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니나는 빛나는 진희 - 니나=빛나, 마이유니버스

이 모든 평범들이 참 극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글 입력 2022.08.08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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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한참을 겪어낸 줄로 알았거늘, 기나긴 장마를 마치고 여름은 진 眞 보스인 양 2페이즈를 개시했다. 어깨에 얹히는 햇볕에서 중압감을 느끼는 시간 속, 나는 오늘 연극을 찾아간다. 연극을 찾아간다는 것, 그것은 정말이지 찾아서, 가는, 일이다. 아트인사이트를 매개로 이어지지 않고서야 내가 어떻게 저리 충분히 멀리 있는 곳, 남산터널을 통과하야 종로의 모든 숫자와 내 추억의 대학로마저 지나서 여기까지 닿을 수 있었을까. 못내 관심은 있지만, 연극은 멀리 있었다. 무엇으로부터? 내 왼쪽 주머니와 검은 방으로부터.


버스가 대학로의 마로니에를 지나치자마자, 비가 억수로 내린다. 후둑 … 후두두둑 하는 망설임도 없이, 잠시 핸드폰을 살피느라 고개를 내린, 딱 그 찰나만큼에 만연해버린 일이었다. 그것은 일정 비현실적이라서 나는 등장인물 같은 눈을 하고서 바깥을 망연히 치어다 보아야 했다. 우산이 없었거든. 이제 혜화동 로터리를 따라 우측으로 돌고, 혜화문과 분절된 성곽이 자리하고 있는 언덕 고개를 거슬러 올라가는 버스, 고개를 치어든 버스의 바깥 편으로는 시퍼런 하늘에 시선이 일치한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게 참 극적이라는 생각을 한다. 날은 분명 무더웠고 극장은 멀리 있었고, 가는 길 비는 느닷 내리고 하늘은 시퍼랬다.


여우비라… 여우비는 웬만해서는 낭만적인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고 생각해왔다. 하늘은 푸르고 세상은 밝고, 그래 세상이 아직 환하고, 비는 이제 구름의 속눈썹 같이, 혹은 버드나무 잎같이 나리는 것, 우산이 없었던들 얼굴에 닿으면 촉촉하니 산뜻한 감촉으로 내려주는 것. 어쩌다 여우가 설렘과 유혹의 상징물이 된 것인지까지는 모르지마는, 그것은 충분히 미혹될만한 광경, 넉넉히 맞고픈 그런 비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의 이것을 무어라 불러주어야 하지? 비가 철판으로 된 버스 지붕과 아스팔트를 후려갈기고 있었다. 우리나라도 이제 당당한 '스콜' 보유국인가. 어찌됏건 저 비는 맞고 싶지 않았다. 바짓단을 이미 적셔버린, 너무 왕성한 빗줄기. 그러자 바깥의 여전한 하늘이 달리 보인다. 푸르름에서 시퍼럼으로. 그리고 이 모든 조용히 일어나는 개인적인 일들을 두고 나는 참 '극적이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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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도 없이 버스에서 내린다. 한성대입구역, 여기엔 소극장이 참 많더랬다. 오늘의 극장, '공간222'는 어디에 숨었나. 저기 시장길을 따라 깊이 숨었나. 지도를 다시 켜니 바로 앞에서 헤매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 바로 맞은 편, 크로커다일 레이디와 샤트렌과 올리비아로렌 매장 사이에 끔뻑이 놓여 있는 '공간222', 비를 피해 쏟아지듯 내려간 지하 창구에서 내 이름을 묻곤 누군가 표를 건넨다. 부스를 앉아있는 이 사람은 오늘 모노드라마의 배우, 내 이름을 묻는 그 또렷한 발성에서 아아, 나는 오늘 이 사람을 보러 왔구나, 단번 알 수 있더랬다.


오늘 연극은 '니나=빛나, 마이유니버스'라는 제목의 연극, '모노드라마 페스티벌' 5회차 마지막 공연이다. 연극을 보고 난 지금, 무명배우들을 위해 연극의 장을 제공해준 이 모노드라마 페스티벌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보았다. '공간222'에서 매년 7월에 진행하고 있는 모노드라마 페스티벌, 올해로 5년째 접어든 이 시도는 1인 극을 위한 작은 축제란다. 나는 그게 괜스레 뭉클하고 따스해서, 좀체 느끼지 않는 응원의 마음을 가진다.


객석은 8명씩 4줄, 작고 소박하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사람들, 왜인지 이렇게 무대와 객석이 가깝고 관객과 관객이 가까울수록 우리는 배우에게 더 큰 관심과 주의를 기울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서는 우리 관객들의 눈빛과 표정까지 모조리 배우에게 닿아버릴 것 같았거든. 가득 찬 객석, 30쌍의 눈빛을 지근거리에서 받아내야 할 배우에게, 응원의 마음을 가지는 건 자연한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니나=빛나, 마이 유니버스', 이하 '니나는 빛나'로 부를 이 연극은 자전적 연극이자 모노드라마이다. 핵심 제재로는 안톤 체호프라는 사람의 '갈매기'라는 희곡과 그 안의 등장인물 니나를 차용한다. 등장인물인 '빛나'는 연극배우로, 갈매기라는 희곡 속의 연극배우인 '니나'를 동경한다. 니나가 희곡 속에서 그러했듯, 빛나도 그런 니나와 갈매기를 연기함으로써 유명 배우로 데뷔하고자 하는 꿈을 품는다. 독백연기를 연습한다. 채 이해하지도 못한 추상적인 대사들을, 자못 진지한 채 연기하는 저 모습에 어색함이 푹푹 묻어난다. 나는 그게 왜 그리 씁쓸하던지.

 

연극은 딱히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이다. 희곡 속 주인공을 동경해 배우가 되고자는 꿈을 꾸고, 오디션을 보고, 꿈과 현실의 괴리를 알아 가고, 그럼에도 아등바등 살아가고, 좌절하고, 버티고… 그리고 선택하는 일련을 따른다. 그건 우리 삶과도 다르지 않은 것, 그러나 그래서 너무도 진솔한 이야기이다. 1년에 겨우 한 작품을 하는 배우, 나머지 삼백육십여 일을 아르바이트와 연기수업과 두려움과 우울과 그럼에도 명랑코자 애쓰는 몸짓들로 채워놓은 저 삶, 그 앞에 놓인 내게서도 나의 딱히 새로울 것 없는 삶이 풀려난다. 너무 가까운 무대와 객석, 너무 가까운 우리들, 그리고 너무 닮아 있는 각자 삶의 모습들 앞에서 제4의 벽은 기능을 잃고, 나는 연극을 관람하러 왔는데, 어떤 이의 삶 앞에 놓여 버린다.


연극은 딱히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누군가의 실제 삶이었거든. 실제 살아가는 너와 나의 서사에 무엇 그리 새로울 게 있을까. 다만 거기엔 지엄한 현실과 그 속을 살아가는 이의 떫은맛이 잔뜩 베여있을 따름이다. 그렇기에 더없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무명 배우의 삶은 아무리 본들 익숙해지지 않는 성질의 것인가 보다. 그것은 일정 나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기에, 그러나 어느 분기점에서 나는 빛나와 다른 선택을 내린다. 나는 예술로써 살아가는 것이 도저하다고 여겼거든.

 

국문학과를 졸업하곤, 시와 에세이를 쓰며 살고 싶었다. 내게도 동경하는 별쯤은 있더랬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칼릴 지브란과 니체와 알베르 까뮈, 그리고 백석과 윤동주와 이성복과 박태원과 조정래와… 윤동주가 그러했듯 내게도 헤아릴 무수한 별이 있었다. 남들이 취업준비를 한다고 시끌벅적한 몇 년 동안,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것은 아직에 글 쓰는 습관과 문체로써 잘 남아 있다지만, 당시 아무리 써도 만족할만한 것을 낳을 수 없었다. 친구들은 하나둘 캠퍼스를 떠났고, 나는 오래 좌절했고, 더 늦어버리기 전에 나는 취업의 길로 도망쳐 나온다.


아직도 기억한다. 매일 같이 도서관을 찾으면, 엊그제 본 그 얼굴들이 꼭 같은 자리를 잡고서는 똑같은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책에는 딱딱하고도 무언가 무서운 것, 감히 접근하기 어려우면서도 딱히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제목들이 적혀 있었다. 세상에는 무슨 놈의 원리와 원론과 개론이 이다지도 많은지, 나는 눈 흘기며 그들을 지나치곤 나의 세계로 골몰해 들어갔지만, 그럼에도 마음 어딘가 서글픈 구석은 남았다. 그것은 개론들이 약속하는 유용함, 그에 비치어 돌아오는 시의 무용함에 대함이었다.


취업은 많은 것을 해결해주었다. 우선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 그로써 꾸려나갈 수 있는 보통의 생활이라는 것이 얼마나 갚진 것인지를 체험케 했다. 더구나 소득이 생기고, 그 이전에 무언가 업이 생기곤 내게도 세상에 선보일 쓸모랄 것이 있구나 하는 발견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것이었다. 인간에겐 이고 난 본질이 없다지만, 그건 철학서에서나 우아히 이야기해볼 법한 것이지, 유약한 현실의 인간에게는 '자신의 쓸모'랄 것이 필요하다. 업이 생긴다는 것은, 그래도 내가 이 회사체에, 이 팀에, 이 역할 체인에 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고, 주어진 일을 처리함으로써 쓸모를 발견하게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여기까지의 서사만으로 삶이라는 연극에 결론을 지어버릴 수 있었더라면, 즉 나의 쓸모를 발견하고 급여를 받고 보통의 생활, 그 갚짐을 누리고 마침내 조금 행복해지고, '이야- 끝-' 해버릴 수 있었더라면 모르겠지만, 사람에게는 생활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회사에 익숙해지니, 작년부터 해온 이 일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건 이게 아니었는데, 나는 당당히 꿈으로부터 도망쳐 나왔고 보통의 삶을 얻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장차 지루하게 썩어가며 은근한 악취를 풍기기 시작하니, 나로서는 연극을 찾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회사와 루틴잡과 고객사와 그 외 온갖 이해관계자들과 기나긴 출퇴근길과는 다른 것, 즉 지루한 현실과는 다른 무언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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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이 연극, 아니 저 배우의 삶은 나의 세계와 대칭되었지만, 여전히 비슷한 고민거리를 생산하고 있는 누군가의 세계를 선보인다. 꿈을 살건, 현실을 살건 불충족한 우리, 그 메마른 사실을 다정하게 가리킨다. 나는 안온히 썩어가고, 당신은 열렬히 부딪히며 흔들리는구나. 그럼에도 다행인 것은 나와 당신이 아직 그것을 완전히 포기하지도, 고개를 돌려버리지도 않았다는 점에 있다. 나는 이렇듯 아직도 글을 쓰고 있고, 당신은 아직도 배우를 꿈꾸고 있었으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공간과 관객이다. 당신은 누가 되었건, 그 수가 얼마나 되었건 관객을 찾아 무대를 떠돌고 있다 했지. 그것은 나에게도 마찬가지의 일이다. 보지도 않는 글을, 지금도 그렇듯, 이렇게 살뜰하게 써내고 있으니 말이다.


전의 글, 나에 대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썼다. '각자 생명을 바칠만한 붉은 장미를 발견해야만 한다'고. 그것은 틀림없는 진심이지만, 그 글에서는 채 설명하지 못한 것이 남아있다. 관객도 공간도 없이 이러한 것을 오래하려면, 성공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이러한 것을 오래하려면, 그 긴 과정 속에서 오래 슬프고 우울함에도 그것을 떨쳐내지 못하려면, 그것을 사랑해야만 한다는 것을. 그 사랑은 세간의 말하는 사랑보다 깊은 것, 첫사랑도 아니 연애감정도 아니, 숭배하는 어떤 마음에 닮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나를 아무리 괴롭게 한들, 그것에서 도망치는 것이 차라리 더욱 커다란 존재의 위기감을 조성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그래야만 나는 우는 얼굴을 하고서도 꾸준히 글을 생산할 수 있을 테고, 당신은 마찬가지로 지켜보는 이 아무도 없는 연습실에서 홀로 독백할 수 있었을 테다.


한편, 마찬가지로 이렇게도 썼다. 나는 위의 조건이 성립되었을 때, 비로소 한 가지 운명을 믿을 수가 있게 된다고. 나는 이 아픈 행위, 그럼에도 벗어나지 못하는 행위를 오래도록 지켜보며 어떤 운명론적 관점을 생각하게 된다. 나와 당신이 마침내 바라던 미래에 가닿게 된다면, 비로소 웃게 되는 날이 온다면, 우리는 그 종착점의 바로 직전까지도 알지 못하고 있었을 테며, 그때까지도 꾸준히, 어쩌면 지금보다 더 괴로워하는 나날을 버티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오래도록 괴로울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내가 그것을 사랑해 끝내 포기치 못한 까닭이며, 내가 그것을 지켜낸 것이라기보단, 그것을 버리지 못한 소치였을 테며, 지금보다 시간이 더 지난 어느 미래를 분기점으로 하여, 더욱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놓여버린 까닭일 테다.


그렇다면 아예 꿈에 닿을지를 미리 알 수도 없고, 닿는 그날까지도 어차피 오래도록 괴로워야만 했다면, 나는 그것을 더욱 잘 견디기 위해, 이 당연한 고통을 받아들이기 위해 한가지 운명을 채택한다. 이것은 반드시 올 그 날을 위해, 마찬가지로 반드시 밟아 건너야만 하는 시기라고. 논리를 왜곡하여 이렇게마저 써본다. 이 모든 층계를 밟은 끝에, 바라던 미래는 마찬가지 하나의 돌다리로써 거기 있을 것이고, 지금의 나는 그것을 하나의 주어진 예언이자 운명으로 생각하노라고. 연극의 종장에서 '빛나'는, 맨 처음에 선보였던 니나의 연기를 다시금 독백한다. 거기엔 이제 충분한 시간과 고통을 겪은 이에게서 우러나오는 진지함과 어떤 사실됨이 베여 있다.

 

 

니나 : 그 사람은 내 연극을 비웃었어요. 그리고 내가 연기하는 거에 대해서도 전혀 존중해주지 않았죠. 그래서 나는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그러니 연기가 제대로 나올 리가 있겠어요? (중략)

 

우리에게 중요한 건 명예나 꿈 따위가 아니에요. 중요한 건 견디는 거에요.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아가는 것… 나는 이제 나를 믿어요. 나는, 이제 괴롭지 않아요.



이 독백을 마지막으로 연극은 끝났다. 나는 이것이, 무명배우가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스스로 내린 시험이자, 관객을 대상으로 치룬 면접 같다는 생각을 한다. 갈매기라는 희곡과 니나의 독백부는 실제로 연영과 입시생들이 많이들 준비하는 것이라고 한다. 갈매기의 독백을 연기하는 그녀가 마치 자신의 배우됨을 선보이고 있다는, 면접을 보고 있다는 생각에 미친다. 평가관은 다름 아닌 자신일 것이다. 다만 우리는, 마치 취준생들이 면접관도 아닌 다른 취준생을 상대로 면접 연습을 하듯, 롤 플레이어로서 그녀에게 필요했을 따름이다. 그리고 나는 얼마든지, 라는 눈빛으로 그녀의 독백 연기를 바라보았다.


그래, 중요한 건 견디는 것이다. 내게는 붉은 장미가, 당신께는 자신만의 십자가가 드리웠고, 각자 그것을 품고 계속해서 견뎌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로 견디는 것일까? 무언가를 앓고 있음에도, 나는 권태를, 당신은 자존의 위기를, 고로 무언가 놓아버리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한들, 우리가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사람들은 마치 스스로 이 모든 것을 감내하고 있으며, 나의 유약하고도 피로한 의식이 이 노력을 그만두는 순간, 모든 것이 멈추어버릴 것이라는 착각을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그랬더라면 우린 이미 진작에, 글 짓는 손과 독백하는 입을 멈추어버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애초 멈추고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더라면, 적어도 지금에 생각하기에, 우리는 벌써 가닿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멈출 수 없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려 한다. 시계視界와 예측 가능한 지평의 너머, 알 수 없음이라는 검은 구덩이로 빨려가듯, 불안과 우울에 부르르 떨면서도 나아가기를 멈출 수 없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비로소 나는 그녀를 응원할 수 있겠다. 이렇듯 대칭된 세계를 각자 살고 있었음에도, 우리는 같은 것을 앓아버려, 같은 곳을 바라보아야만 하기에. 다만 내겐 권태가, 당신에겐 위기가 찾았을 따름이다. 그리고 부나방 같은 너와 나는 아무래도 좇기듯 나아가는 수밖엔, 도저히 없겠다.


비로소 나의 마음은 그녀를 응원할 수 있겠다. 손쉬운 응원이란 아예 하지 않는 것만 못하기에, 적어도 나의 모난 가치관은 으레 이런 식인데, 한 인간의 고유한 세계와 정신을 뒤흔드는 문제의식에 대하여 반절도 체험하지 못하고서 건네보는, 위로로 된 언어가 도대체 어떤 자극과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겠는가. 어떻게 그 사람을 드높이는 것, 의미와 사랑이 될 수 있을 텐가. 나는 등장인물 '빛나', 배우 '유진희'의 안에서 반가운 나를 찾는다. 내 홀로 오래도록 앓던 것을, 모르는 당신이 오래도록 앓고 견뎌왔다는 사실 속에서. 고로 나는 빛나와 유진희를 응원할 수 있다.


자기 이름으로 된 책을 꾸는 사람과 자기 이름으로 된 공연을 그리는 사람이 같은 공간에 있었다. 배우는 자기 인생을 연기했고, 나는 등장인물 빛나이자 인간 유진희의 서사에 동조한다. 그리고 이렇듯 쓰고, 이렇듯 응원하는 것이다. 그녀는 무엇이 되고 싶어했지? 여기서 이 연극의 제목을 차용해오자면, 그녀는 '배우 니나'이고 싶다. '니나 = 빛나', 입 속에 굴려보면 '니나는 빛나'라고 읽히는 것. 그리고 빛나는 곧 진희이기도 하니, 니나 = 빛나 = 진희, 그렇다면 나는 '니나는 빛나는 진희'라고 발음해주고 싶다. 굳이 조금의 의도를 첨가해서, "니나는, 빛나는 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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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렇게 빛나와 유진희를 응원하는 만큼 나는 스스로를 응원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같은 것을 앓고, 바라보고, 끝내 오래 견디고, 포기치 못하는 사람이거나, 그런 사람이어야 할 테니까. 우리가 이렇듯 다른 세계 속의 유사한 존재였다고 한다면, 내가 그녀를 응원하는 만큼 나는 응원 받는다. 당신이 거머쥔 십자가를 긍정하는 만큼, 나의 붉은 장미는 긍정된다. 무명의 배우를 무명의 작가가 응원하고, 응원받는다. 연극은 끝났고, 좁은 데에 몰려 있던 사람들은 삽시간에 빠져나갔고, 텅 비어버린 자그마한 공간은 왠지 조금 더 씁쓸했으며, 바깥은 그새 다시 양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극적인 비는 그쳐 있었고, 그러니까 왈칵 쏟아 붙이며 일상과 아스팔트와 버스의 양철지붕과 안온함과 지루함의 공간을 향해 내리 꽂히던 느닷없음은 가시어 있었고, 뒤늦은 일사는 대지를 쥐펴락 흔들며 도리어 틔워 올리고 있었다, 아지랑이를. 여전히 축축한 대지 위로 아지랑이가 가리어 갈 곳을 잃어버렸다, 쨍한 태양 아래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버스를 타고 쏘아볼거나, 그러자니 이런저런 생각들이 가로막았고, 하는 수 없어 혜화를 향해 걸었다.


무더운 날, 멀리 연극을 찾아갔다가 길 잃은 끝, 열사의 아래에서 언젠가 먼 훗날 연극에 대하여 생각하다가 나는 오늘 하루를 기억할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늘은 높았고 꿈도 마찬가지로 높이 떠 있었고 나는 카페를 찾아 부러 마련한 먼 길 위에서 하늘과 태양과 비와 꿈에 대해서 떠올려보다간, 하루 안에 집약된 이 모든 평범들이 참 극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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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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