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제목으로 완성되는 시 [도서/문학]

오늘, 그런 시를 만났어
글 입력 2022.07.29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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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으로 모든 걸 말해주는 소설이 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레프 톨스토이,『안나 카레니나』) 같은. 끝까지 돌아보지 않고 첫 문장, 첫 단락, 첫 구성을 힘 있게 밀고 나가는 소설은 묵직하고 믿음직하다.

반면 시라는 녀석들은 대체로 조금 더 변덕스러워서 첫 문장으로 우리를 죽이거나
 
 
백 살이 되면 좋겠다
아침에 눈을 뜨지 않아도 된다면
 
- 황인찬, 「백 살이 되면」 중에서
      
 
중간에 이르러 새삼 방향을 놓치거나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 최승자, 「개 같은 가을이」 중에서
 
 
마지막 문장에 도달해서 다시 시작하기도 한다.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새로 적었습니다

- 박준, 「장마」 중에서
 

그리고 눈에 띄는 조금 다른 느낌의 시를 읽는다.
 
곱씹을 새 없이 빠르게 끝을 찍었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가, 결국 제목까지 올려다보고서야 고개를 숙여 끄덕이게 되는 시.

 
멀리 가려면
물러서는 법을 배워야 해

- 정의정, 「그네」(2019 시민공모전) 전문
 

아차, 하며 제목을 다시 읽는 순간 머릿속에 “그네”를 탄 유년기 자신의 모습이 펼쳐진다.
 
가능하다면 지평선 저 너머까지도, “멀리 가려” 가녀린 발끝을 세워 힘껏 뒤로 "물러서는" 나. 진자 운동의 물리적 한계에 결국 제자리로 돌아올지라도,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뒤로도 세차게 발을 뻗지 않았던가.
 
나의 순수한 뒷걸음질을 기억하는 이런 시를 만나면 우리는 부끄럽다. 앞을 늘여 쓰거나 뒤에 덧붙여 쓰는 순간 망가지고 마는 역학적인 시. 이런 시는 앞으로 뒤로 세차게 흔들리다 제자리(제목)에 다시 도달해서야 완성되는 시다.

그리고 다른 한 편의 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나태주, 「풀꽃 1」 전문
 

무언가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야” 한다.
 
사랑의 구체적 방법론을 설파하는 이 짧고 아름답고 유명한 시는 어쩌면 많은 것을 제목에서 빚진다. 사랑을 주고받을 주체는 당연히 나와 “너”, 즉 ‘우리’다. 하지만 이런 사랑의 결실이 좀처럼 우리 가까이에 와닿지 않을 때가 있다. (“자세히” 볼수록 못나고, “오래” 볼수록 밉살스럽기에 우리는 대체로 사랑에 실패한다.)
 
사랑의 방법과 현실의 괴리. 그 낙담의 순간에 자그마한 시적 대상의 존재가 위로를 건넨다. 우리는 “사랑스럽”지 하물며 이름 없는 “풀꽃”도 그렇다는데, 하고 속삭이면서. 대상(제목)이 주체를 위로하는 시.
 
제목에 관해서라면, 이런 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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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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