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소한 대신 번지기 쉬운 [사람]

적고 작은 것들
글 입력 2022.08.08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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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버거워지면 사소한 게 두렵다. 차라리 큰 한방이 날 망가뜨린다면 괜찮을 것 같은데 사소한 잡음이 끼어들기 시작하면 오히려 참을 수 없어진다. 때로는 너무 사소한 것들이 나를 위로해서 힘이 난다. 아직 내가 작은 것들에 눈이 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에 안도하기도 하고.


나는 아직 나를 다루는 법이 어려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에 대한 시나리오를 여럿 준비해 두어야 한다. 나를 위로했던 최근의 사건들을 기록해두었는데, 정말로 사소해서 다음번에도 효과가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사소한 것들은 무게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가볍지만 그래서 오히려 번지기도 쉽다. 좋아하는 것들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 그런 것들로 마음에 성벽을 쌓아 쉽게 무너지지 않아야지 하고 다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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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하지 못한 이벤트



휴가가 너무 빨리 끝난 기분이라 해가 지는 게 허탈해진 저녁이다.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좀 나을까 싶어서 짐을 싸서 도서관에 갔다. 상호대차 자료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나를 구한 것일지도 모른다…. 무기력한 몸을 일으켜서 근처 도서관으로 향했다. 1시간 정도는 책을 읽을 수 있겠다 싶어 빌려두었던 책을 먼저 펼쳤다.


한참 몰입해 읽어가던 중 페이지 구석에 갑자기 낙엽 모양의 포스트잇이 등장했다. 순식간에 집중력은 그쪽으로 쏠렸다. 주황색부터 연두색까지 물들어가는 낙엽이 어찌나 진짜 같던지. 손가락으로 만져보고 나서야 포스트잇인 것을 알았다. 그저 책 구석에 덩그러니 붙어있던 포스트잇이 에어컨 바람에 바르르 떨렸다.


읽고 있던 책은 황정은 작가의 백의 그림자. 은교와 무재가 통화를 하면서 그들이 마주한 가장 따뜻한 상징인 오무사를 이야기하는 장면이었다. 거기서 낙엽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니까 맥락도 의미도 어떤 것도 비슷하지 않은 뜬금없는 낙엽이.

 

황정은 작가의 글은 내가 어떠한 형태로든 불행하다고 느낄 때 읽곤 했다. 타인의 그늘진 그림자로 위로를 받는 것이 그다지 좋지 않은 품질의 위로라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때로는 그런 처방이 필요할 때가 있다. (참고로 그의 에세이도 소설의 건조한 문체를 많이 닮아있다) 그래서 종종 그의 건조한 위로를 듣고 싶을 때면 책을 빌려오곤 하는데.


그날은 글이 아닌 다른 선물을 받았다. 정말로 선물 같았다. 기대도 않은 곳에서 뿅 하고 튀어나온 선물. 기념으로 그 포스트잇을 가져갈까 잠시 고민하다가 책을 그대로 덮었다. 이 낙엽이 나말고 다른 사람에게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나도 같은 것들을 선물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어 나도 남은 시간 동안은 포스트잇을 꺼내 재주껏 그림을 그렸다. 다음 챕터에는 우리 집 고양이 그림이 그려진 포스트잇을 붙였다. 한 시집에는 그 시인의 다른 시집 이름을 적은 포스트잇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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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청 오보



날씨 앱에는 일주일 내내 비 소식이 있었다. 덕분에 가방 맨 밑에 내 몸 하나 겨우 들어갈 작은 우산이 꼭 들어가 있었다. 언제 비가 올지 모르니 자꾸 하늘을 곁눈질하게 됐다. 어항 속에 얼굴을 푹 담그고 있는 듯한 습기. 등허리로 쭉 미끄러지는 땀 때문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땀을 통 배출하지 못하는 치마가 더욱 몸을 무겁게 만들었다.


더위에 유독 약한 몸을 따라 마음도 절절 끓으려 들었다. 땀을 닦으며 얼굴을 한층 심각하게 찌푸리던 순간 저 멀리 하늘 끝이 벗겨지는 게 보였다.

 

오늘 비 안 오겠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뒤돌아보니 이미 내 뒤쪽으로는 하늘이 파랗게 개어있다. 역으로 들어가려던 발걸음을 돌려서 경복궁의 옆구리로 들어갔다. 큰 나무를 둥그렇게 감싸는 벤치가 보여 걸음을 조금 바삐 했다. 가방을 쏟듯이 벤치에 내려놓자마자 큰 바람이 설렁 불었다. 목덜미에 척척하게 붙어있던 머리칼까지 싸악 들어주는 바람을 맞으며 그대로 벤치에 앉았다.


오후 5시, 비스듬하게 들어오는 따가운 햇빛이 돌바닥 위로 번지고 있었다. 에어팟을 빼고 본격적으로 여름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바람이 아무리 세차게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매미의 노랫소리.

 

오보가 반가웠다. 사진을 찍어 초록색을 좋아하는 M과 L에게 보냈다. M은 즉시 전화를 걸어왔다. M은 신난 목소리로 ‘날도 좋은데 맥주 한잔할 테냐’고 물었다. 날이 좋긴 뭐가 좋냐며 어깃장을 놓다가 장소를 찍어 보내라 했다. 전화를 끊고 나니 10분 안에 오라는 부산스러운 카톡이 와 있었다.

 

그날은 평소와는 달리 정말 맥주 한 잔만 했는데도 더위를 먹었는지, 기분이 좋아서 그랬는지 집에 가는 내내 몽롱했다. M의 말로는 그날 내내 나는 ‘비가 오지 않아서 다행이다’라는 말을 반복했다고 한다.

 

 

 

바다



이번 휴가는 늘 바다와 함께였다. 바다는 사실 내게 사소한 것은 아니다. 그냥 아픈 나를 떠안아줄 유일한 마음의 구석이라는 것이 다시금 실감이 났을 뿐. 내내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는 것은 바다가 유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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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포레스트



얼마 전 생일 때 대용량의 인센스 스틱을 받았다. 향이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기에 제일 유명한 향을 고르려다가, 순전한 변덕으로 레인포레스트라는 향을 골랐다. 쓸 날이 있을까 했는데 생각보다 금방 때가 돌아왔다. 아랫집에서 중국 요리를 하는지 강한 향신료 냄새가 집까지 넘어오기 시작한 날이었다. 선반 맨 밑에 있던 스틱을 꺼냈다. 몇 번 불을 밀어내던 스틱 끝에 확 불이 옮겨붙으면서 진한 향이 피어올랐다.


숲 냄새가 났다. 비 오고 난 다음 축축한 흙과 젖은 잎이 뿜어내는 묘한 냄새. 창문을 열어두고 잠시 누웠다. 타면서 불투명하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따라 손을 까딱거리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그 날 꿈에는 L이 나왔다. L은 발을 동동 구르면서 네잎클로버를 찾겠다고 안달이었다. 왜냐고 물으니 ‘행운이 필요하다’고 했다.


얼마 전에 나란히 잔디밭에 앉아서 네잎클로버를 재미 삼아 찾았던 것이 꿈에 나타난 모양이었다. 나는 멀어지는 L의 뒤를 따라서 함께 네 잎짜리 풀꽃을 찾으러 다녔다. 잘박거리는 물 묻은 흙 웅덩이를 잘박거리면서 비 오는 잔디를 헤집고 다녔다. L은 결국 네잎클로버를 찾지 못해서 울었다. 나는 L의 어깨를 토닥거리면서 내가 찾아주겠다고 중얼거렸다.


그 순간 현실로 돌아왔다. 아이고 낮잠을 이렇게나.

 

잠이 덜 깬 상태로 L에게는 ‘네잎클로버 찾으러 가자’ 하고 카톡을 보냈다. L은 ‘네잎클로버까지 될놀될이냐’하고 ㅋ이 가득한 답장을 보냈다. 인센스 스틱은 다 타고 재만 남아 있었다. 방 안에서는 숲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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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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