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하와이에서 제사 지내기 [도서/문학]

글 입력 2022.06.20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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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을 펼치고 마주한 것은 누군가의 가계도였다. '심시선 가계도' 주인공은 뻔히 알겠는데 그로부터 뻗어 나온 인물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많은 등장인물에 다소 부담스러움을 느끼며 주춤했지만, 주인공 시선의 생전 인터뷰가 실린 녹취록들이 내 '시선'을 이끌었다.

 

진행자: 본인 사후에도 그럼 제사를 거부하실 건가요?

심시선: 그럼요. 죽은 사람 위해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봤자 뭐하겠습니까? 사라져야 할 관습입니다.

 

이 소설은 제사에 관련된 이야기일까. 명절이면 화두 되는 며느리의 독박제사를 일컬어 모든 제사를 없애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걸 수도 있겠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시선이 뿌리내린 구성원은 이토록 많았지만 시선은 꽤 요즘 세대처럼 생각했고 행동했다. MZ 세대로 불리는 요즘 세대 말이다. 그들을 생각하면 없던 용기가 샘솟는다. 주위 시선과 평가를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나를 위해 성장하는 세대. 기성세대에 뿌리박힌 관습마저 타파하는 사람들.

 

소설 속 시선은 작고한 지 십 주기를 맞이한 통상 옛날 사람이다. 그러나 손녀인 우윤과 화수에게는 올곧은 시선으로 제 삶을 개척해 심시선 가계를 일궈낸 위대한 인물이기도 했다. 평생 제사 지내지 말라는 시선의 당부에도 십 주기를 기념하여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하와이로 온 가족이 떠나게 된다. 작가가 펼쳐내는 이야기는 표면상 대두되었던 집안 어르신의 제사 여론만은 아닐 것이다. 이 아름다운 가계가 시작된 곳 하와이, 그곳으로 가서 그를 기억하고자 부딪히고 성장하는 남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1. 시선으로부터 뻗어나온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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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에서 제사를 지내자.

 

최초의 발언은 장녀 명혜였다.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시선은 항상 등장했지만 과거 회상일 뿐, 죽고 없는 사람이었다. 이것은 제목 그대로 '시선으로부터' 뻗어 나온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시선의 말을 존중하여 오랜 시간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은 자식들의 의지일 것이다. 어렸을 적, 명절이면 큰 댁 방문은 필수였다. 자식이라면 당연지사 부모의 제사를 지내고 싶을 테지만 달가워하지 않는 며느리와 시키는 대로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아이들은 지루해했다. 내게 제사란 얼른 끝내고 맛있는 제사 음식을 나눠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기억 속에 없는 기억을 추억하며 성심껏 추모하는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엄마는 더 이상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5년 전, 할머니마저 작고한 뒤로 매년 절에 가서 영가 등을 달고 축원을 드렸다. 고리타분한 관습은 없앴지만, 그저 기억하고 싶은 것이다. 삶은 이기적이고 사는 것은 때론 고되기에 소중한 것을 자주 잊어버리기도 했다. 영가 등을 올린다고 죽은 사람이 알아주는 것은 아니어도 남아있는 사람들이 그들을 알고 기억했다. 하와이는 그런 곳이었다. 누군가의 엄마, 할머니였던 심시선이라는 존재를 기억하기에 탁월한 장소. '하와이에서 제사를 지낸다고?' 며느리 난정이 놀란 마음에 뱉은 말이 내 입안에서 맴돌았다. 거부감이 몰려오기도 전에 호기심이 먼저 들었다. 난정이 기억하는 시선은 피곤한 존재. 어느 순간에는 나를 온전히 이해하려 대면하는 궤변 가득한 시어머니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하와이는 소외됐던 관계도 뒤돌아보게 했다. 염산 테러로 인해 움츠러들었던 화수와 그를 이해하고 싶은 남편 상헌. 품에 두고 싶은 자식과 훨훨 날아가는 아이. 유독 시선의 가족들에게 일어나는 별일 같지만 여느 가정에서나 볼 법한 평범한 문제이다. 그들은 하와이를 걸었고, 시선을 생각했다. 시선에게 하와이는 기회의 땅이었지만, 고통의 연속이었고 직선으로 느리게 걷는 나날이었다. 하지만 끝내 묵묵히 제 삶을 살아냈다. 그렇기에 하와이는 아름답게 기억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와이 여행을 하며 기뻤던 순간, 인상 깊었던 순간과 특별한 경험을 제사상에 올리기로 한다. 누군가는 맛있는 팬케이크를, 코나 원두의 커피를 올리고 하와이의 거친 날 담아온 파도를 담기도 했다. 가족들에게 따뜻한 팬케이크를 맛보게 하기 위하여 자전거로 드리프트를 행했던 것, 부끄럽지만 엄마를 위해 최선을 다해 추었던 훌라춤. 그것이 제사라고 알려주지 않는다면 축제로 보일 것이다. 시선으로 하여금 한 자리에 모인 가족들은 생애 특별했던 하와이에서의 제사를 끝으로 아름다운 가계의 갈무리를 지으려 한다. 그것이 내게는 새 출발처럼 느껴졌다.

 

 

 

2.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



 

경아는 오래전에 식어버린 커피와, 오래전에 끝난 대화를 하와이에서 곱씹었다. 만약에 경아가 완벽한 코나 원두를 사서 엄마가 좋아하던 묵직한 미국식 머그에 내려 제사상에 올리면 죽고 없는 사람이라도 웃을 것이다. 그것은 두 사람만의 유머였으니까. 엄마, 그때 말했던 코나 원두야, 하고 죽고 없는 사람을 웃게 하고 싶었다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마음에 응어리처럼 자리 잡은 것은 시선을 위해 준비한 코나 원두를 도둑 맞고 아이처럼 엉엉 울던 경아의 모습이었다. 경아의 딸 해림이 왜 그런 걸로 우냐며 어리둥절해 하자 우윤은 속으로 읊조렸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해주고 싶었던 거야. 그 사람이 죽고 없어도.' 발랄하다 못해 신랄했던 시선과 가족들의 이야기가 한순간에 뭉클해진 장면이다. 십주 기, 자그마치 십 년이라는 시간 동안 매일 그리웠다면 거짓말이겠고 가슴속 한편에는 영영 떠나보내지 못한 그리움이 존재했다. 내게도 엄마를 떠올리면 코나 원두 향처럼 진하게 기억될 무언가가 있었나. 장차 미래를 생각하면 슬픔이 앞서지만 오래오래 행복한 기억으로 남기 위하여 순간을 수집하고 싶었다.

 

다소 무거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발랄하게 느껴지는 것은 심시선이라는 인물 덕이었다. 장녀 명혜를 일컬어 웬만해서는 지지 않는 시선의 성격을 가장 많이 물려받았으며, 나머지 딸들 명은과 경아까지(경아는 재혼으로 얻은 딸이다) 가계의 주축을 이루는 여자들이 하나같이 시선을 닮아 호쾌하기 그지없었다. 유일한 아들인 명준은 기도 못 펴고 놀림을 당하기 일쑤였으니.

 

모계 사회란 여성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여성이 권력을 잡는 구조는 아니었다. 뿌리의 근본이 여자에게 있는 것이다. 시선의 가족들은 달랐다. 여자들은 기가 센 것이 아니라, 기세가 당당했다. 남들이 마음대로 혀에 올리는 말들 대신 올곧은 시선으로 '시선'을 이해했고 그리워했다.

 

<시선으로부터,>는 한국전쟁을 겪은 20세기의 여성이 그 척박했던 시대에 새 터전을 일궈낸 일대기이다. 정세랑 작가는 그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라고 말했다. 많은 이들은 시선을 세기의 사랑의 주인공으로 기억했지만 시선으로부터 뻗어나온 가족들이 기억하는 그는 달랐다. 누군가의 러브스토리로 치부되기엔 시선은 자신만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하와이에서 지냈던 특별한 제사는 21세기로 이어지는 시선의 가족들이 바치는 사랑이다. 읽는 내내 오랜 해외 여행을 하는 것처럼 즐거웠고 슬픔보다 기분 좋은 감상을 느꼈다. 먼훗날 기억만으로 엄마를 더듬거리는 날이 온다면,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엄마가 살아낸 날들을 기억할 것이다.

 


[이보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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