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명명할 수 없는 성별에 대하여 [문학]

구묘진의 <악어노트>를 읽고
글 입력 2022.08.15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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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범주화로써 질서를 유지한다.

 

범주화는 비슷해 보이는 것들을 하나로 묶는 방식으로써 세상의 사물, 감정 등에게 이름을 붙여준다. 인간의 사고는 범주화의 체계 내에서 이루어진다. 우리가 사과를 생각함은 열매의 범주 중에서도 사과의 범주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같은 방식으로 언어도 범주화의 영역이다. 범주화는 사고나 상징체계 안에서의 대상을 명백하게 만들기 만들기 때문에 사회는 범주화의 방법으로 질서를 유지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범주화 되지 않는 대상도 있다. 미운 오리 새끼에서 미운 오리새끼는 오리로 범주화되었지만 실상은 백조인, 그러니까 오리이면서 백조인 새이다. 또 김중일의 시 「이와오」에서 ‘나’를 찌르고 도망가는 대상은 ‘어머니’인데, 이 부분에서 ‘어머니’는 ‘나’를 탄생시켰으나 죽음에 이르게 한, 가장 친숙하고 낯선 대상이 된다. 이뿐만 아니라 기쁘고도 슬픈 감정, 나이면서 내가 아닌 도플갱어 등 세상에 범주화 되지 않는 대상은 무수히 많다.

 

사람들은 범주화되지 않는 것들을 멀리하는 경향이 있다. 미운 오리 새끼는 오리이면서 오리가 아니라는 이유로 오리 가족들에게 구박과 핍박을 받는다. 범주화되지 않는 것들은 인간의 언어, 사고로 간단히 정의내릴 수 없어서, 사고뭉치 취급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세계에는 전통적으로 범주화된 두 가지의 성별이 존재한다. 남자와 여자. 이 둘은 생물학적 관점에서의 번식 등을 이유로 들어 남성은 여성을, 여성은 남성을 사랑해야 한다고 범주화되었다. 성별의 이분법은 구성, 사회 전반을 이루는 가치관으로써 단단한 진리가 되었다. 성소수자들은 범주화될 수 없는 존재로서 이 단단한 진리에 도전하며 살아간다.

 

「악어노트」에는 7명의 범주화될 수 없는 인간이 등장한다. 이들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사회적 통념에 대해 지속적인 투쟁을 벌이거나 사회 안으로 포섭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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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명의 바깥 - 사회적 죽음으로 향하는 열차


 

작품 속 인물들은 이성애의 규범에서 벗어난 삶을 산다. 테두리 바깥에 있기를 택한 인물들은 명민한 감각과 깊은 내적 사고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 사고는 대체로 자신을 찌르는 것이다. 작품 속에서 저자는 사회가 성소수자들의 삶과 사고방식을 얼만큼 피폐하게 만드는지를 형상화한다.

 

‘라즈’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자신을 상처 입히는 것임을 발견한 인물이다. ‘라즈’는 자신을 계속해서 검열한다. 명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라즈’에게 사회적 통념은 매우 큰 짐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라즈’는 여성을 좋아하는 취향이 오롯이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통념을 이유로 자신을 끊임없이 부정한다. 그 과정에서 입은 상처들은 사회에 대한 반발심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영원히 ‘라즈’ 속에 남아있는 흉터로써 ‘사회라는 단단한 벽’을 실감시켜주는 것이기도 하다.

 

작품의 마지막에 ‘라즈’는 유리조각이 박혀 있는 벽을 맨손으로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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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즈’가 사회와 자아 사이에서 갈팡질팡한 것은 ‘수령’ 때문인데, ‘수령’ 때문에 빚어진 이 갈팡질팡은 오히려 ‘수령’에게 상처로 돌아온다. ‘라즈’는 ‘수령’이 자신을 사랑하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사회적 범주화 안으로 들어가 편안하게 살기를 바란다.

 

이 양가적인 마음 때문에 ‘라즈’와 ‘수령’은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수령’은 상처받기를 반복한다. ‘수령’이 상처받는 이유는 ‘라즈’가 ‘수령’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상처가 되는 삶은 얼마나 폭력적인가. 소설은 ‘수령’이라는 인물을 통해 소수자가 받는 사회적 억압이 어떠한 방식으로 전파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몽생’과 초광’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회적 ‘남성’들이다. 이들 역시 사회의 규범 안으로 소속되기를 거부했는데, 이들이 겪은 부작용의 경우 삶과 죽음에 관련된 것으로 묘사된다. 작품 안에서 ‘몽생’과 ‘초광’은 죽음을 매개로 맺어진 관계다. 자살하려는 ‘초광’을 ‘몽생’이 붙잡았고 이로부터 이들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초광’의 생명으로부터 이어진 이들의 관계는 감정을 잃은 후에도 지속될 정도로 끈끈한 것이다. 여기서 ‘몽생’과 ‘초광’은 사회적 통념으로부터 비교적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묘사되지만 그것은 죽음을 담보로 한 반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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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생’과 ‘초광’은 모두 사랑 아니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지를 가지고 있다. ‘초광’은 ‘몽생’이 매년 만우절마다 자신을 보러오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선언했으며 ‘몽생’ 또한 항상 죽음을 가까이에 두고산다. 이들은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매개를 통해 사회적 통념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에서의 ‘초광’이 다인격체로 변모한 것처럼 묘사된다는 점, ‘몽생’ 또한 계속 구토를 하며 죽음에 이를 정도의 자해를 했다는 점 등을 보아 그들의 비극적 결말에는 다름이 없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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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명의 안 - 영원히 피를 흘리는 입술


 

한편, 작품 속에는 소수자의 경향을 품고 있으나 그것을 숨기고 사회적 규범 안으로 포섭된 사람들도 등장한다. ‘탄탄’과 ‘지유’는 고등학교 시절 서로 풋풋한 사랑을 하던 연인이었으나 사회적 자아로써 규범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 후 소수자의 모습을 포기한 것처럼 묘사된다.

 

나도 진심으로 탄탄을 사랑했지만, 마치 마귀에라도 홀린 양 내게 집중하는 탄탄을 보자니 미칠 것 같은 공포가 밀려오더라고요 계속 이런 식으로 가다 보면 어떻게 되겠어요? 당시에 나는- 결국 우리 둘 다 여자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고, 강박 상태 속에서 이성도 사고력도 잃어버린 채 오직 나를 질식시키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의 탈출만을 바랐어요.

 

‘탄탄’과 ‘지유’는 사랑이라는 감정에서 더 나아간 삶의 동반자로서 서로를 의지하고 있었으나 사회적 관념의 억압 하에 연을 끊는 모습을 보여준다. 동반자는 또 다른 나 혹은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사람으로서 같이 삶을 지탱해나가는 주체이다.

 

‘탄탄’과 ‘지유’는 사회적 통념에 굴복함으로써 동반자를 상실하고 쓸쓸함만이 남은 삶을 살아간다. 둘은 연을 끊은 후에 각각 ‘라즈’와 나눈 대화에서 서로가 마음 속 깊이에 자리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상실된 동반자이자 상처로써 일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불쑥 고통이 솟아오르는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이성애라는 사회적 통념은 자신에게 굴복한 소수자에게도 영원한 상처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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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해방과 악어라는 이름



예전에 나는 모든 남자들이 살아가면서 마음속 깊이 저마다 여성에 대한 원형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 원형을 닮은 여성일 것이라고, 그런데 나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어찌된 일인지 나의 내면 깊이에 자리한 원형도 여성에 관한 것이었다.

 

‘너는 이미 세상으로부터 버려졌다.’, ‘네가 살아있음이 바로 죄악이다.’ 라고 그에게 형을 선고하고는 강제로 머릿속에 새겨넣는다.

 

‘라즈’는 위의 인용문이나 주홍글씨 등의 죄에 관련된 표현들을 자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신의 취향을 죄의식처럼 느끼는 ‘라즈’의 심정을 잘 보여준다. ‘라즈’는 자신조차도 사회적 통념 안에 갇혀있었음을 토로하면서도 자신의 원하는 원형이 ‘여성’임을 서술한다.

 

이는 어릴 때부터 의식해 온 사회적 굴레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좋아하는 자신의 정체성이 남아있고 그 취향이 본래적인 것임을 의미한다. 이성애의 규범은 이러한 근원적 감정을 짓밟고 무시하는 형태를 가지고 있고 성소수자들은 어떠한 대처 방안을 선택하는지에 상관없이 존재만으로 ‘죄의식’을 느끼고 상처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랑’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이다. 그러니까 어떠한 ‘존재’를 아끼는 마음이라는 점에서 모든 존재가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간의 사랑에 있어서는 이성애라는 ‘보편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동성애, 바이섹슈얼 등 소수의 사랑은 특이하거나 이질적인 것으로 다뤄지는데 이때 자주 등장하는 개념이 생물학적 번식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를 잇는 행위와 사랑은 조금 다른 층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대를 잇는 행위는 종족으로써의 ‘나’를 유지시킨다는 점에서 그 자체의 가치를 가진다.

 

그러나 사랑은 무언가를 아끼고 귀중하게 여기는 마음일 뿐이다. 사랑 이후의 모든 것들은 사랑으로부터 파생되는 행위들이다. 그러므로 사랑 자체는 그 원형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인간 마음의 근원적 양태의 한부분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이성애의 측면으로 범주화되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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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의 이분법을 타파하는 사랑의 무논리



아시아 최초로 동성혼이 허용된 대만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성소수자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사회는 여전히 성별의 이분법 속에 갇혀 있다.

 

사회적 통념의 억압을 받는 성소수자들은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상처를 답습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가 점점 다원화되고 범주화 바깥의 것들을 인정해주는 흐름이 계속됨에 따라 이분법의 가장 오래된 관습을 타파할 수 있을 때가 올 것이라 믿는다.

 

누구나 사랑받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누구나 사랑할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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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명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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