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망각의 선물, 잊는 것은 비극이 아니다 [공연]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 삶에서 망각은 선물일까, 비극일까?
글 입력 2022.07.05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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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질환을 앓던 엄마가 치료 후 기억을 잃었다. 더 이상 죽은 아들의 환영을 보는 망상은 사라졌지만, 남편과 결혼한 기억도 딸의 존재도 잊었다. 가족들은 앨범과 추억의 물건들을 꺼내 엄마의 기억을 되돌리기 위해 노력하다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판도라 상자를 열게 했다.


이 이야기는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의 한 부분이다.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내면에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굿맨 패밀리' 가족 구성원들의 아픔과 화해, 그리고 사랑을 그린 이 작품은 많은 공연애호가들에게 '인생작'으로 불린다. 아쉽게도 나는 굿맨 패밀리를 통해 희망을 느끼지 못했지만, 평범한 '행복'을 위해 포기해야 할 것들. 그중에서도 기억의 망각에 대해 사유하는 기회가 됐다.


망각(忘却). 사전적 정의는 '어떤 사실을 잊어버림.' 삶에서 망각은 선물일까, 비극일까?


이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머릿속에 기록된 기억만큼 망각 또한 중요하다"는 것. 가끔은 기억이 족쇄가 되어 발목을 잡는 일도 있으며, 사람은 일정 부분 잊어야만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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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전기치료로 기억을 잃은 다이애나는 16년째 양극성 장애를 앓은 정신질환 환자다.

 

죽은 아들 게이브를 가슴에 묻고 산 그녀는 행복의 상징인 3층 집에서 게이브의 환상을 보며 위안을 찾았다. 남편 댄과 딸 나탈리는 자신만의 세계 속에 빠져 항상 위태로운 다이애나를 보며 힘겨워했다. 아들을 그리워하다가 스스로 손목을 그어 자해한 아내를 지켜보던 댄은 위험한 전기치료 동의서에 사인을 했다.


다이애나는 전기치료 후 일부분 기억을 잃었다. 댄과 결혼한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고, 나탈리는 알아보지도 못했다. 가족들은 그런 다이애나의 기억을 되돌리기 위해 애썼다. 어느 정도 추억을 미화하며 아름다운 기억을 남겨주려 노력했다. 그들은 죽은 아들의 존재마저 잊은 다이애나와 함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그렇게 놓쳤다.


기억을 되돌리던 다이애나는 '무언가 빠져있다'고 위화감을 느꼈고, 결국 게이브의 존재를 떠올리게 됐다. 이후 그녀는 짐을 챙겨 집을 나가며 속박되어 있던 굴레를 벗어났다. 다이애나의 망각은 어쩌면 선물이었을지도 모른다. 가족들이 그토록 바라는 '행복한 가정'을 새로 일궈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을 수도 있다.


백지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듯 관계를 형성해 나갔다면, 이들 가족은 다소 어색하고 낯설어도 분열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린 나탈리는 불안한 부모에 의한 피해자로 분류할 수 있지만, 댄은 다르다. 좋은 남편, 좋은 아빠, 좋은 사람이고 싶었던 그는 '다이애나를 위한 일'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자신의 이기심을 정당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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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대화가 통하지 않아도 겉으로는 웃던 댄은 다이애나의 증상을 없애기 위해 위험한 치료법도 선택했다.

 

댄은 다이애나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내와 마찬가지로 죽은 게이브의 환영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함께 노력해보려는 의지 대신, 못 본 척 외면한 결과 다이애나는 더 깊은 수렁으로 빠졌고 결국 떠났다. 불이 꺼진 적막한 집안에서 댄은 게이브를 마주하게 됐다.


망각은 영원의 지속성을 지니지 않는다. 깨진 기억은 파편으로 남아 어느 한구석에 숨어있다가 생각지 못한 순간에 튀어 올라온다. 그 타이밍을 가늠할 수 없어 두렵지만, 잊는 연습, 잊혀지는 훈련 없이는 세상과 타협할 수 없다.

 

추억의 서랍 속에 저장된 기쁘고 행복한 기억은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고 꿈을 꾸게 하지만, 모든 기억이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사소한 과거 흑역사부터 재생하면 끔찍할 아픈 기억들까지 현재를 흔들 수 있는 요소들은 해마의 창고에 쌓여 '짠' 하고 나타날 그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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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나를 위해 망각은 중요하다. 떠올려 단지 괴롭기만 한 기억을 추억의 상처나 고통의 일부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단단히 묶어 어느 한 곳에 묻어두기보다, 바다에 풀어 녹아 사라질 수 있도록 지우는 연습이 필요하다.


만약, 기억을 잃은 다이애나가 수년 후 게이브를 떠올리게 되었다면? 새로운 관계로 단단해진 가족들의 애정어린 위로가 전기치료보다 더 좋은 치료법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원재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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