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필름보다 짧은 유통기한 [문화 전반]

3개월보다는 더
글 입력 2022.09.05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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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미케비치

 

 

내가 좋아하는 영화에는 카메라를 든 여자들이 나온다.


캐롤의 테레즈, 윤희에게의 새봄, 클로저의 안나. 렌즈를 통해 누군가를 바라보고, 셔터를 누른다. 영화는 카메라 렌즈를 통해 피사체를 바라보는 시선을 공유해준다. 그들의 뒤에 서서 그들이 어떠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지.


아름다운 것만 찍고 싶어 인물 사진을 찍지 않았던 새봄이 처음 엄마 윤희를 찍고, 테레즈는 내내 사물 사진만 가득하던 작업실에서 캐롤의 사진을 현상하기 시작했다. 안나는 자신이 호감을 느꼈던 남자의 애인이 자신을 찾아와 눈물 흘리는 모습을 찍었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은 짧고 단호하다. 파인더 너머로 보던 피사체를 직접 다시 눈으로 담는 과정에서는 진득한 애정도 묻어있다. 나는 더 이상 사람을 담지 않는데도, 그들의 얼굴을 보면 카메라를 다시 만지작 거리게 된다.


얼마 전 비비안 마이어 사진전 리뷰를 위해 쓰려던 글의 서문이다. 그의 사진 이야기보다는 내 사진 이야기에 쓰는 것이 맞는 것 같아 조용히 삭제 버튼을 눌렀던. 어쨌든 사진전을 다녀와서는 겨우내 잠들어있던 카메라를 꺼냈다. 꺼내봤자 당장 사진을 찍으러 나갈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소홀했던 것이 미안해져서 꺼내서 전원도 켜보고 렌즈도 닦아줬다. 그새 먼지가 쌓인 모습이 짠하다.


최근에는 무엇을 찍었더라. 카메라를 내려두고 휴대폰 앨범을 열어봤다. 대부분이 길에서 보낸 시간이라 담긴 것은 지나가는 시간뿐이었다. 여름이 지나가는 것을 찍었고, 부쩍 높고 푸르게 변한 하늘을 찍었다. 길게 드러누워 낮잠을 즐기고 있는 고양이를 찍었고 햇빛이 드는 선반을 찍었다. 디지털은 쉽게 기록하고, 또 쉽게 지울 수 있으니까 늘 앨범은 과부하 상태다.


필름사진은 조금 다른 이야기다. 필름으로는 주로 인물을 찍었다. 취미로 시작한 필름사진 36롤 중 20컷 이상이 사람이었다. 그때는 필름이 저렴할 때라 이것저것 다른 필름도 시도했다. 후지, 코닥, 아그파, 울트라부터 흑백까지. 주로 친구들과 가족을 찍었다. 휴대폰이 아닌 기기 앞에서 낯설어하고 신기해하는 그들의 모습을 담으면서 하나둘 필름을 쌓아갔다.


필름의 매력은 찍는 순서대로 축적되는 시간과 불규칙적인 결과물이다. 필름이 다 돌아갈 때까지 결과물을 확인할 수 없다. 빛이 어땠는지,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도 확인하지 못한 채 필름이 다 돌아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렇다고 원하는 대로 사진이 나오지도 않았다. 필름이 제대로 감기지 않아서 아까운 필름이 전부 날아가 버린 적도 있었고, 눈을 감고 나온 사진도 있었다. 현상하고 나면 같은 구도에서 찍힌 여러 장의 사진이 쏟아지기도 했다. 제대로 플래시가 터지지 않아서 빛에 먹혀버린 사진들이 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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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날 동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필름사진을 꽤 즐겨 찍었다. 뭔가에 쉽게 질리는 나로서는 의외의 취미가 생긴 셈이다.

 

따뜻한 노이즈가 자글자글하게 박힌 사진 결이 좋았다. 유럽에서는 가까이 서 있는 사람들의 허락을 받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빛이 좋으니 어디에서 카메라를 들어도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었고, 내가 붙들어 맨 시간의 아름다움은 기대보다 훨씬 영롱했다. 36롤 중 10장만 건져도 흡족했다.

 

현상한 필름이 15개를 넘기고 나서, 그러니까 약 4년 정도가 지나고 나서는 인물사진을 찍는 빈도를 줄였다. 이제는 필름 1개 당 사람 사진은 고작 5~7개. 딱히 이유가 있었던 선택은 아니었다. 굳이 꼽자면 담고 싶은 것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만나는 사람이 없어서.


최근에 덧붙여진 이유를 꼽자면 처음에는 매력이라고 느꼈던 느린 시간이다. 필름은 내가 사람과 쌓는 시간보다 훨씬 느리게 채워진다. 조금 답답할 수는 있어도 문제가 되는 사항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과 지낼 수 있는 유통기한이 필름보다 짧다면, 그래서 그 사람과는 아무 사이가 아니라면 가끔 문제가 된다. 나는 예기치 못하게 필름에 남아버린 그 사람과의 시간 앞에서 당황스러운 얼굴을 할 수밖에 없다. 그 필름 사진은 주인에게 전달되지도 못하고, 환영받지도 못한 채 덩그러니 남아 나와 멋쩍게 얼굴을 마주 보아야 한다.


필름에 기록된 사진은 오염이 되지만 않으면 몇 번이고 다시 현상할 수 있다. ‘시간을 도려내서 만든 도장이나 다름이 없구나.’ 하고 생각했다. 햇빛에 비추면 정말로 도장만큼 작은 사진들이 다닥다닥 줄을 서 있다. 그리고 그 사이 점처럼 박힌 장면들이 내 다른 기억들과 팔짱을 끼고 버티고 있다. 어디 지울테면 지워보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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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니는 필름 현상소는 3개월이 지나면 필름을 폐기한다. 그 사람이 그 필름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다른 시간과 추억들과 묶여버린 그를 별도로 제거할 방법은 없다. 외면할 수도 없다. 3개월이 지나기 전에 필름을 가지러 가야 한다. 그 하나 때문에 포기할 수 없는 다른 기억들을 위하여.

 

가끔은 웃음이 난다. 필름보다 짧은 유통기한이라니, 얼마나 가볍고 초라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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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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