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왠지 모를 '불편함'에 대해 외면하지 않기 [영화]

글 입력 2022.06.2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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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남한테 여자 친구를 빼앗긴 대학원생. 잡지사에서 친구를 돕다 알게 된 사실은, 편집장이 바로 그 문제의 유부남이라는 것. 호기심과 질투심 사이의 묘한 줄타기, 그 끝은 어디?”

 

 

넷플릭스에서 영화 <질투는 나의 힘(박찬옥, 2002)>을 설명하는 문구다. 으레 연상되는 이야기 전개는 다음과 같다. 한 명의 여자를 두고 대립하는 두 남자의 이야기. 직장 상사의 내연녀가 전 여자친구라는 사실을 숨기고 그에게 접근한 주인공의 끝은?

 

치정으로 점철된 결말을 기대할 수 있지만, 먼저 고백하자면 영화의 끝은 그렇지 않다. 그런 기대에 부응하려는 듯, 영화 포스터는 소위 ‘어그로’를 끌지만, 실상 <질투의 나의 힘>이라는 영화는 ‘로맨스’라는 탈을 쓴 드라마이다. 배우 박해일이 연기한 이원상처럼 속내를 알 수 없는 영화, <질투는 나의 힘>의 속내를 파헤쳐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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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악인 한윤식 과 사회초년생 이원상


 

한윤식(문성근 분)은 위 상황에서 언급되는 문제의 인물이다. 한성연(배종옥 분)과의 불륜도, ‘상황에 따라 바뀌는 환경에 따른 처세술’로서 합리화한다. 그의 불륜을 목격한 장인어른 앞에서도 위와 같이 대처하는 ‘처세술’만 놓고 보면, 사회에서 적잖이 높은 위치까지 올라가도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 그의 곁을 사회초년생인 이원상(박해일 분)이 맴돈다. 처음에는 질투심에, 자신의 여자친구를 빼앗아간 유부남이 도대체 누구길래? 그러나 영화가 전개될 수록 이원상의 눈에는 어느새 질투가 아닌, 동경어린 눈빛이 보인다.

 

여성편력 심한 꼰대 상사 '한윤식'이라는 캐릭터는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사귀고, 사회적 위치도 의지만 있으면 얻을 수 있는 영화의 유일한 '악인'으로 도식화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 <질투는 나의 힘>은 '한윤식'이라는 인물을 캐릭터의 전형성에 기댄 악인이 아니라,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보통의 사람으로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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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업계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쌓인 세월과 경력, 노력들이 빛을 발한다. 사회초년생때와는 다르게 어떤 돌발 상황에도 의연히 대처할 수 있는 연륜을 지닌 어른이 된다. 그만큼 식견도 높아지지만, 그만큼 쌓아온 자기 인생을 근거 삼아 누구에게나 일관된 잣대를 들이밀 가능성이 높다. 불편한 문제, 회피하고 싶은 문제 관해서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합리화 원리를 작동시키곤 한다.

 

마치 한윤식이 젊은날 자신이 '작가가 되지 못한 이유를 팔아먹을 영혼의 상처가 없어서'이며, '자신이 CEO가 되지 못한 이유는 돈없고 백이 없어서'라고 되뇌는 것처럼 말이다. 이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로, 뭉뚱그릴 수 있는 게 많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살다 보면 환경은 늘 바뀌죠. 전 후회하면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언뜻 그럴싸해 보이는 말이지만. 결국은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말로밖에 안들린다.

 

사회인이되고자 하는 요즘의 내가 하는 생각들을 떠올려 보면, ‘보통’과 닮아 있다. 적당히, 좋게 좋게, 유연하게, 보편적으로, 무난하게 등의 부사를 통해 복잡한 문제들을 뭉뚱그리거나 명쾌하게 만든다. 명쾌함. 불안한 청춘이 사회초년생이 가지고 싶어하는, 그 명쾌함을 한윤식은 갖고 있다. 원상은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다. 좋아하지도 않는데 욕정에 이끌려 하숙집의 딸과 잔 원상이 윤식의 조언을 듣고선 마음이 편해진다. “편집장님의 말을 들어보니까 문제가 너무 단순해진 것 같아요”

 

문제가 너무 단순해진 것 같아요. 결국 원상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을 듣고, 윤식처럼 합리화한다. 그러면 과연 윤식과 같은 어른 말고는 대안이 없나? 그 대안으로, 영화 안에서 박성연이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더 나아가 윤식의 딸 미림으로 변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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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하게 살아가는, 한성연과 이후 세대를 대변하는 미림


 

박성연은 한윤식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수의사, 사진작가 겸업을 하는 그녀는 윤식에게 자신이 술 때문에 섹스하고 싶은 거지, 다른 이유는 없다면서 취한 상태에서도 자기 의견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윤식과 달리, 성연은 결혼을 하지 않는다. 어쩌면 지금 시대보다도 남들에게 숱하게 들었을 말, “왜 결혼 안 해요?” 라는 질문에 일일이 답하기 귀찮아서라도 결혼했을 수도 있는, 그런 길을 택하지 않았다. '바람도 못 피우고 아내한테 못하는 놈보다 백번 낫다'며 편한 쪽으로 합리화시키는 윤식의 길과는 분명히 다르다. 그럴싸한 말로 포장하는 윤식과 달리, 성연은 자신에게 비교적 솔직하다. 세상이 정해주는 대로 살고 싶지 않다는 자신의 욕망을 인지하고 있는 편이며, 자신의 마음 또한 원상에게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원상에게 끌리지만, 실은 원상이 전 여자친구 때문에 윤식의 곁에 있고 그래서 자기를 좋아하는 건 아닌가 싶은 마음에 성연은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너 날 피하려고 하는 거 하고, 편집장님하고 무슨 상관 있니?”


하지만 원상은 모른 척 한다. 아니, 성연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누나가 편집장님 사랑하잖아요”

대뜸 성을 내는 원상. 성연은 그에 어이없이 웃으며 말한다. 


“무슨 대단한 양보라도 하겠다고 결심을 한거야?”


열등감 때문에 성연에게 끌린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원상의 비겁함이 결국 그가 윤식과 같은 어른이 될 것임을 암시한다. 


“어차피 게임이 안 돼요. 전에도 그랬어요. 저는 누나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어요” 

 

 

아마 원상이 "네, 편집장 때문에 누나 좋아했어요" 라고 솔직하게 말했어도 성연은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성연은 “꼭 누구랑 자야 한다면 나랑 자요. 나도 잘해요. 그 사람이랑 자지 마요”라고 솔직하게 말했던 원상에게 호감을 느꼈었던 거니까.

 

그리고 꽤 인상적인 시퀀스가 마지막에 등장하는데, 위 성연과 원상의 대화를 지켜본 한윤식의 중학생 딸 미림의 시퀀스다. 윤식의 집에 하숙을 하게 된 원상이 미림의 방에 찾아온다. 하지만 그의 말에도 미림은 별 대꾸를 않는다. 그러다 원상이 윤식이 부르는 거실로 나가 저녁상 앞에서 술 한 잔을 기울인다. 모든 진실을 파묻은 채, 아무것도 모르는 윤식의 아내와 함께 셋이 하하 호호 떠드는 풍경을 미림은 문틈 사이로 바라본다. 관조한다. 이후 세대를 대변하는 미림이, 자기 선택적 합리화를 통해 모든 문제를 단숨에 단순화시켜버리는 광경을 괄시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시퀀스가 아니었을까.

 

영화 <질투는 나의 힘 (2002)>을 보고서, 그냥 흘러보낼 수 있었지만 이상하게 불편한 감정에 지고 싶지 않아 펜을 들었다. 어떻게 하면 나는 한윤식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나는 외면하지 않고, 내 감정에 솔직해질 수 있을까. 펜을 내려놓는 지금까지도 아직 답을 잘 모르겠다. 그러나 훗날 이 글을 반추하며 이런 고민을 했던 시절이 있었음을 기억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 살면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민지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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