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제주에서 쓴 편지 - 정욱씨에게

정욱씨에게
글 입력 2022.08.28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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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씨, 내가 이야기해볼 거리 중 당신이 아실만한 게 뭐가 있을까요? 아, 나는 드디어 나의 가죽 수첩에 걸맞은 만년필마저 안기어주곤, 함께 첫 여행을 떠나왔습니다. 종로 스케치 4, 인사동 편에서 소개한 그 수첩입니다, 기억이 나실런가요. 지금 여기는 제주 밤바다 앞이구요, 제주공항 바로 북쪽 머리에 위치한 용담포구 어귀입니다. 만년필로 쓰는 글씨는 더욱 엉망이군요. 여행 출발 직전 손수 퍼담아 채운 잉크가 괜스런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만, 우리의 전자 서간에 이 악필마저 담기진 않을 것이기에, 또 손수 채운 잉크가 아쉬워 부러 쓰고 있습니다.


낮에는 아직 미완성된 '루 살로메1'을 실컷 쓰다가 왔습니다. 그러나 제주 바다 용담포구에 이르러 그것을 마저 쓰려 하니 마음이 영 동하질 않아서요. 여기가 제주 북단이라고 치자면은 내가 지금 바라보는 방향으로는 육지와 여러분이 잠들어 있을 까닭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그 글에는 밤바다의 짭조름함과 수더분함, 고요함 같은 것이 끼일 자리가 없어서 그렇기도 합니다. 너무 눌러썼거든요. 여하간 그래서 제주도에서 쓰는 첫 글이자, 내 가죽 수첩과의 첫 여행기이자, 서툰 만년필의 글씨 연습으로는 서간문을 택합니다.


그러나 서간을 쓰기에는 내가 당신에 대해 아는 게 없군요. 그 사실만이 지금 명징해집니다. 그렇다면은 이 순간으로부터 당신은 내게 탐구 대상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시 뭍으로 가 사랑하는 나의 서재에 당도하면은, 제일 먼저 할 일이란 당신에 관한 탐구가 될 터입니다. 그때까지는, 아직 바다와 여행과 일정들을 끼고 있는 제주 안에서는 내 이야기나마 들려 드려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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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는 지평 가득 불을 밝혀 두었습니다. 저만큼 지척에 벌써 육지가 있을 리는 없을 테니 아무래도 뱃무리겠는데, 아쉽게도 내 짧은 식견 안에 그런 배는 오징어잡이 어선뿐이라 자신 있게 말해 보일 수는 없겠습니다. 나는 이 앞에서 가만히 앉아 치어다보는 중입니다. 성냥팔이 소녀가 그러했듯, 무언가 작은 프레임 안에 어여삐 갇힌 불빛을 바라보는 일은 꿈이나 소망 등을 틔워 올리는가 봅니다. 오늘 동행한 친구가 깜짝 고백을 했습니다. 곧 카카오페이지에 자기가 쓴 웹 소설이 런칭된더래요. 질투는 추호 나지 않았습니다만, 왜냐하면 그 길은 내가 꿈에서도 가볼 수 없는 길이기에, 그렇지만 나의 꿈이 덩달아 고개를 쳐드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일 텝니다. 그래서 여기 앞에 자리해 나는 나의 글을 쓰고 있고, 저기 뱃무리들이 틔워올리는 작은 빛들이 내 꿈을 더 지피어 올리고… 나는 마침내 정욱씨 생각이 나 편지를 씁니다.

 

그건 참 느닷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무런 표지도 강조도 되어 있지 않은 여느 때 같은 평일, 사무실에 도착해 컴퓨터를 켜곤 벌써 산적한 일들과 미루어 기 쌓아놓은 일들을 체크하며 밭은 한숨을 내쉬던 참이었습니다. 카카오톡을 좀체 주고받지도 않고 업무 관련 카톡방의 알림은 모조리 꺼두었기에, 모니터 우측 하단에 메시지가 뜨는 일은 되게 드문 일입니다. 그러니 나는 그 별다를 것 없는 아침, 정욱씨가 보낸 카톡은 자체로도 놀라움일 따름이었습니다. 종로스케치를 다 읽으시고 제게 보내주신 카톡을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정욱씨께 얼마만큼의 반향인지, 고로 얼마만큼의 감정인지를 다 몰라서 아직 기억하실는지, 하신들 얼마나의 환희로 기억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카톡은 나의 많은 것을 바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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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스케치에서도 거듭 써두었듯, 나는 올해를 기하여 너무 많은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쓸 수 있는 글이 그것이었고, 이젠 그 글이 또 다른 계기가 되어 지금 빠르게 변하고 있는 내게 박차를 더하는군요. 이건 참 기묘한 일입니다. 주신 찬사가 그리 소비되고 말, 혹 기억의 바닷속을 찬찬히 가라앉을 정도로 가볍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의식 속을 어른거리는 한가지 미약한 생각을 다짐과 의지와 신념으로 바꾸려고 합니다. '나는 언젠가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그 아름다운 글을 이 손으로 쓸 것이고, 단단히 소유하고 무궁히 창조하리라'는 신념으로 탈바꿈하려고 합니다. 눈치채실 수 있듯, 내적 준비는 이미 끝나 있었고 내게는 오직 계기만이 필요했음에. 갈구하는 눈 위로 마침내 그 계기가 걸려들었습니다, 환희의 강보 안에 살포시 싸인 채로.


정욱씨가 내게 준 것은 이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드릴 것이 없어 감사편지 몇 자나마 돌리어 드립니다. 기왕 쓰는 거 비밀 한 가지 더 써볼까요.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작년까지 내 안에는 내가 너무 많았더랍니다. 지나칠 정도로요. 감정과 생각이 많다는 것은 적어도 글쟁이로선 복된 것으로 치부하실 수도 있겠지만, 지나친 경우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마치 모니터 한가득 수십 개의 프로그램 창이 바이러스라도 걸린 양 어지러이 흐드러지는 느낌입니다. 그 경우엔 아무것도 똑바로 치어다볼 수도, 인식할 수도 없거든요.


그래서 작년까지의 내 글은 알아볼 수 없는 암호문 같았습니다. 그리고 십수 년의 우울이 그치고, 내 안에 생각과 감정들이 조금 사그라들어 공간이 마련되니, 비로소 글은 읽을 수 있는 것이 되어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 즉 지금까지의 장장 5년에 달하는 습작이 끝났고 나의 글은 올해를 원년으로 비로소 시작되었다는 것, 그리고 계기를 맞았다는 것, 이게 그 심심한 비밀입니다.


**


이튿날이에요. 이게 서간인지 기행문인지 모르겠지만, 이만큼 써두고도 아직 마음 안에 무언가 남은 것 같아서 계속 써나갑니다. 느지막 아침을 맞곤 오늘은 월정리를 갑니다. 택시를 타고 제주 시내로 나왔습니다. 어느 지역이건 택시기사님은 그 지역의 것들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의 하나인 듯합니다. 어제 남은 의문, 연안의 밤을 밝히던 그 뱃무리는 무엇이었던지, 물어보니 한치잡이 배라고 답해주셨습니다. 외지인에 대한 관심이 많은 기사님이셨던 것 같습니다. 예기치도 못한 것들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때 내 시선은 멀리 파란 하늘에 걸리어 있었는데, 바로 앞을 수놓아 시계 視界를 반쯤 가리던 가로수들을 가리켜 저것은 후박나무라고 알려주었고, 곧 지나치게 될 거리엔 고기 국수가 맛있다고도 말해주었습니다. 나는 그런 말들이 참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예기치 않은 것, 그러면서도 어딘가 유익한 것, 그래서 받고 나면 선물 같은 감각을 주는 것. 어제 이미 실컷 이야기해서 좀 겸연쩍지만, 그 대목을 지금 생각할 적에 어렴풋 정욱씨와 재훈씨가 생각나는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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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사이트를 생각할 적에, 이제는 재훈씨가 가장 먼저 떠오르고 그다음 정욱씨가 생각납니다. 혹여 오해는 마세요. 그건 그저, 재훈씨를 몇 번 더 보았기 때문인 자연스러운 일이니까요. 그래도 못내 이 쓸모없는 부연설명이 못마땅하시다면은 재훈씨의 이름을 검색해 인터뷰 하나를 읽어보셔요. 아직 우리가 서로를 대하여, 서로 글로써 남기어 두지는 않았기에… 그래서 이번 시간은 우선 내게 정욱씨를 글로 남기는 행위이고 정욱씨에게 나를 발신인으로서 남기는 행위이기도 하겠습니다.


마지막 만남을 기억합니까? 10회 아트인사이트 오프라인 모임이자, 내 첫 오프 모임이었던 그날, 마치고 나오는 길, 저녁을 먹자는 핑계로 아직 해가 저물기에는 한참 남은 시간 앞을 머뭇거리던 우리를. 우리 셋이 처음 마주 앉은 그날을. 나는 그 날 너무 들떠서, 신이 나서, 나답지 않게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건 다시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에요. 나의 왕성한 에너지가 들뜨는 기분을 마셔버리면, 결국 참아내지 못하고 눈과 입과 모공을 통해 와르르 쏟아지는 일이 왕왕 있곤 했지만, 그걸 여러분이 아실 리 없으니, 애초 그 날의 내가 얼마나 나 자신에게 낯선지조차 아직 여러분이 다 아시진 못할 테니.


그래서 아직 더 많은 시간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모두 알고 있는 내가 그 날 여러분을 대하던 모습은 낯섦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래서, 내가 아트인사이트를 생각할 적에 재훈씨와 정욱씨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에겐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아마 그런 시간은 앞으로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그렇게 믿을 수가 있습니다.


나는 불신자입니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부정편향적인 사람이라는 말이에요. 무언가 미지의 것을 그려보면 동시에 생겨나는 긍정의 미지와 부정의 미지가 있을 테고, 나는 그럴 때마다 부정적인 편을 더욱 골몰해 보곤 합니다. 까닭인즉 긍정적인 것은 미리 떠올려 대비할 필요가 없었으며, 그것은 아주 미약한 기대감만으로 두면 그만일 까닭입니다. 그것이 미지이기 때문에, 그것이 알 수 없는 것이라서 나는 그러합니다. 긍정적인 미지, 그것은 오히려 미약한 것으로만 남아있도록 내리눌러야 하는 것이곤 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날개라도 돋운 양, 한없이 커지고 날아오르려고 하거든요. 그래서 나는 부정편향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혹여라도 걱정은 마세요. 나는 긍정적인 미지를 억제하는 만큼, 부정적인 미지를 억제해야 하는 까닭을 아주 잘 알고 있거든요. 그래서 말하고 싶었던 것이란, 이런 내가 우리의 앞에 놓인 시간들, 즉 미지의 시간들을 생각해보면, 거기 아주 충분한 만남의 시간들이 있으리라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재훈씨가 내게 준 것과 정욱씨가 내게 준 것으로 말미암는, 말인즉 까닭 있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런 조용하고도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들을 써 여러분께 돌리어 드립니다. 그리곤 이것이 다시 말미암아 여러분께 나의 그것과 비슷한 믿음을 틔워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우리 서로가 이렇게 단단히 믿게 된다면, 지금 그려본 긍정적인 미지, 그러니까 우리가 앞으로도 꾸준히 만나고 꾸준히 서로 궁금해하고 마침내 알아가기를 바라는 이 모든 것들에 수반되는 미래의 시간들과 그 기대가 차츰 가능성을 덧대가기를 바랍니다. 그 미지가 실제의 것으로 현현할 수 있도록 나는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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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들이 담기어버렸군요. 한번 정리하고 슬슬 마무리를 보아야겠습니다. 여남은 것은 다음번 만나서 이야기하면 될 테니까요. 조금 장난스럽게, 우리가 고등학교 국어 수업시간에 글을 접하던 방식으로 요약해볼게요. 결국 이 글의 주제는 '친하게 지내요'이고 논지는 '고마워서요'입니다. 나는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이렇게나 긴 글을 쓴 셈이군요. 하지만 저 두 가지 간단한 말만으로 담아낼 수 없는 것이 세상에는 많으니까요. 그래서 글 쓰는 것이 가치로운 것이고, 글 쓰는 우리를 나는 자랑스레 생각합니다.


이 편지가 우리의 사이에 놓인 긴 시간들을 조금 단축해주는 역할을 맡아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럼에도 그 사이에는 여전한 긴 시간적 거리가 남아있습니다. 내 생각하기에 내가 참 복잡한 사람이라서 그래요. 정욱씨에 대해서는 아직 아는 게 없어, 차치하고서라도 그렇네요. 그래도 쓴 만큼은 가까워졌으리라는 것, 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다음 번 종로로 모험을 떠나고 싶은 때 재훈씨께 연락을 드리기로 했어요. 이제 처서가 지났고 곧 가을바람이 붑니다.


열기가 온 거리를 가득 막던 계절이 지나버렸고, 가을바람이 그 진득하고 매캐한 열기를 살라버리면 곧 아득히, 투명한 길은 열리곤 합니다. 여름내 서재를 맴돌던 나는 이제 장대하게 열려버린 공간감 앞에서 잠시 공황하고, 결국 홀린 듯 이끌려 나아가게 될 것을 미리 압니다. 계속이 불고 있는 바람이 옥상 서재의 내 등 뒤를 부딪어 곧 어디로든 나아가게 만들 예정이에요. 모험과 수확의 계절, 나는 이걸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역시나 제주에서 돌아와 김포공항에 첫발을 딛는 그 순간, 가을 바람이 먼저 도착해 있었음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나는 벅차는 중 어딘가 서글퍼지곤 했지만서도, 한 가지 기대로 그 감정을 가로막습니다.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가을 종로에서 보아요.


 - 08/25 제주 2일차, PM 11:52, 북촌리 '서점숙소', 발신인 서상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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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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