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여행이 간절하고, 문득 두려울 때 [도서/문학]

이병률, 『끌림』 (달, 2010)
글 입력 2022.09.23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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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떠나는 게 맞을까.

 

거의 충동적으로 제주도행 티켓을 끊고서 뒤늦은 고민에 잠긴다. 예약된 날짜는 겨우 며칠 뒤. 그러니까 갑작스레 태풍이 불거나 지진이 일어나는 천재지변, 혹은 항공사의 무리한 운행으로 인한 기체의 결함과 같은 인재(人災)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나는 곧 제주도 땅을 ‘다시’ 밟게 된다는 소리.

 

‘다시’라는 단어에 힘을 준 까닭은 내가 몇 년 전 떠나온 그곳을 몹시 그리워했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가볼 엄두를 내지 못했었으며, 마침내 이토록 초라한 행색으로 이륙 시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간절한 그리움에는 관성이 함께 자라나서 그리운 상태 그대로 남고자 할 때가 있다. 이 그리움을 감히 깰 수는 없을 것 같은 마음. 잘못 깨뜨리면 영원히 부서져버릴 것 같은 마음. 변해버린 내가 변하지 않은 그곳의 모습을 다시 만나서 실망할까 두려운 마음. 마음속을 흐르는 미세한 이 떨림이 설렘인지, 혹은 두려움인지. 내가 떠나온 그곳은 여전히 아름다울 텐데.


여행이 간절하고도 문득 두려울 때, 이병률의 산문집 『끌림』을 다시 읽는다.


여행이라는 단어로 사람을 성글게 분류해본다. 떠나길 좋아하는 이가 있고, 떠나길 원치 않는 이도 있으며,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이가 있을 것. 아마도 이병률은 세 번째 유형. ‘떠남’에 대한 이중 부정도 아깝지 않을 여행자이자, 떠나지 않고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사람이겠다. (섬세한 시인에게 거친 분류표를 붙이는 일을 용서하길.)

 

그런 이에게 여행은 삶 그 자체이므로, 그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매정한 다짐을 다정하게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


 

내가 걸어온 길이 아름다워 보일 때까지

난 돌아오지 않을 거야

 


여행의 ‘기록’이지만 차라리 여행을 통해 쓴 ‘비망록’에 가까운 이 산문집은 여행을 핑계 삼아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처럼 보인다.

 

이 놀라운 여행자는 여행-삶을 화려하게 예찬하지 않는다. 그의 태도는 유난히 아름다운 그의 문장처럼 무던하고, 담담하며, 단출하다. 여행을 삶처럼, 삶을 여행처럼. 그저 길고 막연하게 펼쳐진 여행의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 여행도 삶도 굳이 앞질러가지 않아도 된다는 깨달음을 위로처럼 넌지시 건넨다.


 

발걸음을 멈춰 서서 자주 뒤를 돌아다본다. 그건 내가 앞을 향하면서 봤던 풍경들하고 전혀 다른 느낌을 풍경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고 지나온 것이 저거였구나 하는 단순한 문제를 뛰어넘는다. 아예 멈춰 선 채로 멍해져서 그 자리에 주저앉는 일도 생겨버리기 때문이다. 내가 뒤돌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냥 뒤로 묻힐 뿐인 것이 돼버린다. 아예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린다. 내가 뒤척이지 않으면, 나를 뒤집어놓지 않으면 삶의 다른 국면은 나에게 찾아와주지 않는다. 어쩌면 중요한 것들 모두는 뒤에 있는지도 모른다.

 

 

여행은 삶과 일탈을 구분 짓는 일이라고, 여행은 삶의 일부를 떼서 버려야만 떠날 수 있는 거라고, 그러니 가진 게 없어 버릴 것조차 도저히 찾을 수 없을 때 여행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내가 고집스레 믿었던 것들이 가을의 햇볕처럼 부서지는 글들을, 혼자서 훌쩍 떠난 여행처럼 마음껏 읽는다. 조금 따뜻하고 다정해진 마음으로, 그리운 그곳에서 그리운 것들을 흠뻑 그리워하겠다는 생각.


+ 짧은 부기

글만큼이나 담백하고 아름다운 사진들도, 마치 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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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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