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부정당한 자들을 위한 축제 [미술/전시]

글 입력 2022.07.28 20:57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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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부산의 한 가정집을 개조한 갤러리 아이테르에서 허채은 작가의 개인전 <달과 여름밤의 춤>이 일주일간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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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부터의 수천년간 역사 속에, 신화와 전설 속에 언제나 살아왔던 존재들

현재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간 속에, 생의 흐름에 온몸으로 부딪혀 가며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

과거와 현재의 그들이 모두 스러지고 난 후에도

미래를 살아갈 그들의 후손들


이들을 이 세상에서는 갖가지 이름으로 칭하고 분류한다. 여성. 이방인. 약자. 소수자 등

 

나의 작품, 나의 전시는 이들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것들이 이들에게는 당연시되었다. 인격과 존엄성에 대한 부정.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 자유의 박탈. 고통. 속박. 이 세상이 정해놓고 공고히 매듭지은 일정한 삶의 궤도를 벗어나는 순간 그에 대한 댓가.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손가락질. 죄인과도 같은 낙인. 폭력. 고난과 지탄. 외로움. 고독. 결핍.

 

이 모든 것들이 마치 매서운 풍파와도 같이 육체와 영혼을 모조리 파괴하려는 듯 사정없이 달려들 때 안쪽으로 단단히 여민 인내의 시간.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들의 흔적을 지우고 인격을 앗아 가며 서사를 왜곡하였던 의지들은 결국 모이고 쌓여서 마치 영겁의 세월과 같이 무겁고 차가운 공허함, 공백, 무관심을 만들어 내었다.


하지만 그토록 차갑고 완고한 무관심조차 가릴 수 없는 찬란한 그들의 서사, 생경한 고통과 함께 끝없이 이어진 어둠의 타래 속에서도 내뿜는 찬란한 빛은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으므로.


- 작가의 말, 전시 서문 중

 

 

허채은 작가의 작품들은 대부분 소수자나, 괴물로 불렸던 이들, 그리고 온전히 기록되지 못했던 이들을 그 소재로 한다.

 

작가의 세상 속에서는 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주인공이며, 이들은 자신만의 색과 자신만의 목소리를 뿜어낸다. 이것이 소수자들을 타자화하고 부정하고 왜곡하며 혐오하는 이 세상에 저항하는 작가의 방식이며, 작가의 작품들을 모아놓고 보니 전시는 부정당한 자들을 위한 축제같았다.

 

많은 예술가들의 창작과 영감의 원천인 그리스로마신화는 허채은 작가에게도 많은 작품의 바탕이 된다. 현 20대 초중반이라면 다들 어린 시절 그리스로마신화 만화를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가나출판사의 <만화로 보는 그리스로마신화>는 우리의 어린 시절 한 구석에 소중히 자리잡고 있고, 허채은 작가에게도 그러하다.

 

나 또한 이 만화책 시리즈를 사랑했고 몇 번이나 정독했으며, 많은 여자 아이들이 그러했듯, 아테나와 아르테미스를 동경했다. 그리스로마신화는 신들을 상당히 ‘인간적’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적이며 매력적인데, 이러한 인간적인 면모를 더욱 살리며, 현대사회에 녹여낸 소설 <퍼시잭슨과 올림포스의 신> 시리즈 또한 내 학창시절에 큰 비중을 차지했던 책으로, 이러한 그리스로마신화에 대한 애정이 그녀의 작품에 더욱 관심을 갖게 했다.

 

*

   

[메두사] - 메두사는 그리스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괴물로, 머리카락이 뱀으로 되어있으며 눈을 마주치는 이는 돌로 변한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신화에 따르면 메두사는 본래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나 아테나에게 저주를 받아 흉측한 괴물로 변했다고 알려지며, 그 후 은둔하며 살다가 영웅 페르세우스에 의해서 목이 잘리게 된다.

 

작가는 이러한 메두사를 자신의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괴물이라 불리며 사람들의 공포와 혐오의 대상으로 살다 목이 잘려 죽었던, 메두사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다면 어떤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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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신화가 실제로는 곰 부족과 유입세력의 결탁, 그리고 밀려난 호랑이 부족의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꾸며진 이야기이듯, 신화는 당대의 인물과 사회 배경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메두사 이야기 또한, 실제로 사람을 돌로 만드는 괴물이 존재했다기보다는, 살아움직일 듯한 생동감을 담은 조각을 하곤 했던 한 여성 조각가의 실력이 너무나도 뛰어났던 나머지 사람을 돌로 만들었다는 소문이 돌게 된 건 아닐까 하는 가정이 훨씬 있을법한 이야기라는게 작가의 가정이다. 전설의 비르투오소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가 실제로 악마와 계약했다는 루머에 휩싸이곤 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충분히 그럴듯한 이야기다.

   

동시에 작가는 메두사를 그리며, 여성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을 겹쳐보았다. 카미유 클로델은 로댕의 제자이자 연인이었다. 로댕은 처음에는 그녀의 천재성을 인정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그녀가 예술계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하자 위협을 느꼈고 그러한 로댕과의 불화와 19세기 당대의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그녀의 재능은 충분히 꽃피지 못했고, 카미유 클로델은 정신병원에서 쓸쓸히 인생을 마치게 된다.

 

이제 메두사는 그녀의 세계관 속에서 완전히 다른 존재로 태어난다. 캔버스 위의 메두사와 눈을 마주치며, 작가의 서사 속의 한 사람으로서의 메두사를 만나본다.

 

*

 

[미노타우르스] - 미노타우르스 또한 그리스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소의 머리에 인간의 몸을 가진 괴물이다. 미노타우르스는 포세이돈을 모독한 미노스 왕과 왕비에게 내려진 저주에 의해 왕비 파시파에와 소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로, 삶의 대부분을 컴컴한 미궁 속에 갇혀살다 영웅 테세우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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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노타우르스는 대부분의 매체에서 아주 흉폭하고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형상으로 그려지지만, 허채은 작가의 미노타우르스는 비쩍 말랐고 허약해보인다. 컴컴한 미궁 속에서 살았던 미노타우르스는 사실 평생 햇빛이며 물이나 필요한 영양소를 채울 수 없었을 것이다. (제물로 9년에 한 번씩 인간을 바쳤다고는 전하지만..) 또 땅 속에서 지내는 두더지처럼, 시각도 거의 발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그러한 환경 속에서 미노타우르스는 어떠한 모습이었을지를 상상한 작가의 결과물은 이런 모습인 것이다.

 

태어나자 남들과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나와, 괴물이라 불려졌던 미노타우르스의 삶은 어땠을까.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을까. 마지막 순간에 그는 지옥같은 삶을 끝내고 싶었을까 아니면 그래도 살아서 세상의 빛을 보고 싶었을까. 이런 질문들에서 작가의 미노타우르스 시리즈는 시작되었다.

 

*

 

[이브와 릴리트] - 이브에 비해 우리에게 많이 익숙하지는 않은 릴리트는 유대신화에서 아담의 첫 번째 아내로 등장한다. 릴리트는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었다는 이브와는 달리, 아담과 동시에 만들어진 여성이라 전하며, 아담과 여호와에게 순종하기를 거부하고 낙원을 떠난다.

 

이제 이후의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창세기 2장에서는 “하느님께서는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의 일을 거들 짝을 만들어 주리라' 하시고는”,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다음 갈빗대 하나를 뽑아 여자를 만들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그리고 이브는 뱀의 유혹에 이끌려 금기된 선악과를 먹게 된다.

 

이 부분 때문에 유대교와 기독교에서는 여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화되기도 하였다. 태초의 인간의 원죄에서 여성의 죄질이 더 무거우며, 이에 따라 여성이 남성에게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이브는 무지하며 어리석은 여성으로 그려진다.

 

작가는 여기서 이브에 대한 시선을 비틀어보며, 릴리트가 뱀으로 둔갑해 이브를 유혹했다는 설에 영감을 받아 이브와 릴리트의 관계를 새롭게 창조해낸다. 이 서사에서 이브는 어리석게 유혹에 넘어간 자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자신의 호기심과 탐구심, 그리고 욕망에 따르며, 그리하여 저항하는 사람이다. 나아가 작가는 신에 의해 에덴 동산에 놓여져, 아담에 순종하는 아내로 살아가야 했던 두 여성의 연대를 담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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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짜여진 서사와 소수자성과 다양성에 대한 이해가 담긴 허채은 작가의 그림은 이야기와 컨텐츠를 즐기는 요즘 향유자들의 취향을 자극하며, 이 세계관은 알면 알수록 매력적이다. 허채은 작가의 앞으로의 작품에 등장할 캐릭터들에 대한 기대와,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응원을 보내며 글을 마친다.
 

 

[김민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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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  
    • 내 안의 릴리트를 만나는 상상을 하게 되네요~~

      알고보면 슬픈 서사가 있는 괴물들...
      질투와 선입견의 제물이 되네요~~
      어느 시대에나...
    • 0 0
  •  
  • 스텔라5
    • 잘 읽었습니다. 소수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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