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서랍 속에서 꺼낸 나를 만나는 시간 - 서랍에서 꺼낸 미술관

서랍에서 꺼낸 미술관, 이소영 (2022)
글 입력 2022.08.22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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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이 시의 한 구절쯤은 마음 한구석에 콕 박혀 있을 것만 같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 중 일부

   


책을 읽어내려가는 내내 머릿속에서 이 시가 떠올랐다. 그 까닭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이소영이라는 저자를 통해 새로이 알게 된 아웃사이더 아티스트들이 내 마음에 들어와, 비슷한 경험의, 또 다른 내 마음속 숨겨놓은 내 모습을 끄집어 놓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들의 인생을 단지 몇 장의 페이지로 압축시킬 순 없겠지만, 그들의 작품을 통해 엿보는 삶의 이야기가 매우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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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총 4부로 진행된다. 1부에서는 [내 삶을 바꾼 아웃사이더 아티스트들]라는 제목으로, 2부 [독특한, 괴이한, 불가해한, 그래서 매력적인], 3부인 [새로운 '눈'과 '손'이 이끄는 길], 마지막으로 [그리고 그들이 내 곁으로 돌아왔다]의 4부까지.

 

이 중에서도 책을 읽으면서 내 마음으로 들어왔던 몇 명의 예술가들을 통해 해당 도서를 소개해 보려 한다.

 

 

 

01. 알로이즈 코르바스


 

1부에서 내게 가장 인상 깊게 다가왔던 아티스트는 알로이즈 코르바스였다.

 

 

누군가를 마음껏 사랑해본 사람을 존경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자신을 허술하게 해 상대방을 높인다. 마음의 길이 열려 있다면 상대의 눈빛이 나를 향해 흘러오기를 기다린다.

 

(...) 자신의 바람을 가공하지 않고 표현한 그녀의 작품은 끊임없이 타인을 의식하며 살아가다가 지친 나에게 충고를 건넨다. 언젠가부터 내 안에 담았던 순수한 세계를 잊고 그저 살아내기에만 바쁜 것은 아닌지, 좋아하는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지 않고 삶의 기쁨을 충만하게 표현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 아닌지.

 

(행복해져라, 행복해져라 - 알로이즈 코르바스, p.51)


 

최선을 다하면 모양이 빠진다,라는 이상한 신념에 갇혀있던 적이 있다. 아등바등 애쓰는 느낌이 싫었다. 요즘 말로 하면 '꾸안꾸'마냥,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도 은근히 멋스러운 태가 나는' 내가 되길 바랐다.

 

그래야 체면이 사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내 자존심에 있어 일종의 에어백 장치로 이 마음가짐을 가졌던 게 아닐까 싶다. 내가 죽도록 최선을 다했는데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다면, 남들 앞에서 내가 그 결과를 받아들일 자신이 도무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무언가에 죽을 만큼 최선을 다해보지 못한 것, 내 마음을 펼쳐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남았다. 그것이 일이 되었든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되었든지 간에 남들의 시선 속에서 내 마음껏 표현하지 못했던 나, 그 순간에 집중하지 못하고 상처부터 받을까 전전긍긍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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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도 남들에게 '그림을 배운 적도 없는 이의 미술'이라고 조롱당하던 루소, 나치 수용소에서도 유대인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며 아이들에게 희망과 자유를 상상하는 법을 알려주던 디커브랜다이스까지.

 

 

(...) 그러나 루소는 포기하지 않았다. 어떤 사조에 휩쓸리거나 타인의 평가를 신경 쓰기 보다는 꾸준히 자신만의 그림을 그렸다.

 

(경계선과 도전 - 알리 루소, p.16)


 

그녀는 예술을 치료로 활용한 초창기 미술 교육인 중 한명으로 수용소의 아이들에게 예술적 자유와 아름다움을 찾는 방법을 알려주면서, 어린이들이 자신의 어린 삶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꾸준히 도왔다.

 

(자유를 그려낸 아이들 - 수용소의 화가들과 프리들 디커브랜다이스, p.33)


 

본인이 처한 배경과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기보다는 자신만의 그림, 나만의 삶의 의미를 부여하며 활동한 예술가들의 이야기에 오랫동안 시선이 머물렀다.

 

 

 

02. 페르디낭 슈발


 

우체부였던 페르디낭 슈발이 본인만의 궁전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그려낸 '우체부가 지은 꿈의 은신처' 역시 기억에 남는다. 슈발과 관련된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여러 꿈을 가지고 있던 슈발은 현실적인 이유 속에서 우체부라는 직업을 가지게 된다. 우체부로 자신의 일을 하면서도 본인의 업무를 산책으로 여기며, 그 시간마다 공상을 즐기던 슈발은 여느 때와 같이 배달을 하던 도중 신기하게 생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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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돌을 보며 슈발은 생각한다. '이 재료로 궁전을 짓자.'라고. 허무맹랑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이 꿈을 이루기 위해 그는 밤마다 신기한 돌을 구하고, 예순이 되어 우체부 일을 그만두고 나서는 모아둔 돈을 궁전을 만들기 위한 재료에 사용한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1912년, 마침내 슈발은 자신의 궁전을 완성한다.

 

슈발이 완성한 이 궁전은 내게 있어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바쁘고 팍팍한 생활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현실 너머를 상상하지 못하지만, 슈발은 자기가 꿈꾸는 이미지를 하나하나 구체화해간 것이다.

 

(우체부가 지은 꿈의 은신처 - 페르디낭 슈발, p.104)

 

 

슈발이 만든 꿈의 궁전은 아름다운면서도 기괴하다. 건물 전체가 하나의 삶이자 살아 있는 생명체 같아서 보는 사람을 경이로움으로 제압한다. 꿈의 궁전은 현실적인 목표가 아니라 성장하고 진화하는 꿈 그 자체였다. 우체부 일을 하면서 매일 간직한 꿈이 스스로 자라게 한 것이다.

 

(...) 꿈을 지닌 사람들이 모였을 때 변화가 시작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여전히 꿈타령을 한다.

 

(우체부가 지은 꿈의 은신처 - 페르디낭 슈발, p.107)


 

바쁜 사람이 나쁜 사람이 되기 쉽다는 글을 본 적 있다. 바쁘다보면 점점 주변을 잘 챙기지 못하게 되고, 결국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쁜' 사람이 되기 쉽다는 이야기였다. 언어유희적인 센스있는 표현도 표현이지만, 무엇보다도 내게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해당 글을 읽으며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던 기억이 난다.

 

정말이지, 바쁘면 정말 나빠진다. 내게 쏟아지는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해치워가다 보면, 체력이 남아나지 않는다. 살다 보니 하고 싶은 일보다는 내가 해야 하는 일이 한정적인 시간 속에서 우선순위를 점할 때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문제는, 정작 소중한 것들이 뒷전으로 밀린다는 것이다.


난 내가 하고 싶은 일들에 있어 언제나 나쁜 사람이었다. 내가 당장 처리해야 하는 일들에게 밀려 당시 하고 싶었던 일이 생겼더라도 '다음에 하지, 뭐'라며 저편으로 미뤄두곤 했다. 시간이 없어서,라는 간단하고도 가장 손쉬운 변명 속에서 쉽게 놓아버린 내 꿈들이 글을 읽는 내내 본인들 좀 봐달라고 아우성치는 것 같았다.

 

훗날 나의 삶을 돌이켜보았을 때, 나라는 사람을 나타내는 건물은 어떤 모양일까? 우체부라는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도 자신만의 공상 시간을, 그리고 끝내 그 공상을 구체화하여 본인만의 궁전을 만든 슈발처럼, 나도 소중한 꿈 돌멩이들을 차곡차곡 모아 이를 쌓아올리는 과정으로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03. 루이 비뱅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들은 원대한 목표를 설정하지 않아 편안해 보입니다. 그들은 가끔은 돈을 벌지 못해도 자신이 그 행위를 했다는 것만으로 기쁨을 얻잖아요.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고 그린 그림도 아니고 평가받기 위해 그린 그림도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의 태도와 마음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모든 그림이 다 평가받아야 할 이유가 없듯이 글을 쓴다고 해서 모든 글이 책이 되어야 할 이유가 없으며 평가받아야 할 이유도 없겠지요.

 

당신의 그림을 보면서 제가 왜 글을 쓰기 시작했을까 생각해봤어요. 글에 제 마음을 담아 전하는 것이 좋아서였습니다. 단지 그것 때문에 쓰기 시작한 것인데 조금씩 알려지니 부담이 생긴 거죠. 처음 그 마음으로 돌아가보려고 해요.

 

(파리의 우체부, 화가가 되다 - 루이 비뱅, p.207)

 

 

늘 무언가가 되고 싶었다. 무언가가 '되어야지'만 내 노력이 인정받는 길이고 가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처럼 나의 목표가 '무언가 되기'로 설정되어 있다 보니, 그 무언가가 되지 않는 이상 쉽사리 행복을 느낄 수 없었다.

 

그렇게 내가 '무언가'가 되지 못한 시간들이 늘어나고, 그런 지금 이 순간이 의미 없이 느껴질 때쯤, '되다'와 '하다'의 차이에 대해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대개 '하다'와 '되다'를 혼동하는 데서 온다. 어느 독립영화 감독을 인터뷰할 때다. 보통은 영화를 하고 싶으면 시험 쳐서 영화과 진행부터 하던데 당신은 무슨 배짱으로 덜컥 월세 보증금빼서 영화부터 찍었냐고 물었다. "그 사람들은 영화가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 거겠죠. 하고 싶으면 어떤 식으로든 하면 됩니다. 그런데 되고 싶어 하니까 문제인 거예요. 성공한 누군가를 동경하면서요."

 

(이숙명, 《혼자서 완전하게》 중)

 


《서랍에서 꺼낸 미술관》에서 저자가 소개한 여러 아티스트들의 공통점을 찾은 기분이 든다. 책 속의 그들은 그저 본인이 '할 수 있는,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였다는 점. 이제야 나는 '하다'와 '되다'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좋아하다'라는 능동의 동사를 자꾸만 수동의 '되다'로 착각하며 살아온 지난날의 나의 경험과, 루이 비뱅의 이야기를 통해 엿본 저자 이소영의 이야기까지. 가장 개인적이고 사적인 이야기들 속에서 나는 또 이렇게 서랍 속에 켜켜이 쌓아 두었던 '나의 이야기'들을 건져올린다. 그들의 삶에 나의 삶이 녹여지는 순간이다.

 

*

 

 

나는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매일 나 자신의 삶을 위로하고 있었다.

 

(들어가며, p.10)

 

 

아주 오래 그들을 짝사랑해왔는데 이 책을 쓰며 돌이켜보니 어쩌면 나는 그들에게서 내 모습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사랑하는 예술가들이 나와 닮았다고 생각했고, 그들과 닮은 점을 하나 둘 발견할 때면 나는 따뜻한 안도감을 느꼈다.

 

(작가의 말, p.248)

 

 

가끔 삶에 있어 갈피를 잃은 듯한 기분에 자주 휩싸이곤 한다. 지금 내가 잘 걸어가고 있는 게 맞는 건지 끊임없이 확인받고 싶은 기분이 든다. 주기적으로 내게 이럴 때가 찾아오면, 나는 방구석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우울함과 무력감에 깊이 빠져버린다.

 

그때마다 나를 구원했던 건, 책 귀퉁이를 접어내려가며 읽었던 책 속 문장들이었다. 아주 개인적인 책 속 그들의 삶 속에서 현재 나와 비슷한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나 역시 저자와 같은 깊은 안도감을 내쉰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나만 느끼는 감정이 아니었다'라는 걸 텍스트로 확인받는 순간, 나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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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오랫동안 조명 받지 못했던 아웃사이더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내 안에서 쉽게 꺼내지 못했던 내 이면의 이야기들을 깊은 서랍 속에서 끄집어내 주는 책과도 같았다. 책을 읽어나갈 당신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찾아올 때면, 이 책이 나처럼 큰 위로로 닿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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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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