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동시대 작가들이 우리에게 ‘사랑’을 역설하는 이유 [시각예술]

글 입력 2022.07.07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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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랑’을 주제로 한 전시가 눈에 띈다. 그라운드 시소의 'RED ROOM : LOVE IS IN THE AIR' 展, 디뮤지엄의 '어쨌든, 사랑' 展, 아르코미술관의 'ALL ABOUT LOVE' 展 등. 예술가는 왜 지금 시점에서 사랑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는가?

 

이 세 전시의 공통점은, 수많은 사랑의 형태 중 주로 연애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N포 세대에 진입하면서, 연애는 포기 요소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Z세대의 등장 이후, 연애는 ‘필수가 아닌 선택’ 사항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랑의 필요성을 논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전시들이 진정으로 함축하는 바는 무엇인가?

 

오늘 오피니언에서는 그라운드 시소와 아르코미술관의 전시를 소개하면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왜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해야 하는지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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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운드 시소의 'RED ROOM : LOVE IS IN THE AIR' 展은 그 자체로 파격적인 시도이다. 오로지 성인만 입장할 수 있는 ‘핫’한 전시이다. '레드룸'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과 연애를 하기 어려워지는 요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을 해야 한다.’ 그것들이 우리 무의식 속의 감정들을 깨닫게 하고, 인간다움의 향상과 삶의 원동력에 이바지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피어나는 레드룸에서,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나’를 매개로 하여 공동체의 영역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를 다시금 응시하게 되고, 무의식 속에 있던 다채롭고 극적인 감정 상태를 마주하게 된다.

 

레드룸은 은밀하게 여겨졌던 이야기들을 공적으로 해제하는 공간이다. 조금 부끄럽게 느껴지는 주제일지라도, 이 공간에서만큼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다. 특히, 관계 속의 ‘나’를 솔직하고 당당히 마주할 수 있다. 이러한 지점에서 이 전시의 가장 큰 매력이 드러난다.

 

예술이 흥미로운 이유 중 하나는, 사각지대에 놓인 당연한 것을 신선한 시각으로 다시 제공한다는 것에 있다. 사랑과 연애는 관람객 개인이 직접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와 필연적으로 결합하여 있다. 작가들의 예술로 새로이 경험하게 함으로써 잠시 관람객으로부터 분리한다. ‘낯설게 하기’, 혹은 ‘새롭게 보기’를 통해, 다시 새로운 감상으로 관람객에게 돌아간다.

 

'레드룸'은 연애와 사랑을 자극적이고 일시적인 것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자연스러운 것, 나를 더 다채롭게 만드는 것, 더 인간답게 하는 것인 ‘관계’에 집중하여 조명한다. 특정한 성별이나 인종, 나이 등의 특성에 집중하지 않고, 그보다 더 확장된 특성, 즉 인간 그 자체의 보편적인 이야기를 나누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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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 ROOM' 展이 ‘나’에 집중된 이야기였다면, 아르코미술관의 'ALL ABOUT LOVE' 展은 더 비판적이고, 사회적인 관점에서 ‘사랑’을 다룬다. 이 전시는 두 명의 작가를 소개하고 있는데, 오늘 오피니언에서 다룰 작가는 바로 곽영준이다.

 

이 전시의 주제 의식은 전시 제목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올 어바웃 러브”는 사회운동가이자 페미니즘 사상가인 벨 훅스의 책 제목을 빌려 온 것이다. 훅스는 이성애가 사랑의 전부가 아님을 강조한다. 사랑은 자아를 확장하고자 하는 의지로서 일상을 변화시킬 잠재력이다. 우리가 마주하는 모순과 부조리를 헤쳐 나갈 실천이자 해결책인 것이다.

 

곽영준이 조각과 영상을 통해 사랑을 그려내는 방식은 훅스의 접근 방법과 유사하다. 사랑을 표현하는 몸짓의 주체를 ‘이성애자’로 국한 짓지 않는다. 그는 특정한 성별 혹은 성 정체성을 지닌 사람으로 타자화되는 상황을 뒤집어버린다.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시선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갈망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곽영준이 묘사하는 신체는 사회 통념에 의해 정의하기 어렵다. 여성, 남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에 의해 판단하기 어렵고, 전형적인 ‘여성성’ 혹은 ‘남성성’이 드러난다고 해서 그것의 성별을 판단할 수는 없다. 그에게 있어서 신체는 단지 개인의 고유성을 담는 그릇일 뿐이다.

 

그러나 그 그릇은 개인의 정체성을 담아내는 것으로서, 사회적 통념과 충돌하는 지극히 정치적인 공간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종종 사회적인 시선은 개인의 정체성을 외면하고 심지어는 묻어버리기까지 한다. 나의 신체는 단지 나의 고유성을 담아내는 역할만 하면 된다. 그러한 역할을 넘어, 사회의 정치적인 싸움의 공론장이 되어버리니 피곤하지 않을 수 없다.

 

곽영준은 신체를 ‘껍질’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중요한 건 그 껍질이 담아내는 ‘정체성’이다. 작가는 자기 작품 전반에서 신체를 비틀고, 그 내면을 확장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신체의 특성을 집중 조명한다.

 

결국 곽영준은 작품을 통해 이성애적 관점을 극복하고, 성적 소수자를 이해하는 더 넓은 시각과 실천 방안을 제시한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연대를 담아내는 것, 그것을 사랑의 또 다른 정의로 본다면 어떨까.

 

“…사랑 안에서 이해를 시도한다면 조화로운 사회 혹은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다는 믿음을, 그리고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차별과 적대심을 직시하고 서로의 존재와 차이를 인정할 수 있는 용기를 시사한다.”

 

*

 

사랑은 무엇일까? 그 정체가 무엇이기에 동시대의 예술가들이 그 주제에 매혹되어 있으며, 우리에게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는가?

 

사랑은 종종 삶을 변화로 이끌며 간혹 송두리째 바꾸기까지 한다. 오늘 오피니언에서 살펴본 두 전시는, 사랑의 다양한 형태 중에서도 연애와 관련된 이야기를 다루었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전시가 강조하는 것은 자기표현의 기반으로서의 사랑이다. 인간은 사랑이라는 관계 맺음을 통해 ‘나’를 재확인한다. 극적인 감정들을 마주하고, 자신조차도 몰랐던 자기 모습을 새로이 발견한다. 그렇게 발견한 자기 모습은 새로운 정체성으로 자리 잡는다.

 

이렇게 형성된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자기표현은, 결국 서로 다름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하게 된다. 따라서 ‘다름’은 사랑에 있어서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시사하기까지 이른다. 다시 말해, ‘사랑’은 가부장적이고 사회적인 시선 폭력에 의해 가둬지는 것이 아니다. 차이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자세이자 구조적 차별과 부조리를 벗어날 수 있는 실천적 돌파구이다.

 

그러므로 동시대의 작가들은 우리에게 ‘사랑’을 전달하려 한다. 혐오로 점철된 정치면과 인터넷 커뮤니티. 그리고 점점 과소평가 되는 이해와 포용의 자세, 당연하게 여겨지는 부조리함.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실천으로서의 ‘사랑’을 제시한다. 구체적인 태도를 제시하기에 좋은 형태가 바로 ‘연애 감정’이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가 연인 관계에서 서로의 차이점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처럼, 사실은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는 데 있어서 우리의 다름이 심각한 이슈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장민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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