽는 장면에서 오는 감동과 뒤따른 희생에 대한 슬픔, 이어지는 역사적 사건들과 유신 정권까지 이야기는 흐른다. 책으로, 영상으로, 학습하고 이해하는 대상이 되었던 역사가 눈앞에 펼쳐진다.


방대한 이야기, 속도감 넘치는 전개, 살아 움직이는 듯한 입체적인 인물들. 손에 땀을 쥐고 볼 수밖에 없는 『작은 땅의 야수들』이다. 책장을 덮고 나면, 책의 제목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작은 땅을 뒤흔들어 놓은 역사의 소용돌이 앞에, 고난이 반복해 닥치더라도 어떠한 방식으로든 살아남아야 했던 사람들. 끈질긴 생명력, 그리고 수없는 어려움 속에서도 놓지 않았던 삶의 가치와 용기 앞에 그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야수였다.

 

 

 

컬쳐리스트 명함.jpg

 

 

[이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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