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커피가 된 계란 [공간]

글 입력 2022.10.18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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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거긴 계란 한 판에 6,000원이라니까. 진짜야.

...

골목 좀만 더 들어가면 내가 살던 반지하 앞에 계란집이 하나 있거든. 거기가 진짜 싼데.

...

근데 거기까지 가는 것도 일이니까 그냥 여기서 사자. 그것도 일이다, 일.


내가 몇 년도에 어느 건물 반지하에 살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앞에 두고 치솟아 오른 계란값에 열변을 토하다 이내 그만두었다. 나도 도대체 언제 적 육천 원을 주장하고 있는가. 반질거리는 4등급 계란 30구에 9,980원. 냉장고에 계란 한 판은 반드시 있어야 안심이 되는 성격 탓에 울며 겨자 먹기로 계란판을 조심스레 장바구니에 넣었다. 주말 낮에 가만히 누워있으면 계란이 얼마라며 잡음이 잔뜩 낀 스피커로 광고하는 계란 트럭도 있는데. 그날은 하필이면 수요일이었고, 계란 트럭은 주말에 오는데 나는 당장 다음날 아침으로 계란 후라이를 먹고 싶던 날이었다. 별 수 없었다. 사실 계란 트럭도 창밖으로 들려오는 소리만 들어봤지 정확히 어느 길을 지나는지 모른다.

 

빨간 벽돌집들 사이에 아래만 회색 시멘트로 칠한 검붉은 벽돌집의 1층. 그곳에 계란집이 있었다. 번지수를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어찌 되었건 내가 살던 자취방 맞은편에 위치해있었다. 주변의 다른 반지하로 이사한 뒤로는 그 골목을 드나들 일이 없었기에 나는 근래 계란집의 물가는 알지 못했다. 그저 마트 가격보다는 저렴하리라 생각했을 뿐이다. 확신에 가까운 추측이었다.


퇴근길이었나. 눈두덩이만 꾸욱꾸욱 눌러가며 피곤함을 견디던 지하철 안이었다. 여느 날처럼 SNS를 보다 서울에서 갈 만한 카페를 큐레이팅한 게시물이 화면에 떴다. 집 주변에 괜찮은 곳 있었으면 참 좋겠는데. 상하 스크롤만 반복하던 엄지손가락이 잠시 멈췄다가 가로 스크롤을 두어 번 해냈다. 그리고 일시정지. 계단에 놓여있는 테이블과 카운터, 카운터 뒤의 큰 몬스테라와 큰 격자의 창문이 마음에 들었다. 그 카페의 리뷰는 전부 ‘노래 맛집’이라는 단어를 포함하고 있었다. 노래 맛집이면 책 읽기도 좋겠다-라고 생각하던 찰나 카페 위치가 눈에 띄었다. 에, 나는 우리 동네에서 이런 카페를 본 적이 없는데.

 

위치를 복사해 카카오맵에 찍어보니 내가 살던 반지하 주택이랑 가까운 곳에 빨간 표시가 찍혔다. 가만히 커피나 홀짝이며 책을 읽는 여유로운 주말을 보내고 싶지만 생활 반경에 마땅한 카페가 없어 슬퍼하던 날이 여럿이었다. 카페 이름을 재차 확인하며 홀로 보내는 주말이 다가오면 반드시 가보겠다고 결심했고, 홀로 보내게 된 주말에 열심히 걸음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검붉은 벽돌집의 1층이었다. 옛 계란집, 현 카페. 나는 왜 아직도 계란집이 있을 거라 생각했을까. 속에서 무언가가 헐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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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뒤로 손님이 있던 탓에 이 골목을 회상할 시간 따윈 주어지지 않았기에 허둥지둥 자리를 찾았고, 이따금씩 바람이 살랑거리며 들어오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운이 꽤나 좋았다. 카페라떼를 주문하곤 자리에 앉아 최은미 소설을 펼쳤다. 여닫이창이 테이블 앞으로 나있어 지나가던 아이가 나를 창 아래에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면 애써 무시해 주기도 했다. 사들인 계란집을 카페로 개조한, 노래에 감각이 좋은 사장님의 커피는 놀라울만치 맛이 있었고, 자리에 앉아있을수록 옛날 계란집에도 이런 창문이 있었나 궁금해졌다.

 

정작 계란집에서 계란을 사본 적도 없으면서 자꾸만 아쉬웠다. 왜 그 가게의 계란은 괜히 더 반질거리고 노른자도 잘 터지지 않는 좋은 품질의 것으로 근거 하나 없이 치부하고 있던 걸까. 단 한 번도 그 가게에서 계란을 산 기억이 없는데, 왜 며칠 전까지 이 사라진 집의 계란이 맛이 좋을 거라 생각했을까. 명확한 기억이 아닌 흐릿한 추측이 사실일 것이라고 맹목적으로 믿은 이유가 뭐였을까. 가게 앞을 지나다닌 게 전부인데, 애초에 말이 안 되는 기억인데. 모든 것이 가늠이 잘 되지 않았다. 출입해 본 적 없는 공간에 대한 그리움은 무얼까 곰곰 해보다 그 계란집을 지나다니는 게 일상이었던 시절의 삶만 떠올라 이내 그만두었다. 시절에 대한 그리움에 가까움을 깨달은 탓이었다.

 

해야 하는 것들은 해내고 하고픈 것들도 어떻게든 다 해내던 때였다. 하루하루 피곤하고 궁핍에 가까운 일상이었지만 그래도 좋았고, 그래서 좋았다. 하고픈 것들을 겨우 해내는 지금과는 확실히 다른, 웃음이 많았던 한 철이었다. 충분히 그리울 만하다고 생각했고, 아직도 그 시절에 멈춰 서있음을 깨달았다. 지나간 시간을 애써 붙들고 있었다. 당시의 내가 그리워서, 동경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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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라떼가 오묘하게 달아 기분이 좋았고, 맞은편에 비스듬히 보이는 능소화 닮은 꽃이 유난히 예뻤다. 이어폰을 집에 두고 와도 될 정도로 기가 막히게 노래를 트는 사장님을 알게 되었고, 좋아하는 작가가 또 생겼다. 모든 게 충만한 시간이었고, 지금이었다. 그리움에 당장의 즐거움을 미뤄둘 수 없는 순간이었다.

 

계란집이 없어졌으니 이젠 군말 없이 마트에서 금값인 계란을 사 오는 저녁을 보낼 테고 주말이면 이곳에 앉아 시간을 보낼 테지. 헐려나간 기억의 자리에 경험이 새로이 쌓였고, 한동안 꽤나 컸던 기억과 현재의 시차가 이제서야 맞는 듯했다. 지나간 시간에서 영영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계란은 커피가 되었고, 반지하에 살던 나는 조금 더 자라 햇빛이 조각처럼 드는 2층에 사는 내가 된 날이었다.

 

 

[이주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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