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시대를 초월한 배움의 즐거움 - 정조, 화성궐리사를 세우다

글 입력 2022.11.05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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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와 영조의 이야기는 ‘아들을 죽인 아버지’라는 충격적인 결말만으로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서 이준익 감독의 2015년작 <사도>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다양한 작품을 통해 회자되어왔다.

 

누구든 아들을 죽인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여러 가지 자료를 통해 영조와 사도세자 부자가 겪은 비극의 맥락을 파악하다 보면 진한 탄식이 나온다. 숙종의 아들이자 무수리 출신인 숙빈 최씨의 아들인 영조는 아버지 숙종에게 귀여움을 받는 아들이었지만, 왕위에 오르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힘겹게 왕이 된 영조에게 아들 사도세자는 자신보다 훨씬 왕이 되기 쉬운 환경을 갖춘 편이었고, 아들이 장차 훌륭한 왕이 되도록 갖은 노력을 다한다.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기대만큼 총명했지만, 정석적인 왕의 교육만 받기에는 너무나 자유분방한 영혼이었던 것이다. 사도세자는 영조를 아버지로 바라보았고, 영조는 사도세자를 미래의 왕으로 바라보았다. 교육에 대한 영조의 집착, 과도한 엄격함으로 사도세자의 정신은 더욱 쇠약해졌고 그 결과 사도세자가 영조의 살해를 시도하기에 이르러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혀 죽이는 비극이 탄생된 것이다.

 

어떤 이야기든 그 결말이 ‘죽음’인 이상 밝은 분위기일 수는 없다. 죽음보다 더 비극적인 결말이 어디 있으랴. 사도세자와 영조의 이야기를 접할 때면 항상 나는 부질 없는 가정을 떠올리곤 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었다면, 사도세자가 훌륭한 왕으로 성장했다면, 정조가 오랫동안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면 어땠을까. 역사에서 ‘만약에’ 만큼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지금을 사는 우리는 그때는 용납할 수 없었던 애도의 마음을 전할 뿐이다.

 

10월 29일, 수원 궐리사에서 진행된 현장극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런 착잡한 마음으로 극을 볼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책으로도, 영화로도 봤으니 이젠 극으로 조금 더 생생하게 사도세자의 죽음을 안타까워할 수 있겠다고만 생각했다. 막상 실제로 접한 현장의 분위기는 내가 예상한 것처럼 어둡지 않았다. 유난히 맑았던 하늘처럼 희망을 가득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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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극 ‘정조, 화성궐리사를 세우다’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궐리사에 대한 설명을 해야겠다. ‘사’로 끝나는 이름 탓에 흔히들 절로 오해하지만 절이 아니라 공자의 사당이다. ‘궐리사’라는 이름 역시 공자의 고향 ‘궐리’에서 유래되었다. 공자의 64대손인 공서린 선생은 배움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해야 한다는 공자의 가르침을 본받아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는 사당을 세웠지만, 공서린 선생이 생을 마감하면서 사당도 생명력을 잃어갔다.

 

그로부터 200여 년 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는 비극이 일어나고, 아버지를 여읜 정조는 어린 나이에 세상의 쓴맛을 경험해야 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숨죽여 지냈던 정조는 힘겹게 왕이 된 직후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당당하게 선언한다. 아버지가 목숨을 잃는 과정을 지켜보며 당파의 싸움에 신물이 난 정조는 사대부들이 마음대로 주무르지 않는, 오로지 백성만을 위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노론 사대부들이 함부로 방치하고 있던 궐리사를 재건한 것은 정조가 이상적인 국가를 건설하는 데 중요한 업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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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화성 궐리사를 세우다’는 예상했던 대로 사도세자의 설움이 처절하게 표현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사도세자의 죽음’보다 ‘궐리사의 재건’의 배경을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춰 진행되었다.

 

공서린 선생의 궐리사 설립, 사도세자의 죽음, 정조의 즉위와 궐리사 재건 등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여러 등장하지만, 늘어지지 않게 적절하게 요약되어 묘사되었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내용을 담으려면, 더군다나 그 내용이 실제 역사라면 자칫 평범한 교육용 컨텐츠로 남을 수 있는데 극단 ‘정:지’ 배우들의 실감 나는 연기 덕에 충분히 극 자체로 재미있게 즐길 수 있었다.

 

극의 분위기를 환기하는 데는 ‘정령’역의 최규호 배우가 큰 역할을 했다. 아이 관객들도 쉽고 재밌게 즐길 수 있도록 중간중간 상황을 설명하기도 하고 이벤트도 진행하며 극의 해설자이자 행사의 진행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현장극이 끝나고 이어진 <리더라면 정조처럼>이라는 책의 김준혁 저자의 특강은 그날 행사의 화룡점정과도 같았다. 어린 관객이 많은 것을 감안해 최대한 친절하고 유쾌하게 정조와 궐리사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정조가 어떤 마음으로 궐리사를 재건했는지, 궐리사의 은행나무 밑에서 얼마나 많은 인재가 훌륭한 가르침을 받고 학문을 수양했는지 자세히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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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을 들으면서 내가 있는 궐리사의 풍경을 자주 둘러보았다. 몇백 년 전 이 공간을 가득 채웠던 배움의 활기가 피부로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특강을 듣고 밝은 표정으로 자리를 지킨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배움의 즐거움’에 대해 생각했다. ‘배움’이라는 것은 본래 즐겁고 행복을 추구하는 행위다. 영조의 그릇된 집착이 없었다면 사도세자는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를 즐겁게 배우고 공부했을지도 모른다.

 

반지성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 앎의 즐거움은 쉽게 무시된다. ‘무지’보다 무서운 ‘앎에 대한 거부’가 현대사회를 뒤덮고 있다. ‘심심한 사과’를 ‘지루한 사과’로 해석하며 화를 내고, ‘금일’을 ‘금요일’로 착각해 왜 어려운 말을 쓰냐며 화를 내고, ‘사흘’과 ‘나흘’을 구분하지 못해 인터넷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한 평론가의 한 줄 평에 어려운 한자어가 많다며 비판하는 현 사태에 오랫동안 피로를 느껴왔다.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익숙한 세계를 허물고 새로운 세상과 마주하겠다는 용기다. 그 용기는 남이 요구한다고 해서 나올 수 없고, 스스로 그 즐거움을 깨달아야 한다. 궐리사의 은행나무 밑에서 가르침을 전했던 스승과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제자들이 그랬을 것이다.

   

오랜만에 아이들과 가족들이 잔뜩 있는 광경을 보다 보니 삭막한 일상에 생기가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날 정조와 궐리사에 대해 배우게 된 아이들도 남의 요구가 아니라 스스로 깨달은 재미에 의해서 열심히 배우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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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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