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생뚱맞은 운명의 사랑스러운 장난 : 낮과 달

글 입력 2022.10.19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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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포스터.jpg

 

 

영화 포스터 속엔 여러 암시가 담겼지만, 보기 전과 후의 느낌이 명확히 다른 문장 하나가 있다.

 

 
"가깝고도 먼 두 여자의 티키타카 제주 라이프"
 


'두 여자의 제주 라이프'에 집중했건만 가장 중요한 단어는 다름 아닌 '티키타카'였다.

 

 

*

아래부터는 내용 스포가 있습니다.

 

 

묵직한 시작이었다. 경차를 몰고 있는 '민희'의 시선이 꽤 비장했으므로. 비지엠 하나 없이 그가 운전하고 있는 모습만 보여주어 왠지 모르게 긴장되었다. 제주도에 혼자, 무슨 일로 왔을까. 그가 남편의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몇 가지 정보를 알게 된다.

 

하나, 민희의 남편은 낚시를 하다 죽었다. 둘, 제주도는 남편의 고향이자 돌아가고 싶은 곳이었다. 셋, 민희는 남편에 대한 죄책감이 상당하다. 특히 그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다는 생각이 민희를 이곳으로 오게 한 것 같다. 유서처럼 남은 마지막 말을 따라가다 보면 무언가 몰랐던 걸 알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그도 그럴 것이, 혼자서는 아무리 머리를 싸매봤자 당사자가 없으니 더는 알 수 있는 게 없다. 누구도 남편의 생각이 나 마음을 대신 전달해 줄 순 없지만, 적어도 혼자서는 답이 나오지 않을 문제이니 말이다. 초반의 민희는 정적이다. 남편 친구에게도 딱히 풍부한 표정을 보이지 않고, 요가 강사이자 카페 사장인 '목하'를 만났을 때도 반응은 풍부하지 않다. 무미건조함과 멋쩍음에 놀라움이 더해진 정도라고 할까. 그러나 좋은 징조이긴 했다. 목하라는 사람은 무진장 밝고 솔직한 것 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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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가드가 직업이라는 민희에게 목화는 보험회사 아니느냐고 다소 저돌적일 수 있는 물음을 대놓고 뱉는다. 사적인 질문도 성큼성큼 들이댄다. 민희는 대답을 회피하지 않지만, 거짓말을 한다. 남편과 아들이 오기로 했다며. 영화 끝자락에서 보면 방어기제는 아니고, 일종의 복선이다. 그의 거짓말에 심각해질 수 있을 법한데 아무것도 모르는 목하는 쾌활하기만 하다. 뭐가 됐든 좋아 보였다. 상대적으로 버석해 보이는 민희의 삶에 좋은 작용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러다 다소 점잖은 분위기가 완전히 뒤틀리는 지점이 이어진다. 바다를 보다가 앞으로 돌진하는 민희와 그를 구하려고 뛰쳐 들어간 목하의 아들, '하경'. 하경은 수영을 못해서 되레 물 빠진 생쥐 꼴이 되었으면서도 민희의 안부를 먼저 묻는다. 다정함으로 비칠 성격이 그 상황에선 어찌나 우스꽝스러운지. 이때 영화의 분위기가 잡혔다. 우리가 아는 아름다운 제주의 풍경을 보여주는 것도, 사별 후 고통과 슬픔을 견디는 이의 숭고한 정신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제주와 사별의 편견을 벗어던지고, 그저 가볍게 관망하면 되었다. 하경이가 유쾌한 목소리로 유튜브 영상을 녹화하듯이.

 

이 이미지를 깨지 않은 채 상황을 지켜보면, 영화 톤이 확 뒤틀렸다고 느낄 지점들이 몇 있다. 아마 민희의 변화가 제일 낯설 거다. 얌전하고 조용한 줄 알았건만 떼쓰고, 앓는 소리나 하고, 삐딱선 타고, 분쟁을 조장하고, 소유욕을 과시하고, 제멋대로 생각하고, 무례하고, 한 마디로 '이상하다'. 그리고 더 이상하게, 사랑스럽다.

 

민희는 하경이 자신의 남편과 목하 사이에서 생긴 아들이란 것을 안 후, 하경에게 심할 정도로 집착한다. 그리고 하경의 반응도 애매한 듯하다. 둘의 관계가 엄마와 아들이라기보단 연인인 것처럼. 마음이 있다, 흔들린다 따위의 말로. 막장인가 싶을 수 있는 대목인데 모든 서술이 민희의 관점에서 전개된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될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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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희가 환각을 보는 듯한 연출이 두어 번 나왔다. 가장 처음은 집에서 나눈 남편과의 마지막 대화이다. 사실 대화 같진 않다. 민희가 일방적으로 매서운 말을 쏘아붙였고, 남편은 별 반응 없이 묵묵했으니까. 그 문밖을 나서면 다신 안 볼 거라는 으름장에도 남편은 밖을 나섰고 그렇게 민희가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두 번째는 남편의 친구와 제주 돌담길을 걸을 때. 남편, 그리고 이젠 옆집 친구나 하경 엄마나 요가 강사가 아닌 남편의 망할 첫사랑으로 각인된 목하의 이니셜이 새겨진 돌을 빼낸다. 그리고 스크린엔 남편, 목하, 하경까지 화목한 세 가족이 걷는 뒷모습을 그려낸다. 혼자 씩씩대던 민희는 그 돌을 환영 속 그들에게 내던졌다.

 

그러니 이상하게 남편처럼 굴던, 의미심장한 하경의 말들도 민희 관점에서는 충분히 그렇게 보일 수 있다. 자신의 상상을 스크린을 통해 우리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라면.

 

이쯤 되어선 마지막 궁금증이 남는다.

 

민희는 왜, 그렇게까지 오버스럽고 부자연스럽고 이상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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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희의 남편은 흔적도 없이 갔다. 그래서 민희는 그가 SNS에 남긴 마지막 말을 유서라 여겼고, 그와 나눴던 마지막 대화가 죽음의 계기라고 믿었고, 그의 핏줄인 하경을 남편의 분신이라고 생각했다. 민희가 헛된 삽질을 막아줄 사람이 없었으니 상상은 끝도 없이 나래를 펼쳤을 뿐이다. 와중에 민희는 자신감을 계속 잃었다. 죽음의 원인도 자신 같은데, 막상 보니 목하가 근사하기만 하다. 모든 걸 다 가진 것 같고, 자신은 모든 걸 잃은 듯하다. 아니, 잃을 게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남편이 돌아가고 싶다던 이곳은 목하의 옆집이었으니 결국 자신은 허수아비 같은 존재가 아닌가 하고.


앞서 말했듯 민희는 해결할 수 없는 생각과 가정이 많은 인물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묵은 감정이 무수하게 억눌렸다. 응어리를 풀지 못해 시작과 끝이 뭔지도 모를 정도로 엉망으로 얽혔다. 그런데 목하의 존재가 그 마음을 자꾸 쿡쿡 찌른다. 의도가 아닌데도 스스로 찌르기도 한다. 그만큼 민희는 답답했을 거다. 자신이 놓인 상황이, 미운 자기 자신이.

 

이때부터 민희는 예의의 경계를 넘어선다. 상처가 될 말을 눈 하나 깜빡 않고서 읊고, 적반하장으로 굴고, 뻔뻔하다 못해 파렴치하다. 이건 남편을 쏘아붙이던 민희와 비슷한데 하나 다른 게 있다면, 목하는 맞선다는 거다. 남편처럼 조용히 자리를 피하거나 무시하지 않고서. 민희가 틀렸다면 왜 틀렸는지, 아니라면 왜 아닌지, 아플 만큼 정확히 짚어낸다. 그래서 민희는 더더욱 불길을 뿜는다.

 

물리적으로 목하의 것(나무와 꽃)을 망치고, 피아노를 미끼처럼 써서 하경을 제 집에 은신하도록 만든다. 목하가 자신의 것을 뺏었다고 생각하니 도로 빼앗아 간다. 민희 입장에서는 기깔난 복수인 셈이다. 무모할 정도로 솔직한 모습이 차라리 낫다 싶긴 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화내고 소리 지르고 떠오르는 대로 말할 기회가 좀처럼 없었을 테니까. 종종 멈칫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민희 스스로 자신을 얼마나 괴롭히고 있는지 깨닫기까지. 자책, 자기애와 자존감의 붕괴, 무력감, 상실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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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하는 말했다. 자신은 지금이 딱 좋다고. 현재에 충실하다고. 첫 만남부터 보여주긴 했다. 요가 수업 등록하라며 신청서 들고 뛰어오던 것부터가. 게다가 요가가 뭔지 잘 모르는데 돈 벌려고 하는 짓이라며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이 정도의 고백이 그저 웃음 요소로 느껴지는 건 민희와 묘하게 닮아서다. 이 얼마나 어이없을 정도로 솔직 담백한가.

 

다만 여유 넘쳐 보이던 목하도 나름의 고민이 있었다. 아들 하경을 혼자 키웠다는 자부심과 애착 때문인지 성인을 앞둔 하경과 물리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분리하길 꺼린다. 어쩌면 하경이 음악 하는 걸 반대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현실에 충실한 만큼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들리는 걸 중시하는 사람에게 음악 하는 유튜버가 직업인 아들은 얼마나 불안해 보이겠는가. 안 그래도 아들 속을 모르겠는데 더 알 도리가 없어지는 거다.

 

결국 이런 면에선 둘이 똑같다. 목하는 하경을 자신의 분신이라 보았고, 민희는 그를 남편의 분신이라고 보았으니. 그런데 하경은 하경이다. 누군가의 핏줄이라고 해서 분신인 게 아니라, 똑같이 하나의 인격체인 거다.

 

선을 넘다 못해 아예 머리 째로 들이 박은 민희를 보자니, 더는 방법이 없어 보였다. 사랑스러움도 정도가 있지 이건 좀 아니다 싶을 만큼 폭넓게 말실수를 해서. 하지만 말했잖은가. 서로를 향해 날선 말을 뱉는 목하와 민희지만, 둘은 별 수없이 서로에게 끌린다. 비슷하니까. 아픔을 느끼는 지점도, 어려움을 느끼는 지점도, 그래서 오묘하게 외로운 지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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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판할 것 같던 둘은 팔씨름으로 종지부를 찍는다. 길어야 일 분이면 끝날 것 같던 경기는 해가 지고, 밤이 깊고, 새로운 해가 뜨고서도 끝나질 않는다. 어느새 둘은 테이블에 마주 보고 엎드려 잠든 채다. 슬쩍 맞잡은 제 손을 테이블 위쪽으로 올려두는 민희를 보니, 이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민희는 사람을 정말 피곤하게 하는데, 그런 면이 귀엽기도 하다.

 

삶은, 그리고 사람은 양면성이 있다. 좋으면서 싫기도 하고, 녹진한 몸을 침대에 누이고 싶으면서도 소중한 사람들과 보내는 밤을 놓치고 싶지 않고, 진심으로 미워하고 싶은데 정이 들어서 쉽지 않아지기도 한다. 보이지 않지만 계속 존재하던, 낮에 뜬 달처럼.

 

제주에서 만난 인연들, 특히 목하를 통해 민희는 깨달았다. 남편의 죽음은 자신 때문이 아니고, 하경은 남편의 분신이 아니라 한 사람이고, 남편이 돌아가고 싶었던 건 그때의 자신이었음을. 쉽게 웃고 쉽게 토라지고 쉽게 풀어지고 쉽게 놀고 쉽게 울고, 뭐든지 가볍고 솔직했던 때로. 민희는 그 과정을 겪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 자신의 자리를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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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하는 목하의 삶을, 민희는 민희의 삶을 살아간다. 민희는 제주를 찾아가지만, 과거의 자신이 그리워서가 아니다. 목하와 하경처럼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서 가볍고 솔직하고, 쉽고 재밌게, 그러니까 현재에 충실하기에 분명히 목적지를 향한다.

 

남편이 남긴 사진 속 동굴에 홀로 쪼그려 앉던 민희는 이제 목하와 나란히 손을 잡고 그 동굴 밖으로 나선다. 사진이라는 과거의 찰나에서 벗어나 현실에서 태동한다. 돈벌이를 찾는다며 해녀가 된 목하와 수영 강사로 활동하는 민희. 물이라는 공통점도 생겼겠다. 이제 서로를 묶어 줄 교집합이 차이점보다 더 많지 않을까?

 



[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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