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가족이라는 디스토피아 - 연극 '어거스트: 오세이지 카운티'

글 입력 2022.08.10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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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푹 찌는 여름날의 가족 희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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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공동체라는 말이 무색한 시대, 현관문이 닫히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집의 가족 구성원뿐이다. 수많은 기억과 비밀을 공유하는 가족 관계는 그 어떤 관계보다도 친밀하게 여겨지지만, 때로 그 친밀함은 여름날 녹아내린 사탕처럼 끈적거린다.


연극 <어거스트: 오세이지 카운티>는 집에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고 몸이 불쾌하게 끈적해지는 더운 지역, 오클라호마주 오세이지 카운티에서 벌어지는 한 가족의 희비극이다. 트레이시 레츠 원작의 희곡을 극단수와 프로덕션IDA가 함께 예술청 제로라운지에서 낭독극으로 진행하였다.


이야기는 뒷모습으로만 등장하는 이 집안 세 자매의 아버지, 베벌리의 실종으로 시작된다. 사라진 아버지로 인해 오래전 집을 떠났던 가족이 하나둘 모여든다. 베벌리의 아내 바이올렛, 그들의 세 딸 바바라, 아이비, 캐런. 바이올릿의 여동생 메디페와 그의 아들 리틀 찰스까지. 밀도 높은 대화가 쉼 없이 오가고, 각 인물들의 성격과 그들이 가진 오래된 상처가 드러난다.


부모는 자신의 기준에 들어맞지 않는 자식들에게 잔소리를 퍼붓고 함부로 간섭한다. 자식은 자식 대로 삶이 버겁기에 부모를 참아주기가 어렵다. 자신에게는 합리적인 방식이 상대방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때 갈등은 심각해진다.

 

이들은 대화를 통해 베벌리의 실종이 주는 불안감을 완화하고자 하지만, 대화가 이어질수록 상처만 덧날 뿐이다. 낯선 이름과 배경이지만 이들이 모여 나누는 대화는 한국의 여느 명절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주고받는 대화가 너무도 익숙한 나머지 여기저기서 공감의 탄식이 흐른다.

 

 

 

“가족이 돼주라 내 집이 돼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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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되었던 베벌리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극은 다른 국면에 접어든다. 무더운 집 곳곳을 드리우던 햇볕가리개를 치우고 바이올렛이 집안 정리를 시작하며 이 가족이 오랫동안 숨겨 왔던 비밀이 밝혀지는 것이다. 극의 초반에 오랜만에 집을 찾은 가족들은 햇볕가리개가 쳐져 답답한 집에 대해 불평했지만, 햇볕가리개가 걷히고 이들이 마주해야 하는 진실은 더욱 잔혹하다.


인물들이 각자의 욕망을 드러내고, 숨겨진 과거의 진실이 밝혀질 때 극의 갈등은 최고조에 이른다. ‘알고 보니 남매였다’ 식의 전개는 우리에게 익숙한 막장드라마를 연상시킨다. 그렇기에 클리셰와도 같은 베벌리 가족의 비극은 순간순간 희극의 성격을 띤다. 가족이라고 모였지만 사실 제대로 아는 것은 많지 않고, 입만 열면 서로에게 상처 주기 바쁜 이 가족을 보며 우리는 가족이라는 게 대체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극 초반 베벌리의 대사처럼, 인생은 길다. 그 긴 인생을 홀로 살아가는 건 쉽지 않기에 사람들은 가족을 만든다. 때로는 원가족에게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자신의 새로운 가족을 만들기도 한다.

 

가족은 외로움과 상처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극 중 세 딸은 이 역시 녹록지 않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바바라의 결혼 생활은 남편의 불륜으로 위태롭고, 캐런의 약혼자는 조카에게 집적대는 인간이며, 가장 순수한 사랑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비 역시 자신이 사랑한 사람이 친동생이라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문득 한 히트곡의 ‘내 집이 돼주라, 가족이 돼주라’라는 가사가 떠오른다. 많은 이들이 가족을 어떤 관계의 최종 형태라고 생각한다. 또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줄 초월적인 공동체로 여긴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은 개개인이 가족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하게 만들고, 가족이 된 다음에는 더 이상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도 읽힌다.

 

어쩌면 가족이니까 괜찮다는 생각이 가족을 무법지대로 만들고, 가족에 대한 환상이 가족을 일종의 디스토피아로 만드는 것 아닐까. 혼자가 외로워 가족이 되었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에 갇힌 우리는 다시 외로워진다.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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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의 흐름에서 한 발짝 비켜난 존재가 있으니 바로 베벌리가 집안일을 시키기 위해 고용한 ‘조나’이다. 조나는 일단 이 집안 식구가 아니고, 백인도 아니라는 점에서 굉장히 이질적인 존재이다. 베벌리 가족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접점이 거의 없는 타인인 셈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이유로 가족은 조나에게 의지하고, 가족에게는 말하지 못하는 진심을 털어놓는다. 바바라의 딸 진이 담배를 빌리는 사람도, 마지막 순간 가족이 파탄 나고 혼자 남아 방황하는 바이올렛이 기대는 사람도 조나다.

 

조나가 이런 역할,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족에게 기대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가족이 아닌 타인이라는 데에서 비롯된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이 극에서 가족이 아닌 타인이란 함부로 간섭하지 않고, 넘겨 짚지 않으며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사람, 말을 가려서 하는 사람이 된다. 그렇다면 반대로 가족이란 함부로 간섭하고 예의도 지키지 않고 아무 말이나 해도 되는 사람이 되는 걸까. 씁쓸한 현실이다.


안식처로 여겨지던 가족이 해체된다고 각자도생의 시대가 열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가족을 최후의 안식처 삼는 대신 다른 공동체를 더 다양하게 가꾸고 돌본다면, 타인에게 기대고 또 타인이 기댈 자리를 마련한다면 거기에 새로운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 그 공동체 역시 '가족'이라 불릴 수 있겠지만, 지금 우리가 아는 가족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물론 연극이 이렇게 거창한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지는 않는다. 그저 한 가족이 흩어지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가족이 다 떠난 집에 남겨진 바이올렛과 그를 돌보는 조나를 보며,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의 무색함과 동시에 피 섞이지 않은 타인과 더불어 살 가능성을 함께 생각해본다.

 

*

 

낭독극으로 진행된 이번 공연은 정식 공연을 하기 전 예고편이다. 낭독극이지만 밀도 높은 대사와 연기력으로 몰입해서 볼 수 있었다. 또한 최소한의 소품으로 공간을 활용해 짧지 않은 2시간이라는 시간 동안 관객을 온전히 집중시켰다. 정식으로 극장 무대에 오를 날이 기대된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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