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잘.못.했.다.고 말하세요

S선생님께
글 입력 2022.08.2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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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하다

(형용사) 죄스러울 정도로 미안하다.


잘못하다

1. (동사) 틀리거나 그릇되게 하다.

2. (동사) 적당하지 아니하게 하다.

3. (동사) 불행하거나 재수가 좋지 아니하게 하다.

 

 

S선생님께.

 

우연히 짤막한 뉴스 기사를 접한 후 그날의 기억이 문득 떠올라, 일면식 없는 선생님의 성함 앞에 삼가 글월을 올립니다.

 

 

"부산 노동자 32%가 감정노동…80% 주 1회 이상 권익 침해" (연합뉴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선생님. 분명 안녕하셨으리라 믿습니다. 기력이 쇠하셨다면 이른 아침부터 그토록 성난 목소리로 힘차게 전화를 거셨을 리가 없을 테지요. 그날 아침, 선생님은 이미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전화를 거셨습니다. 저희 회사가 제공한 재화에 결함이 있었기에 분명 ‘고객’으로서 화가 나셨겠지요. 저희도 다른 기업의 고객이자 소비자이기에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정중하게 응대하고자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부족한 저의 업무 파악 능력으로 말미암아 불편을 드린 점,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정확히 15분이었습니다. 아침 9시 정각에 전화가 걸려왔고, 전화를 끊고 시계를 보니 9시 15분이었습니다. 긴 연휴가 끝나고 출근한 첫날의 피곤한 아침, 저는 커피를 내려 자리에 앉은 후 15분 동안 커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선생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선생님의 장황한 연설과 화풀이에 가까운 비난과 뫼비우스의 띠처럼 빙글빙글 도는 지루한 단어의 반복을 견뎌야 했지요. 14분 20초가량을 끝없이 크레셴도 되었던 선생님의 언성은 거듭되는 저의 사과와 조아림 후에야 겨우 잠잠해졌고, 선생님은 끝끝내 담당자의 전화번호까지 받아낸 후에야 전화를 끊으셨습니다.

 

선생님, 저보다 훨씬 오랜 사회생활 경력이 있으실 테니 더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만, 같은 회사 안에서도 구성원들은 각자의 업무를 나눠 맡고 있습니다. 회사라는 유기체를 잘 움직이기 위해 모든 구성원들은 우선 개인이 맡은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고 있지요. 따라서 아무리 작은 회사라도 일개 직원이 회사 내 모든 업무를 파악하긴 쉽지 않습니다. 하필 저는 그런 일개 직원일 따름이었고, 그렇기에 선생님이 원하는 답변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담당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다, 담당자가 현재 부재중이니 다시 연락드리겠다는 답변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시원스럽고 확실한 답변, 조금 더 친절하고 자세한 답변을 바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제 어리석은 답변에 대한 선생님의 가르침을 다시 곱씹어봅니다. 선생님께서는 저의 부족한 고객 응대 능력이 당신이 화가 난 원인이라며 더욱 화를 내셨습니다. 한 차례 일어난 화는 마른 겨울 산의 불길처럼 화를 더욱 번지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통제하기 어려운 감정의 격렬함이 수화기 너머에서 느껴졌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가까스로 존댓말을 붙잡고 계셨지만, 분노에 찬 목소리로 분명 제게 “잘못했다고 말해야지”라고 하셨습니다. 성난 선생님께서는 연거푸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던 제게 ‘죄송하다’고 뭉개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어서 ‘잘못했습니다’라고 또박또박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느냐며 꾸짖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화기를 손으로 막고 한숨을 짧게 내쉰 뒤, 입술을 꼭 깨물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잘.못.했.습.니.다.선.생.님. 자신의 잘못을 정확한 언어로 인정하라는 선생님의 깊은 뜻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죄송합니다’와 ‘잘못했습니다’의 차이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결국 국어사전을 뒤적였습니다. 물론 지금도 두 단어의 오묘한 이질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잘못했습니다, 선생님.’이라는 말을 내뱉는 순간 한결 끔찍하고 묘한 굴욕감을 느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아마 선생님께서 요구하신 언어는 동사 ‘잘못하다’의 세 번째 뜻이 아닐까 짐작할 뿐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살아낸 그 삶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내가 모르는 어떤 것을 아는” 사람이므로, “누구나 다른 누구에게 선생”(신형철, <누구나 누구에게 선생님>, 한겨레신문)이라는 한 평론가의 말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공직에 40년을 계셨다는, 아마도 나이가 적지 않을 선생님을 저는 처음부터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당신이 “모르는 어떤 것을 아는” 저를 애초에 골칫덩이 학생처럼 대하셨지만요.

 

그날 아침 선생님께서는 제게 사회생활의 쓴맛과, 어떠한 굴욕도 견뎌내는 인내와, 공직자라는 직함의 빳빳함을 가르쳐주시는 데에 성공하셨습니다. 하지만 어른의 품격과, 따뜻한 인품과, 포용의 미덕을 가르쳐주시는 데엔 확실히 실패하셨습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사사하는 데 실패하신 그 지점에서부터 철저히 배우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날 당신께서 제게 가르쳐주신 것은 그것입니다. 그 순간 당신은 저의 선생님이었습니다. 당신은 제게 선생님이었으나 저는 당신에게 선생님이 되는 일에 장렬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모로 정진하겠습니다.

 

선생님의 존함 앞에 ‘존경하는’ 따위의 미사여구를 굳이 덧붙이지 않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날 제게 서늘하고 차디찬 정확함만을 가르치셨으니, 선생님께 감히 거짓을 아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지는 날씨입니다만, 앞으로도 뜨겁게 건강하시길 멀리서 빌겠습니다.

S선생님,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트인사이트 명함.jpg

 

 

[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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