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병따개인간

글 입력 2022.10.20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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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따개가 없어 숟가락으로 따려다 뚜껑만 휘어버렸다. 풀리는 일이 단 하나도 없는 하루였다.

 

일진이 사납다면 나름 사나웠다고 할 수 있을 게다. 아침에 눈이 일찍 뜨인 것부터 이상했다. 일도 잘린 마당에 눈이 일찍 뜨여서 좋을 것이 무어냔 말이다. 회사 다닐 때엔 알람 소리조차 제대로 듣지 못했으면서, 오늘은 출근 준비하기에 딱 적절한 시간에 눈이 뜨였다. 기지개를 켜려다 내내 할 일 없는 하루가 썩 달갑진 못해서 다시 잠을 청했다. 그러고 다시 눈을 뜨니 12시 31분이었다. 뒹굴뒹굴하다 이내 커튼을 걷어버렸다. 할 일은 없었으나 계속 누워만 있기엔 스스로가 한심해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누워만 있다가는 도태된 삶을 살게 될 것만 같았다. 삶은 생각보다 관성적이기에, 일어나기라도 해야 한다.

 

믹스커피를 타려다, 볕이나 쬐자 싶어 뭉그적거리며 현관을 나섰다. 실업자 주제에 테이크 아웃 커피라니. 사치일 수도 있겠으나 근 2년간 들인 습관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 책상은 누가 대신 쓰려나. 손쉽게 갈아 치워진 부품이 된 것만 같은 기분에 맑은 볕과 달리 내 속은 순식간에 침울해졌다. 느닷없이 나타난 고양이가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자리를 잡는 모습을 보지 못했더라면 종일 우울했을 테다. 마음이 풀릴 수밖에 없을 만큼 귀여운 점박이 고양이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현관에 들어서자 정적만이 가득 들어찬 집이 나를 반겼다. 이 고요함을 혼자서 버티기엔 또 우울해질 것만 같아 노래를 틀어 놓고 의자에 앉았다. 침대에 너무 눕고 싶었지만, 침대에서 천장을 보는 순간 어떤 기분이 드는지 문득 기억이 났기에 꾸역꾸역 의자에 앉았다. 낮에 보는 천장은 무력감을 동반한다. 바깥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바쁜데 방 안의 나만 쓸 구석도 없어 노닥거리는 것만 같은 기분을 양분으로 무력감은 스멀스멀 차오른다. 나 홀로 할 일도 없고 쓸모도 없는 인간이 된 듯한 비틀어진 자각에서 비롯되는 감정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 그러한 감정을 이기는 법을 모르기에, 최대한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쓸모가 없다기보단 누구나 갖고 있는 정도의 쓸모만을 갖춘 인간이겠지만, 어쨌든. 그러니 갈아치워졌겠지. 책상 위의 개인 물품만 치우면 지워지는 게 나라는 사람이니까.

 

구직 사이트만 뒤지다 구직 지원금을 찾아보았고, 알바 앱을 뒤져보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어젯밤 읽다 말았던 <편의점 인간>을 마저 읽다 바깥을 보니 어느새 해가 어기적어기적 움직이고 있었다.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슬슬 저녁거리를 사 와야 할 것 같아 밖으로 나섰다. 요즘 편의점은 내 지갑으로 감당하기에는 물가가 높기에, 5분 더 걸어 마트로 향했다. 두세 바퀴 돌아보았지만, 입맛이 끌리는 것이 없었다. 기분이 안 좋다고 식사마저 빈약하면 몸이 망가진다는 친구의 잔소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슬리퍼를 끌며 하릴없이 걷다, 대충 즉석식품 코너에서 할인 중인 치킨팩을 집어 들고 주류 코너로 향했다. 이왕 먹는 거 호화스럽게 먹어보자는 심보였다. 캔맥주와 병맥주 중 고민하다, 굳이 얇은 지갑에서 만 원을 더 꺼내야겠나 싶어 병맥주를 장바구니에 넣었다. 만약 캔맥주 할인행사에 홀렸다면, 굳이 봉투를 사 가며 네 캔을 들고 왔겠지. 과하지 않은 소비에 혼자 뿌듯함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도 몰라줄 나만의 뿌듯함이었다. 버는 돈은 없으면서 한 끼에 만 원이나 넘게 썼다는 점이 거슬렸지만, 뿌듯함으로 한 끼 저녁을 포장하기로 했다. 배달시켜 먹지 않은 게 어디야. 그랬으면 배달팁도 어마어마했겠지.

 

식탁을 펴고 저녁식사에 곁들일 영화를 찾아보았으나 구미가 당기는 것이 없어 대충 예능을 틀어 놓았다. 맥주 뚜껑만 따면 저녁 준비는 끝난 셈이었다. 병따개를 찾아 수저 통을 뒤졌지만 병따개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병따개에 발이라도 달렸나. 매일 있던 곳에 없을 것은 무어람. 아쉬운 대로 숟가락으로 뚜껑을 따려 시도했지만 뚜껑은 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열릴 듯이 휘기만 한 뚜껑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울적해졌다. 겨우 이런 일로 기가 죽어야 하나 싶어 짜증이 나다가, 이내 서러워졌다. 할 일이 없어 서러웠는데 할 수 있는 일도 없는 것만 같아 서러웠다. 되는 일이 없는 하루였다.

 

 

[이주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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