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능동적인 마침표

뤽상부르 공원에서의 일기
글 입력 2022.09.11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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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환학기의 마지막 달이 되자 마음이 분주해졌다. 파리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숫자로 보이자 우울이 찾아온 것이다.

 

학교 종강도 얼마 남지 않았고, 그렇다는 것은 친구들과 헤어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렇다는 것은 내가 이 도시를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한 달 후면 나를 덮칠 이별에 어떻게든 대비를 해야 했다.

 

이별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 같은 걸 알 리가 없었다. 교환학생으로 파리에 와 겪었던 모든 일들이 처음이었듯, 파리와의 이별도 난생처음이었다. 한 도시를 통째로 나의 동네로 만든 후 홀연히 떠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는 벌써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아직 밟지 못한 파리의 땅이 너무 많은데. 첫 달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다음에 가면 되지 뭐’의 업보를 다 청산하기에 한 달은 너무 짧게 느껴졌다. 여행자가 아니라서 누릴 수 있었던 여유를, 정도를 모르고 너무 부린 내가 미웠다. 남은 날들은 절대 허투루 보내지 않을 거야. 눈물 젖은 다짐을 하며 밤을 지새웠다.

 

우울과 다짐의 밤이 지나고 날이 밝자 어김없이 학교로 향했다. 프랑스어 수업을 듣고 다음 수업이 있는 친구들과 헤어져 홀로 학교 앞 뤽상부르 공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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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워지기 전에는 많이 왔었는데 그간 다른 도시로 여행도 가고 파리의 새로운 장소들을 탐닉하느라 뒷전이 되었던 뤽상부르. 공원에 들어서자마자 눈물이 찔끔 났다.

 

나무는 앙상하고 꽃은 시들었지만, 초록색 의자와 거기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은 그대로였다. 새로운 장소가 아닌 추억이 깃든 공원을 쳐다보고 있으니 왜인지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온 기분이 들었다. 느리게 걸으며 공원을 눈에 담는데 문득 파리와 느리게 이별하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어느 할아버지가 죽고 나서 슬퍼하는 장례식은 의미가 없다며 살아생전에 장례식을 치르는 방송을 본 적이 있다. 그가 직접 쓴 장례식 부고장의 마지막 줄에는 이런 문장이 적혔다.

 

‘능동적인 마침표를 찍고 싶습니다.’

 

능동적인 마침표. 나도 그러기로 했다. 떠나는 날에 몰아서 슬퍼하지 말고 지금부터 조금씩 슬퍼하기로 했다. 나는 본디 부정적인 감정을 쥐고 있는 것을 어려워해서 슬픈 감정은 가능한 뒤로 미루고 한 번에 슬퍼하는 사람이지만,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늦어버린 감정은 후유증이 심하다는 건 몇 번이고 겪어봐서 아니까.

 

느리게 이별하면서 늘 슬픈 마음을 쥐고 있으면 남은 시간 동안 더 애써 추억을 쌓고 더 애써 기억하게 될 테니까. 슬픔만이 움직일 수 있는 영역이 있으니까. 초록 의자에 앉아 이 마음을 적었다. 핸드폰이 있음에도 수기로 적은 것은 이 감정을 잊지 않겠다는, 더욱 진하게 남기겠다는 능동적인 다짐의 표식이었다.


*   

 

느리게 이별하기로 했다.

 

날이 좋아 오랜만에 뤽상부르 공원에 왔다. 몇 번이고 온 곳이라 새롭기보다는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온 기분이 들었다. 공원을 쭉 둘러보는데 문득 지금 나는 파리와 느리게 이별하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능동적인 마침표를 찍고 싶다며, 죽고 나서 슬퍼하는 장례식이 아닌 살아생전의 장례식을 연 어느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능동적인 마침표. 나도 그러기로 했다. 떠나는 날에 몰아서 슬퍼하지 말고 지금부터 조금씩 슬퍼하기로 했다. 슬픈 내 마음은 원동력이 되어 나로 하여금 이곳을 힘써 기억하게 할 것이다.

 

느린 것이 늦은 것보다 낫다.

 

- 12월 8일 오후 1시 5분. 뤽상부르의 초록 의자에서

 

*

 

눈시울이 붉어지기를 반복하며 일기를 쓰고 있는데 옆에 앉은 어느 노신사께서 가방과 신발이 잘 어울린다며 칭찬의 말을 건네왔다. 우울할 틈을 주지 않는 파리에 금세 기분이 좋아진 나는 일기를 다 쓰고는 오래전부터 미뤄뒀던 로댕 박물관으로 향했다.

 

날은 여전히 맑았고, 시간은 아직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능동적인 마침표의 첫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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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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